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만취상태서 반란군 지휘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17> 청진동 술집에서 궁정동 안가까지

5.16 군사반란은 박정희가 술을 상당량 마시고 지휘한 '취중 쿠데타'였다. 거사 시점으로 잡은 5월16일 0시가 되기 2시간 전 준비상황에 차질이 생기자 그는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를 서너 대접이나 마셨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거의 만취상태였으며 당시 전화 통화한 장도영이 그의 발음에서 취기를 느낄 정도였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박 장군, 지금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고 내일 얘기하자"고 말했다. 쿠데타라고 해도 주모자가 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거사에 나선 것이 아니라 초조감과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는 행태였다. 그것은 '구국의 결단'이나 '역사적 혁명'을 감행하고자 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될 수 없었다. 이른바'구국의 혁명'이라는 주장과는 턱 없이 거리가 멀었다.

1961년 5월 말 예편 예정 알고 술타령 깊어져

1961년 1월부터 육군본부는 군 장성 인사작업에 착수한다. 장성급에 대한 인사자력표를 놓고 평가작업이 벌어졌다. 인사자력표 중에서도 군 정보수사기관이 제공하는 보안심사자료가 가장 중요했다. 과거 사상이 의심스러운 전력이 있거나 근무 평가가 나쁜 장성 수십 명이 예편 대상자로 정해졌으며 여기에 박정희도 포함됐다. 이들은 그해 5월 말 예편하게 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박정희는 화풀이로 술을 더 자주 마시면서 군사반란 의지를 다졌다.

오랫동안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그것이 뜻대로 잘 될 리 없었다. 자연 불만이 쌓여가니 음주량도 늘어만 갔다. 불평분자의 알콜 중독 같은 것이었다.

그가 처음 쿠데타를 생각한 것은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 때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연임을 위해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 측이 저항하면서 정치적 혼란상이 벌어진다. 6.25 전쟁 통에 피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니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는 참으로 국민의 고난과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이승만은 야당 인사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계엄령과 함께 군대 동원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의 정치개입을 확고하게 반대하면서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 일로 이종찬은 옷을 벗어야 했다. 그는 군내에 신망이 높았고 일본군 계열이 아니라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이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대령 신분인 박정희가 이종찬을 찾아간다.

"각하, 군이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됩니다. 군사혁명으로 나라를 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한 반감으로 정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박정희의 첫 정치군인 행보였다. 그러나 당시 이종찬은 5.16 직전의 장도영과 달리 태도가 분명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군이 정치에 개입하면 일본 군국주의처럼 나라를 망치는 거 몰라 그래? 대통령의 군 동원 명령에도 내 직을 걸고 반대한 건 그래서야."

이종찬은 박정희의 쿠데타 주장이 그저 독재자의 전횡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줄만 알았다. 박정희의 마음 속 깊이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에 대한 망상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박정희가 그런 흉계를 남몰래 키우고 있는 암적 정치군인이라는 사실을 이종찬이 간파했더라면 그냥 물리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의 입에서는 군사혁명 얘기가 수시로 흘러나왔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동기생인 이한림이나 장도영이 육참총장이 되기 전 자신의 직속상관으로 2군사령관일 때부터 군사혁명을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모두가 핀잔을 놓으면서 그냥 흘려 넘기곤 했다. 가까운 장성들 사이에서 소외되자 박정희는 술과 벗을 삼으며 이런 저런 궁리에 빠졌다.

반란군 차질 빚자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 세 사발 들이켜
"탄로났는데 가 본들 어떡하겠소, 한잔 하며 생각해 보자"


운명의 날로 잡은 5월16일 0시를 기다리던 15일 밤에도 박정희는 반란군의 행동계획이 초기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초조해 하면서 술을 마셨다.

15일 밤 9시반 경, 서울 신당동 박정희의 자택.
그는 운명의 거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채비하기 시작했다.

"임자, 거기 내 가방에 권총 좀 꺼내 줘"
부인 육영수도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육영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권총 벨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남편에게 건네준다. 육영수는 한 마디 했다.

"여보, 애들은 지금 학교 숙제를 하고 있어요."
"그래 …?"

박정희는 집을 나가면 그 후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 방으로 갔다. 국민학생인 근혜와 근영이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하고 아직 유치원생인 지만은 누워서 잠 잘 준비다. 그는 말없이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막 나가려는 데 전화벨이 울린다. 거사 본부로 정해 놓은 6관구사령부 참모장인 김재춘 대령이었다. 밤 10시까지 6관구에 가기로 돼 있었다.

"그래, 김 대령, 내 지금 6관구로 갈 참인데 …"
"각하, 30사단에서 우리와 함께 일을 도모해 온 부사단장과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했습니다. 일이 탄로나서 큰일입니다. 33사단도 장도영 총장의 단속으로 병력 출동이 어려울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여기 6관구사령부엔 지금 장도영 총장이 보낸 헌병대가 와 있습니다."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는 더 미룰 수도 없고 계획이 누설됐다면 진압군 보다 먼저 방첩대와 헌병대가 반란군 주모자를 체포하러 나설 것이다. 그가 집을 나서려는데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 장경순 준장(후에 공화당 의원, 국회 부의장 지냄)과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3관구사령관 지냄)이 들어선다. 장경순은 4.19혁명 직후 박정희가 작전참모부장일 때 차장이었고 한웅진은 육사2기 동기생이다. 두 사람도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급히 박정희의 집으로 온 것이다.

"지금 신변이 위험하니 우선 피신해야 하겠습니다. 집에서 빨리 나가시지요."

박정희의 집 앞에는 이미 방첩대 지프차가 와 감시하고 있었다. 장도영의 명령만 떨어지면 체포할 태세다. 박정희는 한웅진과 같은 차를 타고 장경순이 다른 차로 방첩대 차를 교란하기로 했다. 한웅진은 박정희를 자신이 유숙하고 있는 청진동의 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박정희는 애가 탔고 또 장도영에 대한 원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방첩대 차를 따돌리고 뒤늦게 나타난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반란군 지휘본부인 6관구사령부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미 탄로가 났는데 내가 가본들 어떡하겠소?"
"그래도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각하가 오시기를 기다릴 텐데요."

박정희는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두 가지 차질을 그대로 놔두고 밀어붙여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다른 핵심부대들은 예정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거사의 제1선봉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도 육본이 지시한 훈련에 참가 중인데 제대로 출동할 수 있을 것인지 …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고 가슴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대포나 한 잔 하면서 생각해 봅시다."

박정희가 앞서고 장경순과 한웅진이 뒤 따라서 세 장성은 청진동 골목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막걸리 술상이 나오자 박정희는 다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들이켰다. 술이 아니라 마치 냉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여기서 술에 만취한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을 지휘하는 모습은 여러 대표적 다큐멘터리작가들이 묘사해 놓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 온 군사권위주의 정권이 1990년대 초 종말에 다다르자 어두웠던 시절 제대로 쓰지 못했던 비화들이 봇물 터지듯 신문 방송과 출판가를 휩쓸었다. 독재정권의 힘이 빠질 조짐을 보이니 온갖 증언과 기록문헌들에 바탕한 정치다큐멘터리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다음은 김교식이 쓴 『제3공화국』(하서출판사 1993년2월 출간) 제2권의 기록이다. 김교식은 동양방송(TBC)의 장기 다큐멘터리 드라머'광복20년'을 집필해서 명성을 얻은 대표적 사극 작가다.

1961년 5월16일 0시.
그 0시를 박정희는 청진동의 어느 술집에서 맞고 있었다.
"각하,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정보로 봐서 이 여관도 결코 안전한 곳은 못 됩니다. 일단 여기를 나기시죠."
한웅진의 이같은 권유에 따라 박정희는 청진동 미화여관을 떠나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희는 초조한 듯 꽤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 …
자정의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리도 거의 끊어진 듯했다. 박정희는 어지간히 마신 술에 취해 있었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작가는 그날 박정희의 만취상태에 대해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다음은 이영신의 대하정치실록 『격동 30년』(고려원 출판사 1992년5월 출간) 1권의 내용이다. 이 책은 이영신이 MBC의 정치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위촉받아 집필했다.

여관에서 나온 세 사람은 청진동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술상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마치 기갈들린 사람 모양으로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대폿잔을 비웠다.
… …
밤 11시30분, 청진동 대폿집.
박정희는 취했다. 취하자 그의 사고력이 한골수로만 파고 들었다. "쿠데타를 꿈 꾸어 오기 10년, 이제 거사하려는 마당에 탄로났다고 해서 내가 여기 앉아서 대폿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내 박정희는 결심을 했다. 취기 덕분이었다.
… …
박정희를 에워쌌던 장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부사령관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박정희의 거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입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역겨워할 정도로 심하게 술냄새가 풍겨지고 있었다.
… …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 후 그래도 나라가 바로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박정희가 입을 열 때마다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박정희는 거사 예정시각인 0시가 지나면서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꿈 꾸어오기 10년여,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제 더 이상 기회도 없다. 5월 말이면 옷을 벗어야 한다. 실패하고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해봐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장성도 그를 따라 나섰다.

술에 취해 진압군 장교들 대기실로 잘못 들어가 위기일발
장도영 통화 "박 장군, 술 취했으니 내일 만나 얘기하자"

박정희 일행은 0시를 넘겨 6관구사령부에 도착했다. 반란군 핵심들은 김재춘 참모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육군본부와 사령관인 서종철(육사1기, 나중에 육참총장과 국방장관 지냄)의 명령을 기다리며 반란군의 동태를 지켜보던 사령부 참모들은 부사령관실에 모여 있었다. 술에 취한 박정희는 적진에 해당하는 그 부사령관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반란군 동지들은 안 보이고 낯선 중령 소령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무언가 방을 잘 못 들어왔구나 느껴졌지만 내친김에 그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으로 정치인들이 각성하고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소. 그러나 나라꼴은 보다시피 이게 되겠습니까. …
우리 군이 궐기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좌시하지 말고 군이 나서서 제대로 혁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뒤따라 들어 온 김재춘, 오치성 대령 등 쿠데타 핵심들은 박정희의 양 옆에 서서 분위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박정희의 입에서는 옆 사람이 역겨울 정도로 심하게 술 냄새가 풍기는 것 아닌가.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반란군 핵심참모들은 재빨리 박정희를 에워싸고 나가 지휘부가 차려진 김재춘 참모장 실로 데려갔다. 이곳 사령부 지휘부에 육본의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체포당하고 말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한편 장도영은 육군참모차장 장창국, 정보참모부장 김용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육군 방첩대장 이철희와 서울지구 506방첩대장 이희영에게서 쿠데타군 출동 움직임을 보고받는다. 급히 506방첩대로 간 장도영은 박정희의 위치부터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의 반란군 지휘부에 있는 박정희와 전화를 연결하게 했다.

"아니 박 장군,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요?"
"각하, 오늘의 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혁명군은 출동했고 서울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전화 목소리에서 진한 술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렇게 술을 마신 상태에서 무슨 혁명을 한단 말인가. 장도영은 박정희를 달랬다.

"박 장군, 오늘은 술도 취한 것 같고 계획이 이미 알려져서 부대 출동을 내가 막았소. 그만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나하고 만나 얘기합시다."
"각하, 여러 부대에서 병력이 움직였습니다. 일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글쎄,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박정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장도영은 빈 전화기에 대고 "이번엔 정부쪽에 경고 정도만 하고 그만 둡시다."하면서 헛수고를 계속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5월16일 이렇게 청진동 술집에서 시작해 79년 10월26일 궁정동 비밀술집에서 막을 내린 셈이다. 10.26 박정희 살해사건도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궁정동 안가의 비밀연회장에서 벌어졌다. 박정희와 그의 최측근 권력자들이 함께 위스키를 마시는 자리였다.

상습음주 독재자 과민한 의심과 변덕으로 측근 고문 다반사
작은 불쾌감과 괘씸죄도 감정과민으로 가혹한 탄압사태 불러

물론 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될까. 그 개인적인 성정이 모진 사람일 경우 다른 여러 사람을 해칠 위험성은 크기 마련이다. 독재권력을 쥔 사람이 상습 음주자라면 어떻게 될까. 독재권력이란 총칼보다도 더욱 넓고 깊게 국민을 해친다. 특히 '술 취한'독재자는 심리상태가 불안정하고 기복이 심하며 측근까지도 신경과민일 정도로 의심하면서 변덕을 부린다. 박정희의 이른바 용인술이란 측근 부하들에 대한 의심과 변덕이었다.
▲박정희는 상습 음주벽을 가진 독재권력자로 과민한 의심과 변덕 때문에 측근들까지도 고문당하는 체제폭력의 통치를 폈다. 박정희 권력의 종말을 고한 1979년 10.26사건도 연예계 여자들이 동석한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사진)에서 벌어졌으며, 1961년 5.16 군사반란을 지휘할 때도 그는 만취상태였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실세노릇을 하던 권력자 중 상당수가 그의 과민한 의심과 변덕에 희생을 당했다. 조그만 실언과 한 치의 불복종도 괘씸죄에 걸려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

1971년 10.2 항명파동으로 공화당의 핵심인물들인 김성곤 길재호 의원 등이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내무장관 오치성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일사불란하게 부결시키라는 박정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1973년 3월 박정희의 군내 최측근이던 윤필용 수경사령관은 하루아침에 부정축재와 권력남용으로 몰려 구속되고 만다. 그도 여권 인사 몇몇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각하의 후계자를 골라야한다"고 말한 것이 괘씸죄가 됐다.

윤필용 사건이 실세들을 놀라게 하던 그 해 여름 박정희 정권 아래서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슬쩍 미국으로 도피한다. 언제 박정희나 다른 권력경쟁자들에 의해 희생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유신독재의 문제점들을 진술하기도 했으나 79년 파리에 여행 중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해 희생당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박정희의 속마음을 가장 잘 읽을 줄 아는 복심으로 불리며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조차 퇴임 후 해외 도피를 위해 비밀리에 출국한다. 박정희가 측근 실세들을 차례로 처치하는 것을 보고 그 변덕이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향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보부의 보고에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사람을 보내 "내가 설마 임자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달랬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신변보장을 받고서야 귀국해 경기도 이천에서 대외접촉을 일절 차단한 채 야인으로 지냈다.

박정희의 변덕과 측근 징벌은 부메랑과도 같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권총 사살로 돌아갔다. 그것은 박정희의 용인술이 실패한 결정판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 때의 권력자들도 어느날 갑자기 몰락하는 박정희 1인 독재 아래서 그의 정치적 반대자와 비판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감시, 미행, 고문, 테러, 암살, 강제해직, 그리고 일상생활의 통제와 검열 … 전체주의 독재정권의 체제폭력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자행됐다. 체제폭력의 대명사는 1970년대 중후반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 정권이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의 가혹한 체제폭력은 세계언론에 의해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시사용어 사전에 등재됐다. 그러나 그 더러운 전쟁은 비델라보다도 박정희가 훨씬 앞선 선배로 60년대부터 시작됐다.

작은 불쾌감과 괘씸죄가 엄청난 징벌로 이어지는 것이 1인 독재 체제의 특징이다. 더구나 박정희의 이른바 '진노'는 상습 음주벽 때문에 더욱 과민한 감정표출이었으며 그로인해 비인간적 고문 같은 체제폭력이 수시로 자행됐다. 얼마나 많은 대학생, 종교인, 언론인, 야당인사들이 그렇게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시달리고 희생돼야 했던가. 그 회한의 역사를 제대로 파헤치고 국민들에게 알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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