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복음> 10장 38-42절. 한국천주교주교회 번역본)
유명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다. 어릴 적 내게 이 대화는 성서 속 여러 장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예수의 말씀을 듣자고 일손을 놓은 마리아는 칭찬 받은 반면 예수를 대접하고자 열심히 일하던 마르타는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열심히 일한 게 타박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더구나 내가 속한 사회는 온통 '마르타'들 천지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1980년대 초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열심히 묵묵히 일하는 것이 이 사회의 최대 가치이자 신앙이다. 그리고 그 몫은 불어나는 살림이다. 새마을운동도 으뜸 구호가 "근면"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느 곳이나 근로 윤리를 강조한다지만, 20세기 말~21세기 초의 한국인만큼 이 윤리를 철저히 실행해온 사람들도 없다. 우리야말로 '마르타 민족'이다.
마르타 민족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기적을 만들어냈다. 식민지였고 게다가 전쟁의 상처까지 입은 나라가 불과 한 세대 만에 경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남들이 몇 세대에 걸쳐 쌓아올린 자본주의 체제를 이 땅의 '마르타'들은 본격 산업화를 처음 경험한 세대가 아직 은퇴도 하기 전에 축조했다. 한국 건설 자본의 공기(工期) 단축 신화는 사회 전체로도 현실이 됐다. 더불어 우리 모두는 "빨리 빨리"의 민족정신으로 세례 받았다.
사회과학자들은 이 독특한 집단 체험을 '압축 성장'이라, '돌진적 근대화'라 칭한다. 사실 타국에서 생산된 사회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한국 사회의 독특한 성격들 중 대부분은 이 체험 하나로 설명 가능하다. 그만큼 '압축 성장'은, 특히 이 단어의 앞부분('압축')은 우리 삶을 강력하게 규정한다. 무엇의 '압축'인가? '시간'의 압축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회에 없는 독특한 시간 경험이다. 이것이 우리를 돌아보면서 첫 발을 떼야 할 지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우리는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았다. 남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저들은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는 데에 한 세대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래서 노동 계급의 첫 세대에게 성장의 과실 따위는 완전히 남의 이야기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들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상에 대한 꿈에서 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여전히 꿈일 뿐이었지만 자본가들에 맞서 그들을 '사람'으로 서게 해줄 존엄한 표지였다.
세대를 이어가면서 저들은 결국 1인 1표의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그 한 세대 뒤에는 복지 국가를 만들어냈다. 각 세대는 저마다 패배와 비극(가령 파시즘의 승리나 세계 대전)도 맛보았지만, 충분히 자긍심을 느낄만한 위대한 성취를 남기기도 했다. 최근의 신자유주의 지구화 공세 속에서도 각 세대의 가장 뚜렷한 성과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역시 분명히 드러났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룰이나 복지 제도(영국의 경우라면 국민보건서비스(NHS)) 같은 것 말이다.
심지어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시간 경험에서도 우리와 다른 이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저들은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이 시대를 살아냈다. 그래서 기대와 환영의 시간도 길었지만, 각성과 환멸의 시간 또한 충분히 길었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처음 학습한 지 고작 10년 만에 월스트리트의 연쇄 부도 소식을 들은 우리와는 분명 달랐다.
그럼 이곳의 '마르타'들이 보낸 시간은 어땠는가? 지금 노년기를 보내는 이들은 젊은 시절 "잘 살아보세"라는 단 하나의 구령 아래 노동에 매달렸다. 놀랍게도 그들이 중년에 접어들 무렵 성장의 풍성한 과실이 벌써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선진 조국'이라는 목표가 결코 헛된 게 아니었음이 확인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극히 짧았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자신에게 상승의 기회를 부여했던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파도에 결국 휩쓸리는 신세가 되었다. 평생을 바친 성취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묘하게도 이 위기는 민주화 과정과 겹쳐서 다가왔다.
한편, 반독재 민주화와 민주 노조 운동을 시작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광주에서 학살이 있은 지 7년 만에 세력 관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압축 성장'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압축 민주화'가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되찾았으니 서구의 전범에 따라 다음 과제는 사회 경제적 권리의 실현이 되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민주' 정부 10년 뒤에 남은 것은 정반대 광경이었다. 1987년의 여진을 이어받은 '민주' 세력과 민주 노조 운동만으로는 민주화 다음의 과제에 착수조차 하기 힘들다는 게 드러났다. 아니, 역전 불가능하리라 믿어온 민주화 성과조차 새누리당 정권 아래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뭔가 '성취'를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들 뒤에는 좌절과 환멸로 무장한 채 사회에 나서는 또 다른 이들이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교리를 따르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주입받은 첫 세대다. 한데 이들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때 세계 언론은 신자유주의의 격동을 선포했다. 투기를 통한 기회의 문은 닫혔고, 불안정 고용의 정글이 이들을 맞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성취해야 할지, 아니 도대체 뭔가를 성취할 수는 있을지 회의에 빠져 있다.
이게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 사회의 어떤 세대도 자신의 성취로 내세울만한 게 없고, 그래서 모두를 지배하는 것은 폭발 임계치에 도달한 회한과 분노의 감정이다. 모두들 저마다 답답한데, 말문은 막혀 있다. 이 사회적 교착 상태의 정치적 표현이 다름 아닌 박근혜 정부다.
문제는 결국 시간이다. 압축 성장의 숨 막히는 시간에 내몰리면서 우리는 한때 우리의 성숙 역시 압축적으로 이뤄질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성장은 압축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숙은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성장의 시간을 압축하면서 우리는 성숙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이제 그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누군가가 진리라고 주입한 목표를 믿으며 묵묵히 열심히 일만 해온 시간과는 다른 시간. 나의 이야기로 비로소 말문을 열고 서로의 이야기에 정색하고 귀 기울이며 드디어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시간. "안녕들 하십니까"의 시간. 절교와 친교의 시간.
이 땅의 모든 마르타들이여, 애당초 우리가 영접하려던 것은 누구인가? 일손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업(業)'을 '파(罷)'하고 '연(緣)'을 '잇자'(結).
나의 동포, 지구 위의 둘도 없을 마르타 민족이여, 마리아가 되자.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 빼앗기지 않을 우리의 몫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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