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조치 이후 남한 경제적 피해 10조원 육박

국회 외통위원들, "5.24조치 해제 또는 수정" 요구

이명박 정부 때 시행됐던 5.24조치로 인한 남한의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가 89억 달러(한화 9조 4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의원들도 5.24조치의 해제 또는 조정을 요구하고 나서 향후 이에 대한 출구전략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실이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원회'에 연구 용역을 의뢰, 현대경제연구원의 홍순직 연구위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5.24조치로 인한 남한의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는 ▲금강산 관광 피해 11억 달러 ▲개성 관광 피해 3천만 달러 ▲개성공단 사업 피해 32억 달러 ▲남북교역 피해 43억 달러 ▲항공기 우회 운항 9천만 달러 등 약 89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구는 5.24조치가 시행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 동안의 피해를 중심으로 시행됐다. 2013년은 5.24조치 외에도 개성공단 잠정 중단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에 연구 범위에서 제외됐다. 이외에도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로 인한 외채 상환 부담 증가, 이산가족 상봉 중단 등의 물질적‧정신적 피해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정 의원은 1일 관련 자료 발표 이후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남북경협 기업들은 대부분 중소 및 영세 사업자들이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심각하고 3분의 1가량은 이미 폐업하거나 휴업했다"며 "이들 기업에 속해있는 근로자와 가족들까지 고려하면 체감 고통은 몇 배나 더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0년 5월 24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

'5.24조치'는 지난 2010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천안함 사태 이후 북한에 대한 응분의 조치를 취한다는 명분으로 발표한 담화다. 이 전 대통령은 이 담화에서 남북교역 중단,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 개성공단 투자확대 불허, 북한 내 신규투자 불허 등의 방침을 내세우며 대북 압박 수위를 높였다. 하지만 이 조치들은 결과적으로 북한 압박의 효과 보다는 남북경협 사업을 하고 있는 남한 기업들의 고통을 더 가중시켰다.

실제로 정 의원이 이날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5.24조치로 인한 북한의 직접적 경제적 피해는 22.6억 달러(한화 2조 4천억 원)에 그친 것으로 추산됐다. 남한의 직접적 피해액에 4분의 1 수준이다. 북한 압박을 위해 취했던 5.24조치가 실제로는 북한보다 남한에 더 많은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5.24조치 수정 요구 잇따라 제기돼

한편 이날 국회에서 열린 통일부 국정감사에서는 5.24조치를 해제하라는 외통위 소속 의원들의 요구가 이어졌다. 특히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의원들도 5.24조치의 해제 또는 재검토를 촉구해 5.24조치의 입지가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새누리당 정의화 의원은 "개성공단이 살아난 것은 남북 간 이익이 교차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 아닌가"라며 "5.24에 대해 융통성 있는 조치를 취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무소속 박주선 의원은 "남북교류협력법에 의하면 남북이 경협을 하는 지역에서 투자 자체를 전면 금지하는 규정이 없다. 5.24조치가 내려진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이는 결국 남한 기업에 족쇄만 채우는 꼴"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 홍익표 의원 역시 절차적 정당성 문제를 지적했다. 홍 의원은 "5.24조치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최소한 대북 제재법 같은 법령을 만들고 나서 시행됐어야 하지 않나"라며 "5.24조치에 대해 실질적인,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5.24조치가 왜 나왔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북한의 납득할 만한, 책임 있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여론"이라고 답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등이 있어야 5.24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는 여론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5.24조치, 박 대통령 강조한 '개성공단 국제화'에 걸림돌

이날 감사에서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외국 기업들의 신규 투자와 5.24조치가 충돌하는 문제에 대해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 의원은 "국내 기업과 형평성 문제도 있으니 외국 기업 신규투자는 5.24조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 장관은 이와 관련 "개성공단의 국제화가 진전되려면 5.24조치 등 대북제재 조치의 해제가 필요하다"면서 "외국 기업의 개성공단 투자는 5.24조치와 충돌하지 않지만 국내 기업의 신규투자는 충돌한다"고 설명했다.

류 장관의 설명대로 5.24조치는 국내 기업들의 신규 투자만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 기업의 개성공단 투자와는 무관한 사안이다. 하지만 외국 기업들의 실질적인 투자 방식을 고려해보면 5.24조치가 외국 기업의 투자를 저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소지가 충분하다.

외국 기업의 투자 방식에는 크게 ▲직접투자 ▲국내 기업과 합자 ▲국내 법인 설립 등 세 가지가 있는데, 직접투자의 경우 5.24조치와 상충되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직접투자 방식은 국내 기업 합자나 국내 법인 설립 등의 방식보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다. 단적인 예로 외국 기업은 국내 기업이 받는 상시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 즉 개성에 들어갈 때마다 방북 승인을 받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외국 기업투자가 실제로 진행된다면 외국 기업들은 직접 투자보다는 국내 기업 합자나 국내 법인 설립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외국 기업들이 국내 기업과 합자 또는 국내 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개성에 투자하면 이는 곧 국내 기업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투자 방식은 국내 기업의 신규 투자를 제한한 5.24조치와 상충된다.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활성화하려면 간접투자를 늘려야하는데 이것이 5.24조치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7일 개성공단을 관리하는 정부 고위 당국자는 기자들과 만난자리에서 "순수 국내 기업은 (신규투자가) 안되고 외국계 국내 기업은 된다는 것이냐는 논란이 생기는데 이에 대해 현재 정해진 것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라는 명목 아래 추진했던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국제화가 전임 정부의 5.24조치에 발목이 잡혀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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