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장사' 퍼져 나간 안산·시흥…"30세 넘으면 탈락"

[2013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입상작·⑤] 공단 파견 노동자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아름다운 재단이 함께 진행한 '2013년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에 입상한 글 5편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마지막 글은 경기도 시화 공단의 한 빵 공장에서 파견 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담은 글입니다. <편집자>

화장을 지운 자본주의의 '맨 얼굴'을 보고 싶거든 안산시 원곡동과 시흥시 정왕동으로 오라. 당신은 인간이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 어디론가 팔려나가기를 기다리는 파견 노동자들은 '시급 4860원짜리 소모품'들이다. 당신이 아침 식사 대신 먹는 빵과 우유, 사무실에서 마시는 인스턴트 커피와 업무를 위해 사용하는 컴퓨터·사무기기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찾은 커피 전문점과 아이들의 간식으로 사 들고 가는 아이스크림, 잠자리에 누워 켜 놓은 가습기까지. 당신이 누리는 모든 것은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4860원짜리 소모품'들이 저임금·장시간노동으로 생산해 낸 것이다. 어떤 화려한 조명과 화장으로도 이 부끄러운 현실과 '맨 얼굴'은 감출 수가 없다.

한때, 모이면 누구나 아파트값 이야기를 하던 시절, 시화공고 앞엔 부동산 중개업소들이 즐비해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거품이 꺼진 지난 몇 해 동안, 그곳에 새로운 둥지를 튼 업체들은 '인간 장사'를 하는 곳이다. '파견','인력'이라는 간판을 붙인 이 시장은 소위 '돈 되는 사업'이다. 암세포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한 '인간 장사'는 자본의 탐욕과 이윤의 핏줄을 타고 우리 사회 구석구석 자리 잡았다.

2013년 어느 봄날, 주춤주춤 봄조차 발길이 더디던 그 날 새벽은 유난히 추웠다.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시화공고 사거리로 향했다.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의 파견노동자 실태조사를 하러 가는 길이다.

건물마다 빼곡히 들어선 파견업체들 앞에는 '어디론가 팔려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길거리 전봇대에는 파견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여자면 누구나"라는 광고 문구가 눈에 띈다. 아직도 이렇게 술집 광고를 하는 곳이 있나 싶어 다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밑에는 "생산직, 정규직 전환 가능"이라 쓰여 있었다. 파견업체 광고인 것이다.

파견업체 앞에서 통근 버스를 기다리는 노동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파견 실태조사를 위해 나왔는데요, 혹시 파견일 하시나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설문에 응해주시면 사은품으로 우산을 드려요." 그제야 자신이 조선족임을 밝히고 "우리도 해도 돼요?"라고 묻는다. "당연히 되죠." 한 부를 주니, 회사 언니들한테도 받아온다며 몇 부를 더 가져갔다.

한쪽에 젊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다가가 실태조사를 부탁했다. 그러자 "우리는 정규직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후 그들이 올라탄 통근버스는 주식회사 인터. 소사장제로 모든 라인을 운영하는 유명한 전자회사다. 그들은 모두 하청노동자들인 것이다.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노동자들.

실태조사를 통해 본 파견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이고 4대 보험도 들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 다칠 확률이 정규직의 25배나 되지만 산재처리는 언감생심이다. 직접생산공정 제조업에는 파견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실사용주-하도급업체-파견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인해 자신의 진짜 사장인 누구인지도 모른다.

실태조사는 '파견 노동자들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려주는데 정작 '파견·하청노동자'들이 직접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적었다. 그들의 침묵이 궁금해졌다. 이 '무거운 침묵'의 의미를 알기 위해 그들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했다.

▲ 경기도 안산과 시화 공단 일대에는 사진과 같은 인력 파견업체가 즐비해 있다. 많은 경우가 불법 파견이지만 파견 노동자들이나 사업주 모두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프레시안(최하얀)


벚꽃이 눈처럼 날리고, 꽃 떨어진 자리에 짙은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때, 벼룩시장을 펼쳐놓고 일자리를 찾았다. 대부분이 파견업체에서 하는 광고였다. 정규직 모집 광고가 사라졌다. 이젠 파견을 통하지 않고는 취업도 못 하게 된 현실이다.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가 없는지 찾아보았다. 몇 장을 넘기자 공단에서 가장 큰 회사의 사원 모집 광고가 있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빵 공장이다.

날씨가 짙게 가라앉은 날이면 공단을 넘어 주택가인 우리 동네까지 빵 냄새를 풍기는 그곳. 시화 공단에서 가장 큰 공장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면접을 보러 가니 공장 입구 매점 옆에 도급 회사 3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나를 채용하는 회사는 그중 가운데에 있는 도급 회사다. 내일 면접 보러 온 사람은 아마 그 옆 도급 회사에서 면접을 볼 것이다. 이 도급 회사들은 형식만 도급이고 실상은 회사 내에 차려진 '파견회사'에 불과했다.

면접을 보러온 사람은 모두 5명. 잠시 후 한사람이 들어와 자신을 박 과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마치 약장사 같았다. 한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월급은 200만 원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예상보다 많은 돈이어서 혹시나 했다. 하지만 역시나 였다. 최저임금 시급 4860원. 그것도 3개월간은 수습 기간이므로 최저임금의 90%라고 했다. 그 돈으로 월 200만 원을 벌려면 얼마나 일을 해야 할지 계산이 되질 않았다.

친절하게도 박 과장이 직접 설명을 해 줬다. "주야 맞교대 근무고요. 주야교대를 위해 한 달에 4일은 쉬게 됩니다. 항상 잔업이 있고, 주 5일제라 주말근무는 특근 처리 해줍니다." 즉, 한 달에 4일 쉬고, 매일 12시간씩 주야 맞교대로 일을 해야 그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순간 아찔해졌다. 이 말은 주야 교대 근무를 위해 쉬는 4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쉬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설명을 마친 박 과장이 입사 지원서를 내밀었다. 3명은 입사를 포기했다.

나의 입사 동기인 재형 씨는 공장 생활이 처음이었다. 29살인 그는 지방의 전문대를 졸업한 후 서울에 올라와서 줄곧 배달 일만 했다고 한다. 직장다운 직장을 찾고 싶어서 찾아온 게 이곳이다. 그의 첫 '직업다운' 직업은 빵 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다. 1년 정도 열심히 일하면 빵 공장에서 그를 정식으로 '스카우트'해 갈지 모른다. 이곳에서는 정규직이 된다는 이야기를 '스카우트'해간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재형 씨가 이 회사의 정직원이 될 확률은 3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일단 젊기 때문에 확률이 높지만, 강도 높은 노동과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희생하고, 비정규직의 설움을 모두 이겨내야만 비로소 정직원이 될 수 있다.

그곳에서 보름 정도 다닌 지운 씨가 귀띔해준 내용이다. "형님, 정직원 되고 싶으시죠. 그런데요 입사해서 정규직 될 확률이 삼십프로도 안될걸요. 우선 나이가 많으면 안돼요. 예전에는 모르겠는데, 최근에는 마흔 살이 넘으면 일단 재낀데요. 그리고 여기 일이 워낙 험해서 한 달에 절반은 그만둬요. 일이 많아서 휴일도 쉴 수 없어요. 파견이 휴일에 쉰다고 하면 엄청 눈치 줘요. 쉴 수는 있는데, 그런 사람은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없죠.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말 잘 듣는 사람만 골라서 정규직 시켜주니까요"

반월·시화 공단서 본 파견 노동자 현실 : 프레시안 지난 기획 보기

① 매일 아침 벌어지는 기괴한 '인간 경매', "이름도 몰라요"
② 고용시스템이 무너졌다…'파견'마저 '파견'하는 현실
③ 법대로 하자고? 불법파견·위장도급, 법이 키웠다

출근 첫날, 좀 일찍 회사에 나갔다. 재형 씨가 먼저 와있었다. 그는 긴장되는지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잠시 후 박 과장이 나타났다. 이것저것 주면서 서명하라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서명하고 나니 작업복을 줬다.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하더니 성큼성큼 걸어서 우리가 일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로 쓸 사물함에서 옷을 갈아입게 하고, 현장 출입 요령을 알려줬다. 현장에서 좀 떨어진 식당을 안내하고 나서 모자에 빨간 띠를 두른 사람에게 나를 넘겼다. 그는 재형 씨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이후,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 박 과장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떡 만드는 부서에 배치되었다. 나를 인계받은 빨간 머리띠는 나를 한참 세워놓고 자신의 일을 봤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작업 지시를 했다. 한 10여 분간 난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두들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자신의 일만 했다.

한참 만에 나타난 빨간 머리띠는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것처럼 "아 거기 있었네. 나 따라와요"하며 손짓했다. 조용히 따라갔다. 회사의 정식 작업 시작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하지만 일은 7시를 조금 넘긴 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빨간 머리띠는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곳은 거대한 방앗간이었다. 온갖 종류의 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상우야. 여기 신입"

나는 상우 씨 파트의 신입으로 배치되었다. 상우 씨는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일은 잘할 것 같은지, 말을 잘 들을 것 같은지 스캔하는 것이다. 일단 마음에 들었나 보다. "지난번 아저씨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 힘들었는데, 여기는 눈치가 빨라야 하거든요." 20대 중후반의 상우 씨는 반말과 존댓말을 적절히 섞어가며 나를 대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마흔하나요."
"예. 열심히 해야죠."
"지운이 형 여기 형님하고 같이 배합하세요."

상우 씨는 나를 지운 씨에게 인계해 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저쪽은 여기 반장 아줌마 아들이어서 그 빽으로 정규직 된 애예요. 군대 갔다 와서 줄곧 여기서 일했고, 정규직 되고 나서 얼마 안 돼 조장 달았어요"

지운 씨는 나보다 보름 먼저 들어왔고, 소속 하청 업체는 달랐다. 말하자면 지운 씨가 나의 사수인 셈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쌀과 소금 등을 적정한 비율로 배합해서 쌀가루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체 공정의 첫 시작이었다. 여기에서 쌀가루를 보내주지 않으면 다른 일들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서로 다른 하청업체 소속 직원 둘이서 하고 있었다. "사람이 없으면 상우랑 저랑 둘이 일하는데, 사람만 붙여 놓으면 쟤는 맨날 다른 데 가서 일해요."

지운 씨는 "나도 잘 몰라요"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일을 하는 중간중간 상우 씨를 찾아다녔다. 일의 강도는 높은 편이었다. 20kg이 넘는 쌀포대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 올려 쌀을 빻는 기계에 집어넣어야 했다. 첫 공정이었기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우리 밥 안 먹어요?"
"잠시만요. 이것만 끝내놓고요."


지운 씨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한참 후 기계가 멈췄다.

"식사하러 가시죠."
"여기는 점심시간이 없어요?"
"있죠."
"종이 안 울리던데."
"종은 안 울려요. 각자 알아서 눈치껏 먹으면 돼요."
"밥을 눈치 보면서 먹어요?"
"일이 많을 때는 굶는 일도 많아요. 예전에 한번은 너무 배고파서 밥 먹으러 간다니까. 그럴 시간 없다며 옆에 떡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아…"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회사가 다 있나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식당 곳곳에서 3~4명씩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저녁 7시쯤 되자, 빨간색 머리띠가 와서 내일 특근할 수 있냐고 물었다. 못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일 쉬고 다음날 야간 출근하라고 했다. 원청의 관리자가 하청업체 직원들의 근태관리를 직접하고 있었다.

둘째 날, 옷 갈아입고 7시쯤 현장에 가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조회를 서는 중이었다. 작업 시작 30분 전에 조회를 섰다. 빨간색 머리띠가 출석을 불렀다. 하청업체 소속 직원들과 원청회사 직원들이 섞여 있었다. 내 이름을 불렀다. "네"하고 대답하니 "어제 왜 안 나왔냐?"고 물었다. "일이 있어서 특근 안 했다"고 했더니 째려보았다. 출석을 부르고 나서 빨간색 머리띠가 업무 지시를 했다.

조회가 끝나고 첫날 일했던 곳으로 갔다. 일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반장이 왔다. "저 따라오세요" 하더니 포장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일하세요"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곳은 벌써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멀뚱하게 서있으니, 모자에 빨간띠를 두른 아주머니가 "뭐해? 놀러왔어?"한다. "네?" "거기 장갑 끼고 눌러 붙지 않게 섞어." 그게 끝이었다.

장갑을 끼고 재료가 눌러 붙지 않게 섞는 작업을 했다. 기름을 두르고 섞고를 반복하는 단순작업이었다. 하지만 기계 돌아가는 속도는 장난이 아니었다. 쉴 틈이 없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에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히 "좀 쉴게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들 머리에 빨간띠를 두른 아주머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신분을 구분할 수 있는 징표는 모자의 머리띠였다. 반장은 빨간색, 조장은 파란색. 직급이 없는 원청 직원이나 하청업체 직원은 아무 표시 없는 흰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기계가 멈추었다. "자 밥 먹으러 가자" 반장의 한마디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주섬주섬 장갑을 벗고 있는데 지운 씨가 나를 찾으러 왔다. "어제 특근 안했다고 좀 빡센 곳으로 보낸거예요" 지운 씨가 귀띔해줬다.

처음 야간근무를 해보는데다, 정신없이 일해서인지 배도 고프지 않았다. 지운 씨는 나를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오십대로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계셨다. 일 년 반 넘게 일했는데 아직 정규직이 못됐다고 한다. 김 씨 아저씨에게는 대학생 자식이 두 명이 있다고 했다. 이 회사 정규직은 학자금 지원을 받는단다. 김 씨 아저씨는 정규직 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지운 씨는 "저 아저씨는 나이가 많아서 정규직 못될 거"라고 했다. 아저씨가 담배 연기와 함께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쓰레기 청소를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니, 소란스러웠다. 새벽에 배송을 보내기 위해 현장의 모든 직원이 모여서 포장을 하고 있었다. 100여 명 가까운 인원이 달려들어 포장을 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3개의 하청업체 직원과 회사의 정직원들이 모두 섞여 일했다.

포장 일을 마치고 나니 잠시 한가해졌다. 지운 씨가 잠시 쉬자고 했다. 이 회사 들어와서 처음 쉬는 거였다. "쉬는 것도 요령껏 눈치껏 쉬어야 해요." 지운 씨가 담배를 피우며 한 말이다.

지운 씨는 형님하고 같이 치킨집을 하다가 일이 잘못돼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공장일은 처음인데,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제 통장에 28만 원밖에 없어요. 통장 잔액이 100만 원이 넘으면 여기 때려치울 거예요." 33세 젊은 지운 씨도 담배 연기와 함께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두 번째 쓰레기를 치우고 오면서 "여기는 위장도급, 불법파견인 거 같다"고 말했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원래 하청업체 직원들하고 정규직 직원들하고 저렇게 섞여서 일하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반장이 모두 일일이 작업 지시하고, 근태관리하고 그러면 진짜 도급업체라고 보기 어렵고, 그러면 불법파견일 가능성이 높아요."라고 했다.

지운 씨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내 얘기를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아무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게 끝이었다.
▲ 왼쪽은 반월·시화 공단 소재 한 공장 내 화장실 벽 낙서. 오늘쪽은 공단 내 부착된 파견업체의 인력 모집 광고. ⓒ안산시 비정규직 노동자 지원 센터 제공

이곳에서 일하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복종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청소를 했고, 작업 시작 종이 울리기 전에 기계를 돌렸다. 위장도급이네, 불법파견이네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이날, 나의 입사 동기 재형 씨가 그만두었다. 다시 서울로 갈 거라고 했다.

셋째 날. 쌀을 실으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곳에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밥 좀 먹여줘." 회사를 향한 절규의 목소리였다. "15개월만 참자" 처음 쓰인 문구는 "3개월만 참자"였다. 하지만 그 문구는 지워지고 "15개월만 참자"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에는 3개월 지나면 정규직을 시켜 주었었나 보다. 하지만 이제는 최소한 15개월은 되어야 정규직이 될 수 있었다.

1970년대 어느 공장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이 엘리베이터의 문구들을 보면서 비로소 파견노동자들의 '거대한 침묵'이 이해가 되었다. 정규직이 되고 싶어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밖으로 소리치는 대신 안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초등학생들처럼 낙서를 통해 자신의 불만들을 분출하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빵 공장은 우리나라 식품산업 20대 그룹에 속하는 대기업이다. 이곳에서 만든 빵들은 화려한 조명과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프렌차이즈 빵집으로 납품된다. 동네 곳곳, 가장 길목 좋은 곳에 있는 빵 가게의 빵들은 '한 달에 4번밖에 쉬지 못하는 아빠와, 자식들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남들 자는 시간에 온갖 눈치를 보며 일하는 50대 가장의 한숨과, 법 따위는 무시하고 위장도급을 일삼는 회사의 탐욕이 반죽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안개가 무겁게 내려앉은 어느 휴일 오후. 열린 창문 너머로 빵 냄새가 새어들어 왔다. 문득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지운 씨가 보고 싶어졌다. 28만 원밖에 없다던 그의 통장 잔액은 많이 늘었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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