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경제의 종말, 소농을 위한 농민기본소득을 제안한다
2020.01.25 03:56:08
[기고] 기후위기, EROEI, 농민기본소득
기후위기와 석유, 산업경제의 종말

우리 시대가 이렇게 암울하게 된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나는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와 지하광물에 의존하고 있는 산업경제와 그에 기반을 둔 문명이 끊임없이 확장되어가려고 하는 데에 그 핵심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화석연료와 광물자원이 무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와 석탄 등 화석연료를 매일같이 대량으로 소모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지탱하지 못하는 경제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러한 경제시스템을 그만둘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연장하고 확대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하고 있다. 애초에 말도 안되게 불합리한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진보니 발전이니 번영이니 하는 말로 떠받들어오다가 마침내 지금과 같은 파국 직전에 내몰렸음에도, 여전히 미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평소에 잘 들여다보지 않는, 그러나 실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국은 오늘날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나라이다. 국민총생산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80%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산업 선진국, 즉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에서는 독일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독일의 경우는 한국과는 달리 식량을 거의 100% 자급하는 나라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일의 일반시민들 사이에서는 농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상식이 되어 있고, 그러한 상식에 의거하여 국가의 정책도 농촌과 농민을 살리는 데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도 우리는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반면에 한국은 식량자급이 형편없는 수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나 일반시민들, 그리고 지식인들도 이상하리만큼 농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왜 그럴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런 풍조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우리나라에서 농사는 조만간 소멸해버릴 것은 불문가지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겨우 20%대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고, 칼로리 기준으로도 자급도가 40% 정도밖에 안된다. 이는 실로 엄중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식량자급 상황을 두고 엄중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까닭이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무역에 의존해 있고, 당장은 이 무역에 의한 이익 덕분에 해외에서 식량을 들여와서 먹는 구조가 그런대로 유지되고는 있지만, 만약에 이 무역시스템에 고장이 생기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관세청에서 발표하는 국가지표체계라는 게 있다. 2018년도 상황을 보여주는 이 국가지표체계의 수출입 품목 통계를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이 해외로 수출한 물품과 해외에서 들여온 물품 중에서 1위에서 10위까지의 목록이 그 금액과 함께 열거되어 있다. 그 내역을 보면 수출 상품들은 주로 반도체를 비롯하여 자동차, 전자제품, 컴퓨터, 정보통신기기와 그 부품 등등으로 돼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뜻밖에도 수출품 제2위가 석유제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이 산유국도 아닌데, 주력 수출품이 석유제품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중동 및 기타 지역의 산유국에서 원유를 사 들여와서 국내 정유공장에서 휘발유, 경유, 등유 등의 정제된 석유로 만들어서 그것들을 해외로 수출한다는 뜻인 것이다. 그게 2018년에는 수출품 중에서 제2위를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2017년까지는 매년 계속해서 제1위 수출품이었다. 순전히 원유를 이용하여 주요 수출품들이 생산되고, 그것으로 한국 경제가 돌아간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수출품 내역이 그렇다면, 수입품 제1위는 당연히 원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원유 수입 금액이 여타 수입품들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금 한국 경제의 석유 의존도는 심각한 수준에 있다. 수출품 목록 1위에서 10위까지가 전부 석유를 원료로 쓰는 것이거나 석유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직간접적으로 석유와 관련된 제품들인 것이다. 

국가지표체계라는 공식 문건에 나타난 이러한 통계를 보면서 전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에 세계의 석유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될까? 필시 그날로 완전히 망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중대한 문제가 왜 이 나라에서는 언론, 경제전문가, 그리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가 안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정말 걱정 안해도 괜찮은 문제인가?

따져보면, 석유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참으로 골치 아픈 ‘마법의 물질’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존·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산업경제는 석유의 대량소비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게 되어 있다. 동시에 그 석유의 대량소비 때문에 지금 인류사회는 기후위기라는 미증유의 가공할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다. 기후 과학자들에 의하면, 2030년까지, 즉 앞으로 10년 동안, 인류사회가 현재의 화석연료 소비량의 절반을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이 산업혁명 직전의 평균기온보다 1.5도 이상으로 치솟는 추세를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필시 인간의 문명적 생활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즉, 예의를 지키고, 서로를 배려하고, 마음속에 거룩한 것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문명적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런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자연적·사회적 조건이 기후파국에 의해 소멸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 기후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대체로 망각한 채 살아왔다. 기후가 안정돼 있어야 생태계도 안정되고, 토양도 건강하고, 만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법인데도, 그 기후를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여겨온 것이다. 그러면서 화석연료 기반의 경제적 번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다가, 이제 복수를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 어떤 사람들은 ‘인류세’라는 용어를 가지고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용어는 바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원흉, 즉 ‘근대적’ 인간의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과 ‘교만심’을 드러내는 또하나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 중에는 인간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려면, 2030년까지 화석연료 소비를 절반으로 줄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즉, 지금 이 순간부터 석유, 석탄을 전면 금지하고, 그대로 땅속에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유엔이나 기타 공적인 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격으로 발언을 할 때,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러한 독립적인 견해가 어쩌면 사태에 대한 더 정확한 진단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발언을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즉, 결국 석유는 앞으로 더 쓸 수도 없고, 더 써서도 안된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확인된 석유 매장량은 현 시가로 약 20조 달러어치라고 알려져 있다. 실로 천문학적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석유회사들이나 석유 관련 기업들이 이처럼 막대한 돈이 될 자원에 대한 개발을 중단할 수 있을까? 물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석유개발은 단순히 석유 관련 기업들의 이해관계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시스템 전체가 걸려 있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현실적인 해답을 찾는 게 너무도 지난한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석유는 더 써서는 안되지만, 쓸 수 없게 되면 현재의 세계경제가 전면적으로 붕괴한다, 라는 이 근본적인 딜레마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지금 인류사회가 직면한 난제는 바로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EROEI 하강곡선이 의미하는 것

에너지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 ‘EROEI’라는 게 있다. 이것은 ‘Energy Return on Energy Invested’라는 말을 줄인 용어이다. 우리가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려면 그냥 “에너지야 솟아 나와라” 하고 주문을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기왕에 우리 수중에 있는 에너지를 일정한 정도 투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석유를 얻으려면 먼저 유전을 탐사하고, 확인된 유전에 채굴시설을 설치하고, 각종 장비를 옮겨 가서 실제로 채굴을 해야 하고, 채굴한 석유를 운반해서 정유를 해야 하고, 그것을 또 소비자들에게 운반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단계와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석유 혹은 기타 에너지이다. 이렇게 투입된 에너지에 대해 새로이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수확(생산)할 수 있느냐, 그 비율을 가리키는 게 바로 EROEI(에너지 수지 비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에너지의 경제성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경제성이라는 것은 그때그때의 에너지 시장에서의 가격의 부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경제가 호황이면 에너지 가격은 올라가고, 경제가 침체되면 에너지 가격이 내려간다. 그러나 EROEI는 그런 의미의 가격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호황이나 불황과 관계없이 에너지의 ‘투입 대(對) 산출’에 있어서 물리적인 비율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그러니까 이 지수에 따르면, 에너지의 ‘투입 대 산출’ 비율이 너무 낮을 때는, 그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리하여 해당 에너지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구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석유의 경우를 보자. 전문가들에 의하면, 석유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 즉 20세기 초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는 EROEI가 1:100이었다. 다시 말해서, 1의 석유를 투입하면 그보다 100배의 석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이 비율은 점차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많은 국가들이 산업화를 시작하고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석유가 빠른 속도로 소비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유전에서는 갈수록 석유 채굴 조건이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가 되면 EROEI는 1:30 정도로 축소된다. 분석가들에 따라 이 수치는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 정도 비율로 줄어든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부 전문가들은, 석유의 경우 EROEI가 1:30이 되는 상태를 분기점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석유가 현대 경제의 핵심 요소라는 점을 고려할 때, 왜 세계경제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논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는지, 우리는 이 석유의 EROEI 하강 현상에 근거하여 추리해볼 수 있다. 즉, 그 이전까지 꽤 잘나가던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이 1980년대를 기점으로 둔화하기 시작한 것은 결국 석유의 EROEI 하강 현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이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책략으로 도입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논리였다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석유의 EROEI는 그 이후에도 계속 하강곡선을 그리다가, 2010년대가 되면 놀랄 만큼 낮은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일부 분석가에 의하면 최근에는 1:5 정도까지 내려가 있다. 이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요컨대 석유시대는 끝나간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그런데 EROEI가 1:5 이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경에 급격히 석유가격이 상승한 이래 지금까지 배럴당 50~60달러 수준을 유지하면서, 석유문명이 적어도 겉으로는 별다른 파탄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201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에서 본격화된 셰일오일·가스 채굴과 캐나다 등지의 타르샌드(오일샌드) 석유의 대량생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 셰일오일·가스나 타르샌드 석유는 품질이 나쁜 저질 석유이기 때문에, 에너지원 이외에 다양한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재래식 석유에 비해 그 용도가 매우 제한적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상당한 양이 생산되고 있어서 지금 세계의 석유공급 상황은 눈에 뜨이는 타격은 입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셰일오일이나 타르샌드 석유는 채굴방식이 극단적일 만큼 환경파괴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경우에도 EROEI의 지속적인 하강 때문에, 조만간 그 부존(賦存)량에 관계없이 생산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것은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재래식이든 비재래식이든, 석유는 퇴각할 날이 임박했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의 산업경제 시스템도 조만간 종말을 고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석유의 수명이 그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면, 기후변화라는 위기는 간단히 회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얼핏 생각해볼 수 있다. 유엔의 과학자들이 지금부터 2030년까지 화석연료 소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2050년까지는 제로로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태울 석유가 없어지면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석연료에는 석유만 있는 게 아니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석탄도 있다. 게다가 석탄은 부존량이나 EROEI를 고려하면, 석유보다 훨씬 더 긴 수명을 누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므로 석유의 수명이 다했으니 기후문제는 걱정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대기 중에 흡입된 이산화탄소의 양 때문에 비록 지금부터 배출량이 제로가 된다고 할지라도 기후변화는 계속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용 가능한 석유의 양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세계경제와 무역구조, 산업시스템이 이대로 간다면, 얼마 안 남은 기간일지라도 석유 소비량은 더욱더 증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실제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산업시대 전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누적돼온 게 아니라, 최근 수십 년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일찍이 화석연료에 의해 엄청난 기후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측하고, 경종을 울리기 위해 제임스 핸슨이라는 과학자가 미국 의회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이 1988년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30여 년간 오히려 화석연료 소비는 전례 없이 대폭 증가했다는 것이 과학계의 설명이다.

화석연료 시대는 어차피 끝나야

그러니까 어떤 각도로 보든지, 화석연료, 특히 현대문명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석유의 대량소비는 시급히 종료되지 않으면 안된다. 기후변화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동시에 EROEI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석유에 깊이 중독돼 있는 우리들의 생활방식은 급진적인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것은 농사의 중요성이다. 최근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세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그린뉴딜’이라는 것은 물론 기후위기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예를 들어, 그동안 자동차에 주로 의존해왔던 교통시스템을 철도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전국적인 고속철로망의 건설이라든지, 태양광, 풍력, 바이오매스, 수력 등을 이용한 재생가능에너지의 대대적인 확충이라든지, 기타 경제시스템을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는 쪽으로 전환하기 위한 각종 프로젝트가 제안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 그린뉴딜의 골자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환경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경제도 살리겠다는 계획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오랫동안 생태계가 훼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방치되어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환경과 경제가 상극적인 관계에 있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근대적 산업경제의 논리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반드시 환경훼손을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를 풀기 위한 하나의 타개책으로 나온 게 바로 그린뉴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미국에서는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층을 제외하고는 양식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 그린뉴딜이라는 아이디어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미 몇몇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지금 제안되고 있는 그린뉴딜에는 중요한 문제가 내포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기후위기 상황이 단순히 태양광이나 풍력을 이용한 재생에너지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해소될 것처럼 보고 있는 것이 그렇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린뉴딜의 주창자들은 대체로 기후위기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 즉 근대적 산업경제 그 자체를 혁파하지 않고는 모든 노력이 임시 미봉책에 그친다는 사실을 깊이 성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재생에너지라는 것에도 적잖은 문제점이 있음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태양광 패널의 경우, 거기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희토류는 독성물질이라는 점이 흔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은, 재생에너지시스템을 확대하면 화석연료나 핵물질 기반의 대형 발전소들이 생산하는 전력과 맞먹을 전력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이다. 따져보면, 그것은 종래의 생활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자면 무엇보다 생활수준의 대폭적인 축소, 즉 단순·소박한 생활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흔히 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재생에너지시스템이 널리 보급될지라도, 지금과 같은 대형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가 생산하는 것만큼의 전력을 생산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또, 그게 설사 가능할지라도, 에너지만 풍부하다고 해서, 재생 불가능한 지하자원을 포함해서 온갖 물자를 끊임없이, 그것도 낭비적으로 소모하는 것을 강제하고 있는 산업경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린뉴딜,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 점에서,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그린뉴딜은 그것 자체는 좋은 발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정말 유의미한 프로젝트가 되려면, 거기에는 생태문명의 핵심 논리, 즉 순환적인 삶의 패턴의 회복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단지 물자와 에너지를 절약하는 차원을 넘어서, 어디까지나 경제생활의 기본 패턴이 순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온 생태사상가들이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린뉴딜을 도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렇게 할 때 거기에는 생태적 농사라는 아이디어가 핵심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생태적 농사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산업경제에서는 농업이라는 것도 진정한 농사와는 이미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상업주의 논리의 지배 밑에서 지금 농사는 기계와 화학물질의 대량 투입으로 움직이는 공업화된 농업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농업의 필연적인 결과는 토양의 피폐화·사막화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생존의 자연적 토대의 전면적 붕괴이다. 즉, 인간사회는 기후변화로 인한 파국에 직면하기 이전에, 근대식 농법이라는 미명으로 온갖 농약 및 석유화학물질들로 오랫동안 ‘대지를 독살’해온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빨리 생태적 농법의 복원을 통해서 땅을 살리고, 농민과 농촌을 살리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더욱이 한국의 경우는, 되풀이하지만, 산업국가들 중에서도 식량자급도가 제일 낮은 나라이다. 오늘날 경제력이나 총 경제규모로는 한국이 세계의 10위권이라고 하는 엄청난 수준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 경제의 근본 기초를 생각하면 한국 경제보다 더 위태로운 경제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농사다운 농사를 되살리고, 그와 동시에 지역 공동체들을 회생시키는 것 말고 어떤 다른 것이 있겠는가?

농사가 정상화되어 농촌과 지역 공동체들이 살아나고, 그 자연스런 여파로 수도권에 밀집된 인구가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지역 중심 경제와 문화가 활기를 띠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생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될 기본 조건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든 농민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무조건적 소득을 보장하는 농민기본소득제를 서둘러 과감히 도입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 모두의 삶·생명의 근원적 토대를 지키고 보살피는 사람들에 대한 전 사회적인 인정과 존경을 그런 식으로라도 표시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 뒤에, 상당한 시차를 두고, 전국적인 인구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전 국민적 차원의 기본소득을 점진적으로 확대해나간다면 어떨까? 그것이 균형적 분권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사회정책이기도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나라에는 약 230만의 농민이 있다. 이는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의 500만 농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이다. 미국의 저명한 생태사상가 루이스 멈퍼드에 의하면,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최소한 농민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이 견해대로 당장에 농민 인구를 증가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점진적으로나마 우리는 농민을 포함한 농촌 인구를 늘려나가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태적 농사가 번창하는 사회를 하루빨리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농촌보다 먼저 도시민들의 생존·생활부터 붕괴하고 말 것이다.  

농촌, 농민이 살아야 흙이 산다

지금 한국정부는 이른바 스마트팜이니 대규모 시설농이니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그런 것이야말로 근본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뜬구름 잡는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속가능한 농사, 그리하여 생명의 보금자리인 땅을 영구적으로 지키려면, 농사는 철저히 생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생태적 농사란 상업주의 논리와는 기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농을 보호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한국의 농업 관련 전문가들은 흔히 소농을 마치 사라져야 할 역사적 유물인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미국식 대규모 영농, 즉 기계·화학물질에 의존하는 농법을 모범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식 대규모 단작농업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석유화학 및 기계공업의 여파로 생겨난 농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농사의 공업화’의 필연적인 결과로 발생한 잉여 농산물의 처리를 위해 미국정부가 밀어붙인 것이 ‘자유무역’ 논리라는 것, 그 때문에 세계 전역의 소농경제가 무너져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이제는 어느 면으로 보든지 미국식 농업 모델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 우리가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근년에 들어 유엔에서 나오는 농업 관계 보고서들도 왜 소농 중심의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즉, 지속가능한 생태적 농사를 위해서는 농민공동체의 오랜 지혜와 협동적인 노력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이제는 유엔을 포함한 세계의 유수한 과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기후변화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책으로서, 동시에 EROEI 때문에라도, 석유시대의 종언에 대비해서, 생태적 농사 중심의 사회로 신속히 전환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한 농민기본소득제의 시행이야말로 매우 필요하고 긴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어쩌면 제일 중요한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즉, 우리 사회의 다수가 어떻게 농사의 중요성에 동의하고, 농민기본소득의 필요성에 합의를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우선, 농민기본소득의 실시에 대해서는 도시 주민들의 상당한 반발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 농민들에게만 특혜가 주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사정을 잘 모르는 도시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난 수십 년간, 이 나라 정부는 일반시민들이 부동산 거래 등을 할 때에 농어촌특별세라는 것을 부과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어촌 살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거둔 세금이 실지로 어떻게 쓰였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오늘날 피폐일로에 있는 농촌 형편을 보면, 그런 지원금이 적어도 소농공동체의 회생을 위한 방향으로는 사용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 점에서, 농민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반드시, 농어촌 지원 프로그램들의 실상과 허상을 철저히 검증하는 작업이 수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식인들의 책임

지금까지 말해온 이야기의 요지는, 상업주의 논리를 과감히 청산한 토대 위에서 생태적 농사를 기축으로 한 경제, 사회, 문화의 재창조야말로 지금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마 누구보다도 각성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언론인, 교육자, 학자, 지식인들일 것이다.

지식인들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고등교육을 받고 이 나라의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이른바 유식자들 중 대부분은 주로 근대 서양의 문화와 사상·철학에서 자신들의 지적·정신적 자양분을 섭취해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근대문명=산업문명으로부터 생태문명으로 전환해야 할 시대적 요구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할지 모르지만, 그 전환이 기본적으로 순환적인 농사의 재생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흔히 망설이거나 심지어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아마도 그 근본적인 까닭은, 그들이 자신들의 삶이 이 사회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민초들의 삶의 진실과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데에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기후위기 등 위기상황에 대해서 다수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소극적인 반응에서 우리는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위기의 심각성은 인지하면서도, 흔히 비관주의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는 냉소적 자세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일찍이 일본의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 선생이 생전에 통렬한 어조로 지적한 바가 있다. 다카기 선생은 생애의 절정기에 반체제 탈핵운동가의 길을 선택한 과학자였다. 그런 그가 주류 과학계를 과감히 이탈할 것을 결심했을 때, 그의 동료 학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세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라며, 탈핵운동은 해 봤자 소용없다는 식의 체념적·냉소적인 태도였다. 다카기 선생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식인이 취하기 쉬운 가장 부도덕한 자세라고 말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왜 기후변화 등에 관해 비관주의적 자세나 냉소적 태도를 드러내는지, 그리고 농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즉, 실제로 흙을 일구며 혼신을 바쳐 땀 흘려 일하는 민초들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비관주의에 함몰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흙의 사람들’은 끝까지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세상을 구경꾼의 눈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섣부른 비관이나 체념, 혹은 냉소적 태도는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녹색평론> 2020년 1-2월 통권 제170호에 실렸습니다. 필자와 <녹색평론>의 동의를 얻어 일부를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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