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흘러든 '후쿠시마 재앙', 당신은 피해자 아닌 공범!

[3.11 대지진 2년]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말하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인근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는 1, 2, 3호기 연료봉이 노심에 삽입되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인해 발전은 중지되었다. 대략 45분쯤 후 쓰나미가 핵발전소를 덮쳤고,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포함한 모든 외부전력이 끊어졌다. 지진 발생 5시간 만인 오후 7시 반 1호기의 연료봉 손상이 시작되었고, 오후 9시부터 원자로 내부 온도는 연료봉이 녹는 온도인 2800도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6시 연료봉이 녹아내려 원자로 압력용기에 고였고, 결국 압력 용기에 구멍이 뚫리면서 방사능이 외부에 유출되기 시작했다. 지진 발생 16시간만의 노심용융(meltdown)으로 후쿠시마는 1986년의 체르노빌처럼 유령도시가 되었다.

▲ 2011년 원전 폭발과 쓰나미, 대지진이라는 참사를 맞이한 일본 후쿠시마 인근 지역이 폐허가 되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후쿠시마 핵발전소 붕괴 직후 최고의 안전성(?)을 자랑하던 일본 원전의 신화는 원자로와 함께 녹아내렸다. 붕괴된 것은 원자로와 안전 신화뿐만이 아니었다. 후쿠시마 원자로 3호기 냉각장치가 손상된 직후 격납용기 내부의 방사능 검출량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지점 400미터 반경 피폭량을 초과하는 수준이었지만 후쿠시마 원전을 책임지고 있던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방사능이 유출된 지 3주가 지나서야 "원전 방사선량에 1시간 정도 노출되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지점 400미터 반경과 비슷한 규모의 피폭에 해당"한다고 시인했다.

또 일본 정부는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 1억3000만 배에 이르는 물을 원전에서 바다로 흘려보내면서도 이런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후쿠시마 근해에서 허용치의 수천 배가 넘는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되고, 원전 남쪽 90킬로미터 떨어진 이바라키 현 앞바다에서 잡힌 까나리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요오드와 세슘이 검출되었지만 이 사실을 알린 건 정부가 아니라 해외 언론들이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측은 사태의 심각성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해 지역 주민들을 방치해 두었고, 심지어 피난민들에게 물자가 부족한 상황조차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일본 정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라는 북한조차 방송 매체를 이용해 주민들에게 방사능 대처 요령을 적극 홍보하고 있었는데도 우리 정부는 편서풍 때문에 한반도는 방사능에 대해 안전하다며 국민들을 향해 앵무새처럼 '극미량', '기준치 이하'란 말만 반복했다. 일본의 원전 사고가 한국에서 탈핵 운동의 시발점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치적으로 2009년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을 손꼽았던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해외 원전 시장에서 우리의 경쟁자였던 일본이 망했다. 이제 누가 일본 원전을 사겠나? 이 기회에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팔자'며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원자력 르네상스가 열렸다고 큰 소리쳤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년여가 되어 가는 현재 한국에서는 노후화된 원전들이 잇따라 사고를 내고 불량 부품을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이런 사실들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도리어 그 와중에 핵발전소가 2기 더 늘어나 이제 23기의 핵발전소를 보유하게 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직후 미국에게 핵 재처리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조차 향후 50년이면 핵발전소가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원자력 르네상스'를 외치고 있다.

일본은 어떠한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핵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으며 장차 핵무장까지 노리는 극우 보수주의 정치 세력이 득세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피해 주민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지만 이제 후쿠시마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우경화의 바람만 거세게 불고 있다. 사고 직후 멈춰 섰던 핵발전소는 전력위기를 핑계 삼아 다시 2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고, 나머지 핵발전소 또한 재가동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후쿠시마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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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한홍구·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이령경 책임 번역, 반비 펴냄). ⓒ반비
<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이령경 책임 번역, 반비 펴냄)는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양심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한홍구(성공회대학교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학 대학원 교수),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 서 있는 서경식(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이 만나 지난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장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이 후쿠시마 사태를 단순히 에너지 정책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문제로 바라보고 그 뿌리에 놓여있는 '희생의 시스템'까지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후쿠시마 사태를 다룬 기존의 저서들과 변별력을 지닌다.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받아든 순간, 직감적으로 떠오른 인물은 파울 첼란(Paul Celan)이었다. 아도르노(T.W.Adorno)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지만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살아남은 파울 첼란은 계속해서 시를 썼다. 파울 첼란은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시를 썼다. 그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파울 첼란의 대표작인 '죽음의 푸가'의 원제는 '죽음의 탱고'였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일시적으로 사형 집행을 유예 받은 악사들은 사람들이 총살당하거나 가스실로 향하는 동안 경쾌한 탱고를 연주해야만 했다. 파울 첼란은 '죽음의 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중에서


영국의 생명윤리학자인 조나단 글로버(Jonathan Glover)의 <휴머니티 :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김선욱·이양수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 따르면 나치 독일의 선전상이었던 괴벨스는 "웃음이 의미하는 건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훌륭한 양심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때 신성시했던 것들, 가령 전통, 양육, 우정, 인간의 사랑 같은 것들을 웃음으로 부수고 파괴하는 충분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치의 사형 집행자들은 괴벨스의 주장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물질 혹은 짐승으로 간주하였고, 양심의 가책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서늘한 농담과 신성모독의 언어' -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와 함께 악명 높았던 유대인수용소 트레블링카(Treblinka)에서는 가스실에 이르는 길을 '천국에 이르는 길(Himmelweg)'이라고 불렀다 - 를 사용했다. 나치는 죽은 시신조차 존중하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시신에서 얻은 기름은 비누가 되었고, 여성 희생자의 머리카락은 매트리스 충전재로 팔렸다. 화장터에 남겨진 재들은 보온 단열재나 인근 마을의 도로 포장을 위한 자갈 대신 사용되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학살, 인종말살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홀로코스트 이후 모든 인류가 직면한 물음이었다.

이토록 참혹한 학살을 경험한 인류는 1948년 12월 9일 국제연합에서 제노사이드 협약을 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와 수많은 학살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에게 이런 비극이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선 안 된다는 굳은 결심, '더 이상은 안 된다(Never Again)'는 선언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파울 첼란은 시를 썼던 것처럼, 제노사이드 협약이 논의되던 시기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4·3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한홍구,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는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통해 히로시마에서 후쿠시마, 오키나와에서 제주에 이르는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더듬으며 비탄의 희생자들을 켜켜이 쌓아올린 가해자들이 어떻게 희생자들을 비인간화였는지, 현재 한국과 일본이 누리는 풍요가 무엇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의 삶>은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히로시마를 겪은 일본에서 왜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앙이었던 일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 발전 시설이 밀집해 있는 동아시아는 물론 여전히 핵을 포기하지 못한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히로시마를 겪은 일본에서 왜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나?

한국수력원자력, 세계원자력협회, 한국원자력산업회의의 2011년 3월 보고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는 모두 21기의 핵발전소가 운영 중에 있고, 7기가 건설 중, 4기가 앞으로 건설될 계획이다. 일본은 모두 54기가 운영 중에 있으며 3기가 건설 중, 12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었다. 중국은 현재 13기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재 건설 중인 핵발전소가 27기이고 앞으로 188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 (2013년 3월 현재 한국은 23기, 일본은 50기, 중국은 18기의 핵발전소를 가동 중이다. -편집자)

한·중·일 3개국이 운영 중인 핵발전소는 전 세계 20퍼센트이지만, 현재 건설 중인 핵발전소까지 포함하면 전 세계 핵발전소의 52퍼센트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는 셈이다. 세계 각국은 체르노빌 사태 이후 핵발전소 건설을 중지하거나 자제하는 추세에 있지만 한국·일본·중국은 '죽어가는 핵 산업'을 살리는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어째서 이토록 많은 핵발전소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는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강력한 핵 발전 국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지식인이 이 좌담에 포함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일본 후쿠시마가 아니라 황해 연안에 집중 건설되고 있는 중국의 핵발전소에서 마찬가지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한반도는 불과 3일 만에 편서풍을 타고 불어온 낙진과 방사능의 대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한 피폭 국가임을 강조해 왔잖아요. 그 때문에 평화 헌법을 갖고 있고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핵무기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를 지금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는 나라로서 강력한 반핵 정서가 있을 것 같은데, 거꾸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보유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죠. (한홍구, 36~37쪽)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6일), 나가사키(9일)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피폭 직후의 조사에 따르면, 히로시마에서는 인구 33만 명 중 7만 8000명이 사망하고 부상 3만 7000명, 행방불명 1만 4000명, 기타 피해자 17만 7000명, 건물 7만 호가 반 이상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고, 나가사키에서는 인구 27만 명 중 사망 2만 4000명, 부상 4만 1000명, 행방불명 2000명, 기타 피해자 17만 7000명이 나왔으며 도시 전체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중에는 한국인 수만 명을 비롯하여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권혁태(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피폭 내셔널리즘'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이자 원폭 피해국이었던 일본은 가해와 침략의 기억은 생략한 채 자국이 유일한 원폭 피폭국이라는 단일한 인식을 기반으로 전쟁에 대한 기억을 국가주의로 수렴해왔다. 그러나 당시 피폭자들 가운데에는 무려 7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 4만 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피폭자와 그 2세, 3세들은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로 아무런 국가적 보상이나 대책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유일한 피폭국' 신화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야스쿠니 문제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해왔다. 그는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전사자가 신적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슬픔보다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침략성이나 가해성을 묵살하게 되는 것을 '감정의 연금술'이라고 호칭했다. '감정의 연금술'은 야스쿠니와 천황제에 이르러 일본이 스스로를 '평화국가'라고 규정하는 문제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

전후에 일본 국민들은 스스로 일본이 평화 국가라고 계속해서 믿어왔습니다. 일본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인데, 여기에는 일본 국민들의 감정에 일종의 '연금술'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합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으면서 일본은 핵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만 유지됩니다. (서경식, 41쪽)

1953년 8월,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국제연합 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란 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의 냉전 체제에 속한 각국에 본격적인 핵 발전 세일즈를 시작한다. 핵의 군사적 이용과 평화이용을 둘러싼 핵 경쟁 체제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소련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그때까지 원자력 정보에 대한 철저한 비밀주의를 벗어던지고 전면적인 정보 공개에 나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숨겨진 내막이었다. 핵발전소는 이처럼 핵 경쟁이라는 동서냉전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핵폭탄의 일란성 쌍둥이였다.

원전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극구 부인하지만, 사실 원전은 원자폭탄의 다른 얼굴일 수 있어요. 이 둘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핵 발전과 핵폭탄 모두 핵분열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핵 발전은 핵분열의 속도를 늦췄을 뿐이지요. 둘은 같은 기술, 같은 원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 핵발전소에서 사용한 핵연료는 핵무기의 원료로 사용되지요. 그래서 원자폭탄을 갖고 싶은 열망이 원전을 자꾸 짓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전 세계에 포진해 있는 원자력 마피아들이 원전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한홍구, 42쪽)

일본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 편승하며 핵 발전을 도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때마침 1954년 3월 1일 미국이 태평양의 작은 섬 비키니에서 실시한 수소폭탄 실험 당시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참치잡이 어선 '제5후쿠류마루'가 피폭되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사회는 이 사건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세 번째 피폭 사건으로 받아들여 반핵 여론이 들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일본의 수상이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를 비롯한 일본 내 보수 세력은 바로 다음날인 3월 2일 핵발전소 건설을 위한 예산을 승인한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이것이 단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핵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는 모든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버리고, 무시하는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는 이러한 것들을 포괄해서 원전 시스템을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타인의 생활이나 생명, 존엄 등을 희생한 위에서만 이익을 내고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그 이익을 취하고 유지하는 자들은 결국 국가권력이나 자본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내버리고, 국민 이외의 존재를 무시하는 문제점은 각 나라의 원전 추진 세력들이 공유하는 특성입니다. 나아가 원전뿐만 아니라 핵무기 문제를 포함해 핵을 둘러싼 정치, 경제, 군사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닌가 합니다. (다카하시 데쓰야, 77쪽)

▲ 2011년 4월 8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방사성 물질 오염수 방류 사건 규탄 기자회견. ⓒ프레시안(최형락)

홀로코스트와 원전을 작동시키는 힘, 희생의 시스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하이데거는 나치즘에 굴복했다는 치명적인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록 하이데거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치즘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평소 생각한 독일 민족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치즘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나치에 동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마르틴 하이데거는 과거사에 대해 어떠한 참회도, 변명도 하지 않았고, 그의 '완강한 침묵'은 더욱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파울 첼란과 하이데거는 서로의 저작을 읽었다. 첼란은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한 편 그와 나치즘의 관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1967년 첼란은 하이데거가 있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시 낭독을 했고, 그 자리에 하이데거도 참석했다. 낭독이 끝난 자리에서 하이데거는 첼란에게 자신의 책 한 권을 주었고, 다음날 그를 자신의 토트나우베르크 산장 연구실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함께 술을 마셨지만 파울 첼란은 나치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침묵을 잊지 못했다. 그는 방명록에 "오두막 산장에서 함께 별을 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기대하며. 1967년 7월 25일 파울 첼란"이라고 서명했다. 그리고 파울 첼란은 1970년 4월 20일 자살했다. 어쩌면 파울 첼란에게서 생의 마지막 불씨를 앗아간 것은 그날 하이데거의 '완강한 침묵'이 아니었을까.

한홍구는 후쿠시마와 용산 참사를 연결시키며 두 사건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논리와 시스템에서 나온 사건이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완강한 '자본의 논리'와 '희생의 시스템'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저항을 포기한다면, 위기의 순간마다 국민을 속이고, 버렸던 국가에 또다시 포섭되는 결과만을 빚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서경식은 가해자로서 양심을 저버린 일본은 자신들이 가했던 침략으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며 전후 복구와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국민들이 안락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이 '안락 전체주의'가 되어 오늘날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일본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핵 발전은 '윤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핵 발전을 포기했다며 "근대 기술과 근대 문명이 진화해온 끝에 핵무기나 핵발전소 문제가 등장했지만 '인간의 목숨과 삶 자체를 곤란하게 만드는 기술이나 문명은 이미 반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지난 2012년 서울 시청 앞에서는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제목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 1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는 1만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해 우리 아이들에게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탈핵의 길을 가자고 외쳤다. 이 자리에는 일본 후쿠시마에서 피난한 어린이 아베 유리카도 있었다. 유리카는 그 자리에 모인 어른들에게 물었다.

저는 원전사고 때문에 방사능을 뒤집어썼습니다.
저는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는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제가 결혼할 수 있을까요?
제가 건강한 아가를 낳을 수 있을까요?
(☞전문 바로 보기 :
아베 유리카,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어린이의 물음 앞에서 국가주의와 개발 논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소비주의에 중독된 나머지 우리가 '완강한 침묵'을 고수한다면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나가사키, 제주와 오키나와, 후쿠시마의 또 다른 공범이 되는 것은 아닐까? <후쿠시마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비록 패배가 이어지는 역사 속에 살고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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