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철 인권위 '만신창이'…한나라 추천 위원도 사퇴

유남영·문경란 위원 1일 동반 사퇴, 후폭풍 거셀 듯

차관급인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2명이 1일 현병철 위원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동반 사퇴했다. 상임위원 3명 중 2명이, 그것도 조직의 장을 비판하며 임기 중 사퇴한 것은 2001년 인권위 설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 그 파장이 주목된다.

유남영, 문경란 인권위 상임위원은 이날 오전 현병철 위원장과 상임위원 중 나머지 한 명인 장향숙 위원이 참석한 상임위원회 간담회에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유는 현 위원장이 취임하며 인권위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 위원장 권력기관의 눈치만"

문경란 위원은 이날 사퇴의사를 밝힌 뒤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장고 끝에 사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문 위원은 현 위원장을 두고 "그간 권력의 눈치만 신경을 쓸 뿐 인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며 "현 위원장의 판단 근거는 권력기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문 위원은 "힘 있는 기관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봐 스스로 움츠리는 인권위는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인권위를 만들어준 국민의 여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며 "인권위가 권력의 눈치나 보는 한심한 역할을 자임할 때, 인권위는 존립 의미까지 되묻게 되는 처지에 몰린다"고 말했다. 문 위원은 언론인 출신으로 한나라당 추천으로 상임위원이다.

유 위원도 "인권위가 인권위법에 따라 주어진 권한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며 "밖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인권위 운영에 있어 인권위답지 못한 파행을 계속해왔다"고 쓴 소리를 던졌다.

▲ 국가인권위원회 전원회의. ⓒ연합뉴스

실제 그간 인권위가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국가가 박원순 변호사를 상대로 소송을 낸 사건, 문화방송 PD수첩 건, 야간시위 위헌법률심판제청 건, 국가기관의 민간인 사찰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현병철 위원장은 독단적인 행보로 상임위원들과 대립각을 세워왔었다. 지난 2월에는 전원위 의결이 나지 않은 북한인권법안 관련 안건을 인권위 입장인 것처럼 국회에 보고해 논란을 빚었고, 용산참사 의견서 제출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회의를 진행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상임위원들이 인권위 직원들에게 각종 인권 현안을 보고받는 월례회의를 현 위원장이 일방적으로 없애기도 했다. 상임위원들은 상정된 안건만을 의결하기 때문에 상정된 안 이외의 것들은 월례회의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문경란 위원은 "월례회의를 통해 알게 된 인권 사안들을 현 위원장에게 왜 상정하지 않았느냐고 압박해 상정시킨 경우도 있었다"며 "하지만 이러한 월례회의를 없애고 난 뒤에는 오로지 상정된 안건만을 심의할 뿐 다른 안들은 볼 수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월례회의 폐지로 인해 상임위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운영규칙 개정안으로 폭발

무엇보다도 이들의 사퇴 의사 표명에는 지난 25일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상임위 운영규칙 개정안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운영규칙 개정안은 상임위원 3명이 특정 안건에 합의해도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전원위에 상정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상임위 의결로만 가능했던 긴급 인권 현안에 대한 의견 표명도 전원위를 거치도록 해 사실상 상임위 권한을 축소시키는 개정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상임위가 현 위원장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 상임위를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지적도 제기됐었다. 당시 유 위원과 문 위원은 개정안 상정에 불만을 표시하고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퇴장했었다.

문 위원은 "개정안은 상임위원이 갖는 의결권마저도 봉쇄하겠다는 의도"라며 "더 이상 상임위원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문 위원은 지난 25일 열린 전원회의에서 개정안 통과가 다음 전원회의로 유보됐다는 사실을 듣고 사퇴 의사를 굳혔다.

문 위원은 "그간 현병철 위원장 이후 인권위는 막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그나마 인권위에서 제 역할을 하고 견제를 해온 게 상임위인데 이젠 그것마저도 제대로 작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밝혔다.

문 위원은 "인권위는 공권력이 인권을 침해할 경우, 권력기관에 쓴 소리를 하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라며 "소수자 등을 특별히 돌봐줘야 하는 게 인권위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문 위원은 "그렇기에 인권위에서 제 역할을 위해 끝까지 맡은 일을 다 하려 했다"며 "하지만 이젠 인권위가 고사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을 알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사퇴 이유를 설명했다.

인권위 어디로 가나

사퇴한 두 상임위원의 사퇴로 그나마 인권위에서 여러 일을 진행해왔던 상임위원회는 결국 개점휴업을 하게 될 전망이다.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 공항 알몸투시기 등에 대한 의견이 상임위 차원에서 제출 됐었다.

새로 상임위원이 선임된다 하더라도 이번에 사퇴 의사를 밝힌 두 위원은 각각 대통령 추천인사와 한나라당 추천 인사이기 때문에 보수 성향의 인사가 선임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인권위의 역할이 지금보다도 더욱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명숙 인권단체연석회의 활동가는 "상임위 운영규칙 개정안은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겠다는 의미"라며 "그렇지 않아도 위원장 눈치를 보는 직원들이 있어 상임위원들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조건이었는데, 이젠 논의 과정마저도 위원장 마음대로 하겠다고 개정안을 상정하니 상임위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명숙 활동가는 "상임위원들이 사퇴한 것은 얼마나 인권위가 비 민주적이고 비 인권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향후 인권위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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