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빗장' 풀린 부동산, 돈이 갈 곳은…

[분석] 정부가 DTI 규제 완화 추진하는 배경

정부가 부동산 시장의 '판도라 상자'를 건드리기로 했다. 부동산 정책의 마지막 빗장인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하기로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계부채 문제 때문에 풀지 못하겠다"고 말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한발 물러선 셈이다. 얼어붙은 부동산 거래를 되살리려면 DTI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업계에선 지속해서 흘러나왔다. 정부는 DTI 완화를 통해 내수를 진작시킨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가계부채 1000조 시대임에도 '빚으로 빚을 해결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21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각 부처 장관과 10시간 가까운 마라톤 회의를 통해 DTI 기본 틀은 유지하되 주택거래와 소비촉진을 위해 실수요자의 특성에 맞춰 불합리한 부분을 보완하기로 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고액자산가와 은퇴자의 재산에 따른 DTI 차등 적용, 무주택자 미래소득 증가분 인정, 대출 승계에 따른 DTI 예외적용 등을 검토 중이다.

김대기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DTI 규제는 기본 틀을 유지하되 실수요자 특성에 맞춰 완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완화 방향을 설명했다. 최상목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도 "정부는 가계부채 문제를 여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지역에 따라 정해진) 비율은 그대로 두고 소득 위주로 운영되는 부분을 합리적으로 보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리하면 대출자 상환능력보다 더 많은 대출을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대출자 특성, 즉 자산 규모, 앞으로 연봉 인상치 등에 맞춰 유연성을 두겠다는 게 이번 DTI 완화 정책의 의도다.

▲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22일 주택거래 활성화 방안 정부부처 합동브리핑에서 DTI 완화 방안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빚에 허덕이는 '하우스푸어' 구제해 내수 진작?

현재 청와대, 기획재정부 등에서 나오는 말들을 종합해보면 이번 DTI 완화 정책의 혜택 대상 계층은 소득 4분위(소득 상위 60~80%), 즉 '하우스푸어'다. 전문가들은 저소득층(소득 1~2분위)이 전세금과 생계형 대출 등에 허덕인다면 소득 4분위는 하우스푸어에 해당하는 계층이라고 분석한다.

정부가 4분위 계층을 주요 대상으로 정한 이유는 이들의 높은 소비력이 내수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 이유를 이들이 주택담보대출에 허덕이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이들의 빚을 해결하기 위해 잠재 구매층 대상으로 DTI 규제를 완화해 이들의 집, 즉 하우스푸어의 집을 구매하도록 하겠다는 거다.

정부는 현재 서울 50%, 수도권 60%인 DTI 규제 비율은 그대로 유지할 계획이다. 다만 집을 살 수 있는 잠재 구매층을 대상으로 DTI 규제 비율을 조정할 방침이다. 정부가 생각하는 잠재 구매층은 젊은 직장인, 자산이 많은 은퇴자 등이다.

기존 DTI 산정방식은 현재의 소득만을 기준으로 한다. 소득이 낮을 경우, 그에 맞춰 대출 비율도 낮아진다. 정부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소득이 늘어날 게 확실한 젊은 직장인에게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해 주택 구매 의욕을 독려하겠다는 생각이다. 자산이 많은 은퇴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부동산 거래가 활성화되고, 자연히 집을 팔고 싶어도 거래가 끊겨 팔지 못해 부채에 허덕이던 하우스푸어도 숨통이 트일 거라고 정부는 판단한다. 자연히 부채의 늪에서 벗어난 중·상층급, 즉 4분위 계층의 소비구매력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내수가 살아날 거라 예상한다.

그간 건설업계와 부동산 업계에서는 DTI 규제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했고, 자연히 내수도 죽고 있다며 해제를 요구했다. 집값이 상승한다는 기대가 있어야 전세를 사는 주택 잠재 구매층이 자가(自家)로 갈아타지만, 집값이 내리고 있는 이상, 이들이 집을 사긴 요원하다는 것. 이에 집을 사도록 일종의 계기를 마련해줘야 하는데, 그것이 부동산 업계에선 DTI 규제 완화였다.

규제 풀어도 집 사는 게 아니라 생계비로 사용될 우려 커

그간 정부가 DTI 규제 완화를 미뤄왔던 건 1000조에 육박하는 가계부채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잠재 구매층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DTI가 완화되기 때문에 가계부채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부동산 가격이 장기 내림세로 돌입한 마당에 부채 한도를 늘려준다고 누가 집을 사겠느냐는 지적이다. 되레 가계부채가 더욱 늘어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가계부채 1000조 원 중 약 400조 원을 차지하는 주택담보대출 비용에서 약 48%는 주택을 사느라 대출받은 게 아니라 기존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생활비로 사용하는 금액이다. 이 비율은 경기 불황기를 맞아 지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

게다가 부동산 시장은 장기 유로존 위기 등 해외 악재와 맞물려 장기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다. 가격은 계속 내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출 비율을 높여봤자 대출금은 다시 생계비로 쓰일 수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다.

그나마 부동산 거래가 활성화된다 해도 강남 지역 등 버블세븐 지역에 국한될 거라는 게 전문가 분석이다. 고종완 RE Member 대표는 "지금 상황에서 DTI가 해제될 경우, 풀린 돈이 갈 곳은 안전한 강남 부동산"이라며 "유럽 위기로 금융도 불안하고 주식도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토지정의도 23일 보도자료를 내고 "거품이 끼었던 부동산가격이 바닥을 쳤다는 시그널이 시장에 인식되지 않는 이상 상식적인 실수요자들은 빚을 내 부동산을 사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고액자산가들에게 DTI 규제를 완화해준다면 빚을 늘려 국지적으로 부동산가격이 상승하는 지역의 부동산을 살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토지정의는 "이런 사람들이 과연 정부가 말하는 '실수요자'인지 의문"이라며 "지금의 부동산 시장 상황에서는 DTI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부동산 시장의 경기 부양에는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 강남에 위치한 아파트들. ⓒ연합뉴스

"정부는 집값 안정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굳이' DTI 규제 완화 정책을 펼치는 이유는 꽁꽁 얼어 있는 내수 시장을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통해 해결해보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하지만 현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경제 측면에서만 보는 게 문제라고 시민단체는 지적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23일 보도자료를 내고 "현재 부동산 가격하락과 시장침체는 그동안 거품이 확대되며 올랐던 가격이 조정을 받아 정상화되는 과정"이라며 "이에 급격한 시장침체를 막기 위한 공공주택 확대 등 연착륙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실련은 "하지만 정부는 집값 안정의 근간을 흔들고 다시 투기와 거품을 확대해 부동산 시장을 인위적으로 부양시켜 건설업자와 은행만 배를 불리는 DTI 규제완화를 펼치고 있다"며 "이는 오히려 시장의 불확실성만 높일 뿐"이라고 밝혔다.

토지정의도 "하우스푸어, 가계부채 등의 문제는 부동산을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부동산불패신화의 패러다임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며 "정부는 더욱 긴 안목으로 부동산에 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함으로써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초석을 놓은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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