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세트' 돌아온 상지대…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사학, 문제와 해법] <3> 기로에 선 상지대 시민대학 모델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던가. 이런 구호를 외치며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비리를 저지르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립학교 구(舊)재단 인사들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 자신이 사학 개혁에 반대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간 적이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자마자 분규를 겪은 임시 이사 체제의 대학들을 '정상화'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사학 재단 인사들은 대개 이 전 대통령의 충실한 후원자들이기도 했다.

2009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조선대, 세종대, 상지대, 대구대, 동덕여대, 광운대, 경기대, 덕성여대 등 사학 분쟁을 겪은 대학들이 차례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의 테이블에 올라갔다. 그로 인해 비리 사학 재단 관계자의 '귀환' 등 해묵은 문제들이 다시 불거졌다.


가장 상징적인 일은 영남대 문제일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교주'로 했던 이 학교는 10.26사태 이후 '교주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사실상 새 '주인'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학교 운영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결국 학내 비리로 이사직에서 물러나는 '굴욕'까지 겪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09년 사실상 영남대의 '주인'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요구해 관철시킨 사립학교법 개정안 때문이었다. 단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감이 있다.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 보다 못한 대학교수들이 나서서 '사학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회(사해연)'를 만들고 <사학 문제의 해법을 모색한다>(실천문학사)라는 책을 냈다. 사해연과 <프레시안>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오히려 수십 년 전 논쟁을 반복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 사학들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두 번째 사례가 상지대 문제다.

상지대 문제와 관련해 '상지대의 경험과 공영형 사학의 모색' 토론회가 지난 10월 14일 저녁 방송통신대 역사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발제는 정대화 상지대 교수(정치학, 사학개혁국본 공동대표)가 맡았고, 박거용 상지대 사범대학장,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박준순 동의대 교수협회장, 김영록 대불대 교수협회장, 김명연 상지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프레시안>은 정대화 교수의 발제문을 싣는다. <편집자>

[사학, 문제와 해법] 영남대 편
<1> 박근혜가 손 떼야 '박정희대'가 산다
<2> 영남대는 '박근혜 집안' 재산? "사학 공영화가 답"

상지대의 역사는 굴곡의 사학 역사

상지대의 역사는 사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재건을 시작할 때 사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교육에 대한 열망은 높았지만 국가가 국민들의 교육열을 담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학이 국가 공교육의 공백을 메웠다. 그러나 시작이 반듯하지는 못했다.

사학이 국가 공교육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이라면 형태상 사학이되 내용상 국공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학은 국가 공교육을 위해 출연된 자산인 만큼 이미 사유재산이 아닌 것이고 그 운영 또한 사기업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 사학이 재산 은닉의 수단이었거나 축재의 방법이었거나 가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한 공익 목적으로 출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학은 여전히 신성한 사유재산으로 간주되었고 설립자나 이사장은 주식회사의 대주주로 간주되었으며 가족 경영 주식회사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족벌 경영과 전횡, 온갖 부조리와 부패가 싹텄다.

상지대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처음 상지대는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5년 원주에서 관서대의숙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강원도 교육위원으로서 교육에 뜻을 두고 있던 원홍묵 선생이 사재를 털고 주변의 지원을 받아 설립했다. 1962년 재단법인 청암학원으로 조직 변경된 후 원주대학을 설립했으며 1964년 재단법인이 학교법인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사학이 그랬던 것처럼 상지대 역시 궁핍한 나라 사정과 청암학원의 취약한 재정 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째 시기는 임시이사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엄혹한 유신 초기 청암학원의 임시이사로 파고다가구를 경영하던 젊은 사업가 김문기 씨가 선임되었다. 김 씨는 임시이사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시이사회의 이사장이 되었고, 다음해인 1974년에 청암학원을 인수하여 이사장이 되었으며, 다시 청암학원을 상지학원으로 변경하고 상지대학을 설립하는 등 전광석화처럼 일을 진행했다.

그 후 김 씨는 1993년 문민정부의 사정 개혁 1호로 지목되어 상지학원에서 쫓겨날 때까지 20년간 상지학원의 이사장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고 언론이 '사학 비리 종합 선물 세트'라고 불렀던 그대로 온갖 사학 비리를 자행했다. 당시 상지대에서는 김 씨와 더불어 조선대의 박철웅, 현 인천대의 전신인 선인재단의 백선엽과 백인엽을 사학 비리 3관왕이라고 불렀다.

김 씨가 상지대에서 물러나고 상지대가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오명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추진한 것이 세 번째 시기에 해당한다. 상지대는 이 시기에 공영 방식의 대학 모델인 시민대학을 추진하였으며 시민대학 모델을 기반으로 교육부의 동의를 얻어 자력으로 정이사 체제를 확립하는 등 보기 드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2007년 대법원이 상지대 정이사 체제를 무효화하고 이어 구성된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2010년 상지대를 구재단에 되돌려주면서 상지대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학교는 다시 분규에 휩싸였으며 시민대학으로 불리던 상지대 모델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구재단 복귀에도 불구하고 김 씨가 학교를 장악한 것은 아니지만 상지대 모델 역시 더 이상 추진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지금 상지대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냐 과거로 되돌아갈 것이냐의 심각한 전환점에 서 있는 상황이다.

▲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열리던 날 상지대 학생과 교수들이 회의장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임시이사 파견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상지대를 옛 비리 재단 측에 넘겼다. ⓒ프레시안(허환주)

상지대 모델은 공영 방식의 시민대학

김 씨가 쫓겨난 후 수립된 임시이사 체제 하에서 상지대는 처음에 도립화를 추진했다. 당시 선인재단의 분규가 인천대 시립화로 결론이 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상지대를 강원도립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주시민 다수의 서명을 받아 도립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강원도는 인천시와 달랐다. 재정적인 여건도 취약했지만 무엇보다도 도립화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강원도청과 강원도의회가 반기지 않았다. 강원도에서 김 씨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도립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정부나 정치권의 동의와 무관한 방식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다. 국립대학으로 전환하는 방안, 재력가가 인수하는 방안, 다른 대학과 합치는 방안 등을 검토했다. 마땅치 않아 그냥 임시이사 체제를 지속하는 방안도 생각했다. 그러던 중 시민대학으로 발전하는 방안을 안출했다.

상지대는 시민대학을 "21세기 사회 발전의 새로운 원천으로 등장한 시민과 시민사회의 가치를 존중하는 정신 위에서 시민사회가 대학의 구성 주체와 협력하여 대학을 운영하면서 시민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학문과 교육의 목표로 설정하여 인간과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하는 대학으로서의 이미지이자 철학이며, 교육 목표이자 운영 방식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상지대 구성원들은 시민대학 모델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검토해왔던 여러 방안들에 대한 객관적인 비교 평가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대학 민주화와 대학 발전 등 9개 지표에서 시민대학 모델이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구성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이자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모델로 평가되었다. 이 시기가 1999년이며 상지대는 시민대학을 대학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독자적인 모델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상지대가 임시이사 체제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대학 모델로 시민대학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임시이사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학을 안정시켜야 할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나온 김씨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지대 복귀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비리 재단의 복귀를 차단해야 할 필요성도 절박했다. 무엇보다도 대학의 기본틀을 혁신하여 대학의 중장기 발전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만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대학을 대학답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시민대학을 지향한 상지대의 모델은 공동 운영의 정신, 시민 참여와 시민 재정의 정신, 시민사회의 가치를 실현하는 정신으로 정리된 3대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공동 운영의 정신은 대학 주체와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대학을 운영한다는 것이고, 시민 참여와 시민 재정의 정신은 학생 등록금에 의존하지 않고 참여한 시민들의 재정으로 대학을 운영한다는 것이고, 시민사회의 가치를 실현하는 정신은 상지대가 개방성과 공공성을 바탕으로 한 참여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 인권과 복지, 평화 등 시민사회의 가치를 대학 교육 과정에서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대학은 교육 목표의 공공성, 대학 재정의 공공성, 대학 운영의 공공성 등 교육의 3대 공공성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대학을 운영하고자 했다.

이 대학 모델은 밖으로는 대학과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개방적인 모델이며 안으로는 대학의 구성 주체들이 소통하고 협력하는 민주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엇보다도 대학을 이사회나 이사장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학 구성원의 것으로도 간주하지 않는 개방성과 학생 등록금에 의존하지 않는 시민 재정의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 상지대는 시민대학의 운영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대학과 시민사회가 함께 만나고 대학의 구성 주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로 시민대학운영협의회를 발족하였다.

상지대가 추진한 시민대학은 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대학 운영의 철학이자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민대학은 설립 주체의 관점에서는 사학에 해당되지만 사학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서 사학의 문제점들을 원천적으로 해결하면서 대학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기로에 선 상지대 시민대학 모델

상지대가 추진한 시민대학 모델은 교육계의 큰 관심 사항으로 부각되었고 임시이사가 파견된 대학들의 발전 모델로 간주되었다. 그런 만큼 사학 재단의 거부감도 높았으며 반격이 시작되었다. 상지대가 시민대학을 추진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정이사 체제를 수립하자 사학 재단과 일부 정치권과 법조계가 연대하여 상지대 정이사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어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학 비리로 쫓겨난 모든 비리 재단에 학교를 되돌려주는 대반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상지대뿐만 아니라 비리 재단을 축출하고 임시이사 체제 하에서 안정과 발전을 추구했던 조선대, 영남대, 대구대, 세종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경기대, 관동대, 서일대 등 대학과 수많은 초중등 학교들에서도 예외없이 비리 재단이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 분규가 시작되었다. 우리 사학의 역사가 1980년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지대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며 비리 재단이 복귀한 모든 대학이 이 상황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한 비리 재단의 예외 없는 복귀에도 불구하고 비리 재단이 학교를 장악하거나 학교를 안정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은 권력과 사학 재단의 공격에 잠시 움츠러든 것뿐이다. 실제로 복귀한 비리 재단이 학교 운영권을 장악한 곳은 영남대와 세종대뿐인데, 영남대는 최고 권력의 힘에 의해 침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세종대의 복귀는 최근 대법원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간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사학 비리를 자행하여 사법적 심판을 받아 교육 현장에서 쫓겨난 비리 주범에게 학교를 되돌려주는 것은 사학의 정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의 힘에 기대어 일시적으로 학교에 복귀할 수는 있겠지만,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것처럼 결코 학교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사학이 전체 고등교육의 85%를 상회하는 기형적인 대학 구조 하에서 사학 비리를 자행하고 족벌 경영 체제를 세습하는 사학의 고질적인 문제를 혁파하지 않고서는 대학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만큼 사학 개혁을 위한 노력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리 재단의 복귀로 지금은 비록 일시적인 침체 상태에 있지만 부패한 족벌 사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학 발전상을 제시한 상지대의 시민대학 모델은 사학 발전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반값 등록금이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한 상황에서 시민대학 모델에 국가의 재정 지원을 결합할 경우 공공성의 관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대학을 지원하고 대학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새로운 공영 대학의 모델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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