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태의 교훈…"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팼어야!"

[화제의 책] 도로시 넬킨의 <셀링 사이언스>

황우석 씨의 과학 사기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2006년 2월에 있었던 일이다. 한 토론회에서 '황우석 사태'를 초래한 주범으로 수년간 황 씨의 '나팔수'가 돼 엉터리 기사를 쓴 각 언론의 과학 '전문(?)' 기자를 지목한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유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더니 당장 현장에 있었던 한 과학 기자가 반박을 했다.

"'유착'이라니요!"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토론회가 끝나고 나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유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물들이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결합하여 있음. '엉겨 붙기'로 순화." 수년간 황우석 씨와 말 그대로 "엉겨 붙어" 있었던 과학 기자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이 단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이런 황우석 씨와 과학 기자의 '유착'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그 끔찍했던 황우석 사태가 지난 지금 과학 기자의 모습은 나아졌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최근에 나온 도로시 넬킨의 <셀링 사이언스>(김명진 옮김, 궁리 펴냄)다.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

▲ <셀링 사이언스>(도로시 넬킨 지음, 김명진 옮김, 궁리 펴냄). ⓒ프레시안
황우석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이들은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기자의 '무식'을 숱한 오보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분석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각 언론이 앞 다퉈 과학, 의학을 담당하는 이른바 '전문' 기자를 채용한지 꽤 되었지만, 바로 그 수많은 '전문' 기자들이야말로 황 씨와 엉겨 붙어서 오보를 생산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황우석 씨와 과학 기자들이 엉겨 붙어서 시민의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먼저 넬킨이 인용하는 <뉴욕타임스> 기자의 고백부터 들어보자. 단언하건대, 과학을 한 번이라도 담당해본 기자라면 누구나 이 고백에 공감할 것이다.

"난 최근에 과학 기자 일을 정리하고 정치부로 옮겼어요. 정치 기사를 쓰니 예전에 과학 기사를 쓰던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느껴지더군요. (…) 과학 기자가 과학계로부터 거리를 두기란 매우 어렵죠. 지금은 내가 지닌 기자로서의 타고난 감각을 동원해서 대통령에 관해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과학 기자로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죠."

이 기자의 고백대로, 과학 기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능력은 바로 과학자의 말 또는 글을 잘 '받아쓰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자의 말, 글을 잘 받아쓴 '유능한' 기자는 많은 과학자를 알고, "자신이 '관리'하는 신뢰받는 과학자"를 갖는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다. 오히려 관리를 당하는 것은 기자들 스스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자들은 과학자의 시각을 체화한다.

"과학자를 객관적인 정보원으로 간주하도록 사회화된 기자들은 확인하기 어려운 주장과 마주치면 자신들이 (과학자로부터) 들은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과학이 중립적 권위자이자 진리의 객관적 심판자라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과학적 전문성에 무비판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을 강화한다.

그 결과 많은 기자들이 과학자들의 사고방식 내지 '프레임'을 받아들여 정보원이 정의하는 대로 과학을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정보원이 특수한 편향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일 때조차도 말이다. 이 때문에 미술, 연극, 문학은 일상적으로 비평에 노출되는 반면, 과학기술은 터무니없는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거의 항상 그로부터 면제된다."


과학의 '나팔수'로 전락한 언론

안타깝게도 황우석 사태가 지나고 나서도 과학 기자의 이런 모습은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더욱더 우려할 만한 모습까지 보인다. 언론이 아예 대놓고 과학자의 놀이터를 제공하는 모습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가 언론을 아래와 같이 보는 상황에서, 이런 모습은 언론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과학을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책임만 맡은 통로 내지 도관으로 언론을 사고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학 영역 내에서 하듯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흐름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들은 언론의 목적이 과학을 홍보하는 긍정적 이미지 전달에 있다고 가정하며, 언론을 과학 목표를 추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본다."

그렇다면, 언론은 과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언론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하고, 과학기술 보도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넬킨 역시 과학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렇게 제시한다.

"기자는 정보뿐만 아니라 이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학계의 사건에 단순히 반응해 이를 대중이 소비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명료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과학 활동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함의, 의사 결정을 떠받치는 증거의 성격, 그리고 과학이 인간사에 적용될 때 갖는 힘뿐만 아니라 그것의 한계까지도 시민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요구는 (어떤 분야를 담당하든) 기자가 항상 추구해야 할 사실(fact)에 대한 철저한 조사, 대담한 해석, 비판적 탐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무리한 요구라고 볼 수도 없다. 실제로 1960년대부터 일부 과학 기자가 했던 다음과 같은 자각이야말로 오늘날 과학 기자가 배워야 할 태도다.

"다른 분야의 언론에서 요구되는, 자유로운 조사와 회의주의 정신이 과학 보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존 리어) "기자는 과학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진행되는 활동에 관해 보도하는 직업이다. 정치부 기자들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보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데이비드 펄먼)

우리는 기회를 놓쳤다

사실 <셀링 사이언스>는 과학, 환경을 담당하는 기자로 일하면서 답답할 때마다 교과서처럼 참고하던 책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번역으로 나오니 반갑기 그지없다. 기자는 물론이고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정독해야 할 책이다. 특히 과학 기자를 꿈꾸는 이라면 이 책을 자신의 '멘토'로 여겨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이 책을 읽고 나서 황우석 씨의 나팔수로 활약(?) 또는 침묵했던 그때 그 기자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기사를 쓰는지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그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이 여전히 나팔수 역할을 열심히 수행 중이었다. 아! 그때 우리는 과학 언론을 개혁할 기회를 놓쳤다. 루쉰의 말이 떠오른다.

"어수룩한 사람이 개가 물에 빠진 것을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여기고, 이미 참회했음이 분명하며 다시는 사람을 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착각이다. 요컨대, 사람을 무는 개라면 그 놈이 뭍에 있건 물 속에 있건 전부 때려도 되는 부류에 속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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