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새 연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이다. 6일 서 이사장 연구실에서 2시간 40분에 걸쳐 인터뷰하고, 그 후 전화로 추가 질의응답을 했다. 그 내용을 세 편으로 나눠 전한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국전쟁과 관련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때때로 듣는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며 북한보다 훨씬 잘사는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전쟁을 겪으면서도 국가를 유지한 '국부(國父)' 이 전 대통령의 공이 크다는 의견이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적화 통일을 막아낸 이 전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의견도 접할 수 있다. 단정 수립이 그 당시 현실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주장과 맥이 닿는 의견이다. 더불어 미국에 감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중석 : 한국전쟁엔 특이한 면이 있다. 피스톤 전쟁, 대패 전쟁이라고도 불렸는데 뭐냐 하면 불쑥불쑥 밀고 당기는 식의 전쟁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순식간에 낙동강 한 귀퉁이만 빼놓고 다 밀려난 적이 있는가 하면, 한때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한이 일패도지해서 밀려났다. 그랬다가 또 그렇게 막강하다는 미군이 중국군한테 그야말로 어떻게 패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동계 전투에서 대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밀리는 일도 생겼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도 굉장히 큰 희생이 일어나게 된 거다. 그런데 이 전쟁을 가만히 보면,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전쟁이 중부 전선에 머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그렇게까지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고, 전혀 다른 의미의 한국전쟁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의 대응엔 문제가 많았다.

프레시안 : 미국의 대응에서 어떤 점이 문제였다고 보나.

서중석 : 1950년 5월 하순부터 6월 25일까지 북한에서 군과 물자가 집중적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왜 미국이 이에 관한 정보 보고를 중시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그 보고를 중시하고 잘 대응했다면) 미국은 전쟁을 미연에 막거나 전쟁 초기에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적극 참전한 건 다 인정하고 중시한다. 그건 미국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모두 미국은 늦게 참전하지 않았나. 그런데 한국전쟁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참전했다.

또 하나는 전선 교착 문제다. 1951년 5월쯤 되면 중국군이 또 밀리기 시작해 지금의 휴전선 근처에서 전선이 교착됐다. 그러면 빨리 전쟁을 그만두는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이후 2년이나 더 끈다.

이건 휴전 회담 때문인데, 미국도 1951년 5~6월경엔 이 전쟁에서 승자가 있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표가 휴전 회담을 제안했을 때, 미국이 바로 응한 것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전선을 어디에 그을 거냐를 가지고 4개월 정도 설왕설래 끌었고, 그다음에 18개월이라는 긴 기간이 포로 문제로 늘어졌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공산 쪽 책임도 크다. 이데올로기 전쟁, 이념 전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국가 위신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도 미국이나 중국이나 시간을 질질 끈 면이 있다.

그런 점도 오늘날 되새겨봐야 한다. 사실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른 것 아닌가. 지금의 휴전선하고 1951년 5~6월 전선하고 거의 똑같다. 그때 전쟁을 그만뒀다면 피해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공산군 물리친 '국부' 이승만? "잘한 게 없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어땠나.

서중석 : 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잘한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뭔가 한 것처럼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보다) 더 문제가 많다. 초기의 패배에 대통령 책임이 너무나 크다. 또 대통령의 도피 같은 것이 장병 사기에 어떤 영향을 줬느냐 하는 걸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 전 대통령은 1949년 2월경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특히 1949년 9-10월부터는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면 북한이 쳐들어올 것에도 대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전쟁 전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너무 어이없는 일이 많았다.

대부분의 전사 연구가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이 병력면에서 약간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아주 많았던 걸로 보진 않는다. 전투에 투입될 수 있던 인원을 이것저것 다 합쳐도 북한군은 20만 명을 못 넘었다. 남한의 전투 병력을 보면, 육군은 9만 명을 약간 넘었다. 경찰을 비롯한 다른 병력을 다 합쳤을 때 14만∼16만 정도로 잡는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교과서가 일부 잘못돼 있고 많은 사람에게 잘못된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양쪽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매우 적었다. 이기지 못하면 북한은 쫄딱 망하게 돼 있었다. 희한한 전쟁이었다. 이야기하지 않았나. 톱질처럼 그랬다고. 그렇기 때문에 초기 공격만 잘 막아내면 그다음부터는 북한이 맥을 못 추게 돼 있었다.

북한이 자주포라든가 전차, 야크기를 갖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렇게까지 우세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과 하천이 많기 때문에 시설만 제대로 해놓으면 방어하기가 좋은 면이 있다. 그런데 방어 시설을 잘 갖췄나? 이런 데서도 문제가 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장병의 3분의 1(2분의 1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건 믿기 어렵다)이 휴가 상태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을 해가지고 주요 장교들은 술에 흥청망청 녹초가 된 채 일요일을 맞이한 걸로 돼 있다. 그것 말고도 군 일부에서 '대전차 방어 시설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제대로 안 했다. 전쟁 직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곧 쳐들어올 거란 얘기까지 했다. 그랬는데도, 대비했다고 볼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이 스스로 공언한 만큼만이라도 대비했으면 전쟁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대비를 충분히 했다면 전투 양상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개전 직후) 중부 지방으로 북한군 3개 사단이 내려왔는데, 우리 6사단이 상당히 효율적으로 막았다. 오히려 초반전엔 승리했다. 7월 1일 이전까지는 북한이 중부 전선으로 내려오는 걸 저지했다. 그러니 서부 전선에서도 그만한 노력을 했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거다. 그런 노력을 했나? 너무나 문제가 많았다고 당시 지휘관은 물론 많은 군사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지 않나.

특히 사단장 교체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요 사단장을 교체했다. 전쟁 초기에 사단장의 힘이라는 건 아주 중요한 거다. 사단이 제대로 살아남느냐, 뿔뿔이 흩어져버리느냐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사단장이던 이형근(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군 군번 1번 <편집자>)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신임 사단장들이) 자기 사단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일부 학자는 남한의 최고 요직을 맡고 있던 사람 중에 간첩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이상한 현상이 같은 시기에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이승만의 사람들…'낙루' 국방부 장관과 '북어 사건' 총참모장

프레시안 : 그런 의문은 여전히 온라인 공간에서 회자되고 있다.

서중석 : 그런 점 못지않게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이나 총참모장(지금의 참모총장)에 어떤 사람을 썼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을 제대로 쓰느냐에 따라 국방 차원에서 대비를 잘했는지가 결정되는 걸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군 경력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다만 영국 상선의 선장은 했다.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할 때 이 사람은 국회에 나와 '5000톤 배 하나 주면 공산당을 다 치고 바다를 다 치겠다'는 호언장담까지 했다. 또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전 대통령은 그런 흰소리를 하는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앉혔다. 그 이전엔 내무부 장관을 맡겼고, 1950년 들어서는 국무총리 서리에 앉혔다. 신성모 같은 사람이 요직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낙루(落淚)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 노인네가 하문(下問)을 하면, 그 당시엔 하문이라고 했는데, 신성모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런 '낙루 장관', '지당(至當) 장관'이 많았다. 대통령이 방귀를 뀌니까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첨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하여튼 이 전 대통령은 군에 대해선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낙루 장관'을 국방부 장관에 2년 넘게 앉혀 놓았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해임하지 않았다. 1951년 들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하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국회에서도 세게 나오고 그러니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신성모 장관을 해임했다. 그러고 나서 또 요직인 일본 주재 대사를 시켰다.

총참모장 채병덕도 마찬가지였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데, 일제 때 야전군을 맡아본 적이 없다. 후방 일을 해서 작전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채병덕도 신성모 못지않게 이승만 개인에 대한 충성파였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김구 암살 사건에도 연루돼 있다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인물이다.

채병덕은 1949년에 총참모장이 됐다가 몇 달 후 '북어 사건'으로 해임됐다. 당시 38선에선 남북 간 물물 교환이 많았다. 그걸 장교들이 얻어 쓰기도 하고 군에서 필요한 비용으로도 쓴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북어 사건이 터졌는데, 사단장이던 김석원이 '채병덕 총참모장이 북한과 물물 거래를 하는 데 관여한 것 아니냐'고 맹렬히 공격하고 대통령에게 항의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통령은 채병덕과 김석원, 두 사람 다 물러나게 했다. 1949년 10월, 채병덕은 그렇게 해임되고 예편됐다. 그런데 두 달 후, 대통령이 채병덕을 현역으로 복귀시켰다. 하필이면 전쟁 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에는 다시 총참모장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는데, 채병덕은 작전을 제대로 펼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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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몰래 달아나고 또 달아나며 국민에겐 거짓말 방송

프레시안 :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떠오른다.

서중석 : 대통령은 또 어땠나. 전쟁이 났을 때 이 양반은 그야말로 노인네 모습이더라. (물론) 이분도 전쟁(을 이끈) 경험이 있을 수가 없다. 국가의 중요한 장도 1945년 이전엔 맡을 수가 없지 않았나. 행정 경험, 전쟁 경험 같은 게 없거나 아주 약할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대통령이란 건 굉장히 소중한 자리다. 바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거다. 전쟁 수행을 위해 풀어야 할 문제가 굉장히 많고 국민들에게 해야 할 조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6월 25일 일요일 당일엔 국무회의 같지도 않은 국무회의, '간담회'라고도 불리는데 그걸 열었을 뿐이다. 거기서 서로 잡담 비슷한 걸 한 걸로 돼 있지, 대책다운 대책을 논의하거나 세운 게 없다.

대통령은 6대 독자라 그런지 자기 목숨을 굉장히 중시했던 분 같다. 그날(6월 25일) 밤이 되니까 불안해졌는지, 피신하겠다고 했다. 존 무초 초대 주한 미국 대사가 오니까 무초 대사에게 '피신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 아느냐, 내가 없으면 이 나라 큰일 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무초 대사가 오히려 말렸다. '당신이 피신하면 군은 붕괴한다. 모든 방어 능력을 상실한다. 당신이 지켜야 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래서 그날은 이 노인네가 안 움직였다.

그다음 날은 월요일이니까 제대로 된 국무회의도 열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전황을 정확히 알리는) 방송이라도 했어야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 진주만 기습 사건이 나니까, 미국 사람들을 단결하게 하는 연설을 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으면 이 전 대통령도 국가 원수로서 국민한테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어떻게 해나가겠다' 하는 중요한 연설을 바로 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성모 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헛소리를 했다. 그러자 6월 26일 밤에 열린 심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수원 천도 결정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2-3시경 서울역에 비상 열차를 세워놓고 거기 타버렸다. 서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안 하고 혼자 가버렸다. 비밀이 새 나갈까 걱정돼서 그랬는진 몰라도, 다른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하고 비서진한테만 얘기해서 그 열차를 끌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프레시안 : 이때까지 국민들은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서중석 : 그렇다. 대전에서 대통령이 방송국 책임자를 불러 자기 말을 전국 방송으로 내보내게 했다. 거기서 녹음한 거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6월 27일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몇 차례 내보냈다.

하지만 이미 그땐 미아리 근처에서 쿵쾅거리고 있었다. 인민군이 거기까지 내려온 거다. 오죽하면 '이 방송, 이대로 안 된다'고 해서 27일 자정쯤 방송국에서 꺼버렸겠나. 전쟁이 나고 나서 처음으로 나간 대통령의 방송이 그랬다. 대통령이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없었다.

그 직후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 윗선에서 지시한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피란을 못 갔다. (그런데) 대통령은 대전에 가서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하다가 7월 1일에 또 피신했다. 대전이 함락되는 건 7월 20일이다. 그러니 적어도 7월 10일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위태롭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피신할 준비를 하더라도, 7월 초까지는 대통령이 전체 상황을 파악하면서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7월 1일 새벽 3시에 이번엔 대구 쪽으로 가면 게릴라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호남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그러고 나서 목포에서 또 배로 부산까지 갔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은 전쟁 났을 때 피신만 하고 다녔다.

▲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 ⓒ연합뉴스

전선에선 피 흘리는데 영구 집권 위해 우격다짐 개헌

프레시안 : 대통령이 그러는 동안 국민들은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서중석 : 대통령은 6월 28일에 비상조치령을 내렸다. 긴급 명령 제1호인데, 굉장한 엄벌주의였다. 2심, 3심을 거치지 않고 단심 재판으로 증거 없이 처단하고 중형을 부과할 수 있게끔 했다. 이것 때문에 부역자들이 참 많이 죽었다.

그에 더해 6월말 이후, 대개 7월 초에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이 시작돼 8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또 형무소에서도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거창, 산청, 함양, 남원, 영광, 함평 같은 지역에서 11사단을 비롯한 국군에 의한 큰 규모의 학살도 일어난다. 이런 것도 최종 책임은 대통령한테 갈 수 있다. 대통령이 어떻게든지 관민을 화합하게 하지 않고 엄격주의, 처벌주의로 간 것이다. 대규모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프레시안 : 이 시기 국회는 이승만 정권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국회는 (인권 유린을 막고자) 굉장한 노력을 한다. 사형(私刑)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관한 개정 법률안, 뒤이어 폐지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 식으로 국회랑 사사건건 맞서다가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는 거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1950년 6월 25일부터 거창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하는 1951년 봄까지, 대통령이 적절하게 전쟁을 수행했나? 그렇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대통령답게 일한 게 과연 얼마나 있나? 그리고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건 누가 봐도 미군, 즉 유엔군 이름으로 싸운 미군이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이 전 대통령이 한국전쟁에서 후세에 (좋게) 기억될 만한 것을 한 게 있나? 그런 건 없다.

프레시안 : 그 와중에 이 전 대통령은 우격다짐으로 헌법까지 고쳤다.

서중석 : 이 전 대통령은 권력을 강화하고 영구 집권을 꾀하기 위한 정치 파동만 일으키고 있었다.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에 이어 1951년 하반기에도 국회와 밀고 당기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다가 이 전 대통령은 도저히 국회에서는 대통령으로 재선될 것 같지 않으니까 직선제 헌법 개정안을 내놓는데, 1952년 1월에 참패했다. 가 19, 부 143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표차로 부결됐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을 동원하고 관제 민의를 만들어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았다. 그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대통령이 그런 난세 중의 난세를 초래한 것이다. 거기다 계엄령 해제를 국회에서 결정하면 대통령은 바로 집행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 그거 헌법 위반이다.

이렇게 부산 정치 파동 과정에서 위헌·위법을 이승만 정부가 너무나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런 속에서 1952년 7월 4일 발췌 개헌을 해가지고 영구 집권을 위한 초석을 닦았다.

그러고 있으면서 과연 전쟁 수행을 제대로 했겠나. 전선에선 사람들이 피 흘리고 있는데 (임시 수도) 부산에선 정부가 이렇게 위헌적인 행위를 장기간에 걸쳐 했다는 건 참 수치스런 일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을 이틀 앞둔 2009년 6월 23일 한밤중에,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략가 이승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프레시안 : 두 가지를 추가로 짚었으면 한다. 전쟁이 났을 때 대통령이 영락없는 노인네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와 달리, 이 전 대통령이 몸을 피하면서도 미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반전의 계기를 만드는 등 냉정한 전략가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의견도 있다. 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도 '전략가 이승만'의 공이라는 의견이다.

서중석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전략 같은 건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지켜주던 나라 아닌가. 미국은 자발적으로 앞장섰다. 무초 미국 대사가 바로 본국에 보고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국이) 이 전 대통령 말을 듣고 참전한 게 아니다. 자기들의 세계 전략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제를 보면, 정전협정 체결 후 한국에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는 건 미국으로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연출이긴 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아주 세게 주장한 것도 조약 체결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조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쪽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조약엔 북한이 쳐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승만식) 북진 통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한국의 행정 관리 아래 있다고 미국이 인정한 영토에 대한 무력 공격에 대해서만 한국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북한이 한국을 공격했을 때는 조약이 적용되지만 반대의 경우엔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 <편집자>)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전쟁이 나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즉각 개입하도록 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도 그간 끊임없이 나왔다. 북한이 침략할 경우 미국이 일정한 절차를 밟아 개입하도록 돼 있다는 말이다.

프레시안 : 두 번째는 북한의 책임 문제다. 진보 학계가 김일성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을 더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일부 있다.

서중석 : 그동안 많이 강조한 것처럼,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책임은 너무도 당연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최대의 잘못을 한 거다. 민주 기지론(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 지역을 우선 그 기지로 삼는다는 것. <편집자>)에 따라 (무력으로)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주 치명적인 오판을 한 거다. 국공내전 당시엔 미국이 중국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지만, 중국과 한국은 (상황이) 아주 다르지 않았나. 38선은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 세력 사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선이었다. 그걸 넘으면 미국이 개입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전쟁을 일으킨 건) 김일성의 큰 잘못이었다. 그 때문에 북한도 큰 피해를 봤고 남한에도 극우 반공 체제가 뿌리내리게 된 것 아닌가.

하나 덧붙이면, (해방 후) 북한은 민주 기지론, 남한은 단정론으로 가는 이상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외세를 등에 업은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게끔 되는 것이란 말이다. (전쟁 준비와 관련해 예를 들면) 북한엔 무기, 탄약 같은 것도 빈약했고 사단급 이상의 작전을 펼쳐본 사람이 없었다. 작전 체계를 짜준 게 소련군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국제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국공내전이나 미국의 남북전쟁 같은 것들과는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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