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기 문자, 그럼에도 진보매체를 이해하는 까닭
2018.04.26 16:52:02
[기자의 눈] '그러니까'와 '그럼에도'의 차이

성추행 논란을 낳은 시인의 작품, 교과서에 계속 실어야 할까?

답을 찾기 전에 짚을 대목이 있다. 교과서에 실렸다는 이유로, 지나친 권위를 부여하는 문화는 낡았다. 교과서가 한 가지였던 시절, 그래서 교과서를 달달 외워야 했던 시절의 흔적일 뿐이다. 교과서는 국정보다 검인정, 그보다는 자유발행이 낫다. 이른바 선진국들은 대체로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택했다. 교사들이 선호하는 방향도 그쪽이다.

교과서 자유발행제는 한국에선 아직 먼 이야기, 현실로 돌아오자. 그래서 교과서에 실어야 하나?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문장이다

비슷한 논란이 전에도 있었다.

친일 작가 논란이다. 친일 작가의 작품을 교과서에 실어야 할까?

오래 전에 읽은 칼럼 한 토막을 간추려 소개한다. 1989년 전교조 창립 당시 해직됐던 교사가 10년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외환위기, 수평적 정권교체, 인터넷 보급…. 사회가 변한 만큼, 학교도 아이들도 달라졌다.

국어 수업을 하며 어느 시인 이야기를 했다.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외쳤다. "그 사람, 친일파잖아요."

어딘지 낯선 모습, 이어진 불편한 감정. '그 시인, 친일파 맞다. 나는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가 문화계 주류였던 역사를 비판했었다. 그런데 왜 저 아이의 말이 불편하지?'

그 교사의 생각은 이랬다. 학생에겐 '머뭇거림'이 없었다. 인터넷이 보급된 시대에, 누가 '친일파'인지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다. 그 정보를 머리에 담아뒀다가, 바로 뱉어내게끔 하면, 좋은 교육일까?

그건 아닐 게다. 어떤 작가가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친일이 대세였던 시절, 누군가는 그에 동조했고, 다른 누군가는 거부했다.

이런 차이는 왜 생겼을까. 빼어난 재능을 지녔던 누군가는 굳이 대세를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면, 다른 누군가 역시 친일이 대세라는 걸, 동료와 선후배, 부모와 교사가 친일파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국주의 일본에 맞섰다.

친일파가 나와 크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을 거부하게끔 하는 내면의 힘.

그 힘을 기르기 위해 친일 문학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일 텐데, 아이들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친일 작가 명단을 외웠다. 


교사는 그게 불편했다. 아이들은 다수가 친일을 했던 처지에 일단 공감한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을 거부한 작가들이 지닌 내면의 힘을 흡수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닮은 건, 동전 넣으면 종이컵 튀어나오는 자판기였으니, 그 교사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게 칼럼 내용이었다.

성추행 논란 작가를 둘러싼 논쟁도 비슷해 보인다. 논란이 있으니 교과서에서 지우자거나, 성추행 논란은 빼고 가르치자는 식은 모두 위험하다.

이들 작가에 대해 배우며 아이들이 길러야 할 내면의 힘은 따로 있다. 공적 영역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는 작가가 사적 영역에선 성추행을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다들 훌륭한 작가라고 알고 있으니까, 소수만 알고 있는 성추행 사실은 외면하고 싶은 욕망,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훌륭한 작품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성추행 논란은 제대로 규명돼야 하며, 사실이 드러나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갈 수 있는 힘. 그걸 키우는데 유리한 방향으로 교과서 논쟁이 정리돼야 한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문장이다.

조준웅 아들의 삼성 과장 취업, 삼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포

조금 낡은 기억을 끌어올리느라, 많이 에둘렀다.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이야기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간한 게 2010년 초였다. 그보다 한 해 전에 김용철 변호사가 일하던 빵집으로 출퇴근하며 원고를 정리했다. 2009년 초부터 1년 여 동안, 참 많이 놀랐다. 당초 출간하기로 한 출판사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다른 출판사를 찾았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기껏 책이 나왔는데, 그래도 놀랄 일이 남았다. 언론사들이 책 광고를 거부했다. 이른바 진보 매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와 지하철 광고로 책을 알려야 했다.  


출판사가 광고비를 낸다는데도, 광고를 하지 않겠다는 언론, 어떻게 봐야 할까.

삼성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쳤던 탓이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2007년 10월에 있었다. 그 뒤,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출범했다. 언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하지만 조준웅 특검팀은 삼성 비리를 규명하기는커녕 사실상 덮어버렸다. 삼성 총수 일가 입장에선, 오히려 선물이었다. 비자금이 실명 전환 됐다.

그 뒤론, 삼성 비리를 거론하는 보도가 확 줄어들었다. 삼성 비리는 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공포가 번졌다.

지난 2009년 <삼성을 생각한다> 원고를 들고 출판사들을 찾아다니던 당시 느꼈던 삼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두려움. 원인 제공자는 조준웅 당시 특별검사(현 변호사)였다. 그가 삼성 비리를 덮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랐을 게다.


조준웅 변호사는 대체 왜 그랬을까? 진실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작은 단서는 있다. 특검 수사가 끝난 뒤, 조준웅 변호사의 아들이 삼성전자에 과장으로 입사했다. 대학을 마친 뒤에도 장기간 사법시험 준비를 했을 뿐, 아무런 사회경력이 없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과장으로 입사했다. 총수 일가를 제외하면, 유례가 없는 일이다.

아버지를 따라 사법시험을 준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아들. 고시 준비를 하느라 취업 시기를 놓치면, 평생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다 취업을 해도, 상사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적응하기 힘들다. 그걸 뻔히 아는 아버지는 괴로웠을 게다. 그런데 아들이 또래 나이에 맞춰서 과장으로 입사한다면, 걱정이 사라진다.

만약 삼성 비리에 대한 봐주기 수사가 이런 걱정을 덜어준 대가라면, 끔찍한 일이다. 한국 사회가 대신 치른 비용이 너무 컸다. 삼성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그러므로' 삼성에 영합했다 vs.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 비리를 보도했다

그 공포에서 진보 매체 역시 자유롭지 못했던 역사가 분명히 있다. 앞서 거론한 <삼성을 생각한다> 광고 거부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진보 매체 역시 자본 권력 앞에서 비굴하긴 마찬가지라고 비웃어야 할까. 그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문장이다.

어떤 매체는 예나지금이나 재벌을 두려워하고, 또 영합한다. 그 조직 구성원들 역시 생활인이며, 언론사에겐 광고 외에 다른 수익원이 없으므로, 어쩌면 이해할만한 일이다. 


다수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가 그랬고, '갑'의 성추행에 눈 감는 다수 '을'이 그렇다.

하지만 똑같은 처지에서 재벌 비리를 보도한 매체도 있다. 이들 매체 역시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던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비리가 이만큼이나마 드러난 건 상당 부분 이들 매체의 공로다.

최근 <뉴스타파>가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권력 엘리트들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보도했다. 조준웅 변호사를 떠올리게 하는 사례가 많았다. 삼성의 로비 전문가인 장 전 차장에게 취업 청탁을 한 사례가 흔했다.

이른바 '장충기 문자' 명단에는 언론인도 포함돼 있다. <한겨레>, <경향>의 경영진도 포함됐다. 어떤 이들은 분노한다. '진보 매체 경영진이 삼성의 로비 전문가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다니!'

편집국 내부 개편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축하하는 내용 등은 확실히 비굴하다. 그러나 이들 매체를 "삼성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자처하는 매체와 같은 반열에 놓는 건, 잘못이다. 


언론사가 살아남으려면, 삼성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걸 다들 안다. 어떤 매체는 '그러니까' 삼성 비리를 덮는 보도를 했다. 어떤 매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 비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니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차이, 친일과 항일 만큼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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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석 기자
mendram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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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복지, 재벌 문제를 주로 취재했습니다. 복지국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내려고 김용철 변호사의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과학자, 아니면 역사가가 되고 싶었는데, 기자가 됐습니다. 과학자와 역사가의 자세로 기사를 쓰고 싶은데, 갈 길이 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