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 부려야 할 인간이 왜 자본 앞에서 빌고 있는가"
2014.12.03 08:07:16
[프레시안 조합원 교육] 강수돌 고려대 교수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이장. 한때 강수돌 고려대 교수의 또 다른 직함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학교 옆의 자택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생산했다. 2005년 5월부터 2010년 6월까지 5년 간 농촌 마을 이장도 지냈다. 

늘 지역공동체를 고민하는 그다. 그런 그가 지난 11월 27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 교육 강사로 '자본주의의 한계와 대안공동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과 일반인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아래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편집자

주제가 '자본주의 한계와 대안공동체'다. 우선 자본주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경제라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기 온 분들이 수준이 높아서 긴 이야기를 안 하겠지만(웃음), 경제의 개념은 세상을 잘 경영해서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백성의 살림살이를 돌보겠다는 이야기다. 생각해야 하는 게 경영과 돌보는 것은 정치적인 개념이다. 경제는 정치랑 떨어지지 않는 말이다. 

백성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는 게 정치이고 경제다. 이런 개념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정상적으로 사회가 굴러간다. 그러나 지금 어떤가.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뉴스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비정상이다. 왜 경제가 이렇게 돌아갈까. 내가 내린 결론은 경제의 애초 개념은 '살림살이의 경제'인데, 이것이 자본주의 이후, ‘돈벌이 경제’로 변질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돈벌이 경제는 개인의 경우, 취업해서 월급을 많이 받으면 그만이다, 기업의 경우 이윤을 최대한 많이 남기고, 나라의 경우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면 된다. 

이렇게 월급, 이윤 등과 같은 수치가 올라가면 잘 사는 게 돈벌이 경제다. 문제는 이러한 돈벌이 경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수치가 증가한다고 살림살이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에게 돈벌이가 잘 된다는 것은 월급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월급을 많이 받으려면 잔업, 특근을 해야 한다. 그럴 경우 가족과의 대화 시간은 사라진다. 가족과 회사의 불균형이 생기는 셈이다. 이것은 사실상 질병이다.

기업의 생산성은 투입분 대비 산출분이 얼마냐에 따라 달라진다. 투입분은 줄이고 산출분을 늘리면 생산성, 즉 이윤이 늘어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자본은 투입분을 낮추는 방법으로 인건비를 줄인다는 점이다. 사람을 자르고 비정규직을 쓴다. 하청을 쓰거나 외주화해 버리고 임금을 동결한다. 노동조합도 억압한다. 그러면서 투입분을 낮춘다. 

국가적으로 보면 물품 생산에 필요한 자재 값을 낮춰야 생산성이 늘어난다, 그래서 자재, 즉 석유가격을 절약하기 위해 산유국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권을 세워 싼값에 석유를 가져온다. 만약 산유국에서 싸게 석유를 제공하지 않으면 악의 축으로 세운다. 이런 구조가 모두 연결돼 있다.

▲ 강수돌 고려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휴대전화의 부속품인 콜탄이라는 금속은 아프리카 광산에서 나온다. 자본은 싸게 휴대전화를 만들기 위해 아프리카 광산을 개발했다. 자연히 여기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을 쫓아내야 했다. 원주민이 반항하면 죽이는 등의 과정도 거쳤다. 자연이 살고, 사람이 살고 다 같이 살아야 하는데, 자본이 살아가는 과정을 보면 끊임없이 죽이는 식이다. 자본의 공식은 기업가의 양심이나 도덕성과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자연을 약탈하는 것이다. 나쁜 심성을 가진 기업가는 더 악랄하게 이것을 진행한다. 주목할 점은 양심적인 사람도 기업가가 되면 생산성을 맞춰야 하기에 자연을 약탈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선한 사람이 기업가가 되면 마음이 변했냐고 비판한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그 자리를 떨치고 나와야 한다.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에 대해 모두가 성실히 일해서 고부가가치를 만들어 유통하면 올라간다 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있다면 1인당 국민소득 1만 불 시대가 되면 잘살 거라 했다. 내가 54세인데, 어릴 때부터 들은 걸로 치면 50년 동안 선진국 문턱 이야기가 있어 온 것이다. 

1만 불을 달성하면 삶의 여유, 즉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1만 불을 달성한 순간, 이제는 2만 불 시대를 달성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한다. 그리고 3만, 4만 불을 달성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삶보다는 오후에 쉬고, 영화도 한 편 보고, 여러분이 듣는 지금 같은 강의도 오후 2시에 하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종일 공부하지 말고, 악기연주, 빵 굽는 일 등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이래야 한다. 그러나 이런 날이 언제 오겠나. 

노동자 개인의 삶, 기업 이윤, 그리고 나라의 수출, 1인당 소득 시대. 이런 과정은 돈벌이 경제의 지표이지,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살림살이 경제가 아니라는 점을 정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기계의 논리다.

이제 살림살이 돈벌이 구조를 알아보자. 살림살이 돈벌이는 최소한의 돈벌이를 일컫는다. 먹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번다. 그리고 그 돈은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이다. 행복한 삶을 해치면서 돈벌이를 하는 게 아니다. 격차를 벌리고 양극화 현상이 생기는 것도 행복한 살림살이가 아니다. 노동과정을 인간적으로 만든다든지, 노동을 사이에 두고 맺어진 인간관계가 위계가 아닌 둥근 테이블에 있는 식이어야 한다. 물론 이럴 경우,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거기서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에게는 임금을 더 줘야 한다. 그렇다고 그 격차가 인간적으로 감정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어야 한다. 돈이 된다고 만들고 안 된다고 안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면 만드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그걸 전제하고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려 한다. 

자본주의, 유일하고 영원한 체제가 아니다

오늘날처럼 농사짓고 살아가던 시기는 불과 1만 년 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는 최대한 길게 잡아도 7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00중에 7이 자본주의 역사인 셈이다. 이 말을 하는 건, 자본주의가 유일하고 영원한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가 당시에는 진보성이 있었다. 노예제도 등을 비춰보면 말이다. 하지만 진보성을 보편화할 수는 없다. 

인간의 제도조차도 생성되고 발전하고 소멸한다. 사회시스템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정법으로 세계 70억 인구 중에 30억이 들고 일어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에 동감하는 사람이 30억만 돼도 변화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 변화 과정에서 볼 때 분명 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례로 지금 태어난 사람들은 자본주의 아니면 못 사는 줄 안다. 또한, 지금 태어난 이들은 물은 사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80년대에는 사 먹지 않았다. 90년대 현상이다. 자본주의도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세태 변화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닌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도 상품이 되는 세상이다. '사랑의 전화'가 대표적이다. 대학의 상업화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지식이나 지혜를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자식 졸업장 때문에 아버지들이 잔업, 특근 등을 한다. 

자본주의는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노동자와 소비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하면 납세자가 있어야 한다. 납세자가 국가를 먹여 살려야 하고, 그 국가는 자본가를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자본 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없으면 더 잘 살 수 있다. 인간끼리 협동하면 된다. 왜 경쟁만 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세뇌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을 간추리면 인간의 역사와 자본의 역사를 비교하면 누가 배짱을 부려야 한다고 생각하나. 누가 더 중심을 잡아야 하는 존재인가. 당연히 인간이다. 질문하는 놈이 바보다. 그런데 거꾸로 돼 있다. 인간이 자본 앞에 가서 빈다. '제발 나를 고용해달라'고. '제발 잘 봐 달라, 당신 떠나면 우리는 죽어요'. 이렇게 빌고 있다. 하지만 '너 없어도 내가 살 수 있어' 이럴 때 강해진다.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만들게 하고, 못 만드는 사람은 죽으라고 하는 게 맞는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지속가능성이 없다. 지금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삼엄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만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질문을 해보자. 왜 배짱을 부려야 할 인간이 자본 앞에서 빌어야 하는가. 

자본주의가 지금껏 통용되는 이유

원리상으로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분할지배의 전략이 먹혀들고 있기 때문이다.  국적별로 나눠있는 게 지금 구조를 견고히 하고 있다. 자본가는 스위스 다보스포럼 등에서 만나 연대성을 갖지만 노동자는 반대로 노동자들끼리 국적이 나뉘어 싸운다. 김영삼 정부 시대 때 나온 유명한 광고카피 중 하나가 '당신의 경쟁상대는 누구십니까'였다. 

그런 식으로 회사 안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놓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대졸자와 고졸자로 갈라놓는다. 보이지 않는 경쟁과 차별을 지속해서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서 경쟁은 경쟁대로 시킨다. 지배력을 높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시절에 체육선생이나 교련 선생은 학생이 만약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5분 안에 아이들을 장악하는 방법을 쓴다. 아이들에게 철봉까지 뛰어갔다가 오는데 선착순 3명까지만 면제라고 한다. 이후 나머지는 또 뛰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경쟁을 시킨다. 선생은 편하게 말하지만, 애들은 죽으라 뛰고 또 뛴다. 한도 끝도 없이 뛸 거 같지만 3번만 반복하면 아이들은 선생에게 장악된다. 선생 입장에서는 철수나 영희가 1등 하든 말든 상관없다. 이게 세계에서 벌이는 일이다. 국가 간 경쟁순위를 매기며 질투와 분열을 조장한다.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어느 나라가 1등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나라끼리 살벌하게 경쟁을 벌여서 경쟁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내면화한 자본

두 번째로 자본주의가 공고해지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자본보다 더 강하게 자본을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는 일상의 피곤함과 서러움, 열패감 등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새끼를 족친다. 아이 뒷바라지를 위해 잔업특근을 하면서도 '너만큼은 나를 다그치는 저 상사처럼 돼라'고 한다. 눈물 흘리면서 자본가처럼 만들려고 한다. 오히려 자본가는 그 정도로 각오하지 않는다. 그게 내면화다. 우리는 분열됐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본화를 뼛속까지 내면화했다. 그래서 자본에 끊임없이 지고 있다. 내면화 문제는 이 게임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발버둥만 친다는 데 있다. 현 대학 시스템도 나쁘다고 하지만, 막상 제 새끼가 대학교 갈 때가 되면 '그래도 여기에 가야 하는데…' 이런다. 그 틀을 깨는 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때, 변화가 가능하다. 

이런 변화는 우리 일상에서부터 변화하는 게 중요하다. 혁명은 앞뒤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피지배자가 지배자가 되는, 자리의 변경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 즉 적대가 아닌 공존,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닌 같이 살자…. 이게 근본적 변화다. 이런 변화에 동의하고, 인간 내면을 발휘하는 게 협동이라고 생각한다. 원리상으로 자본의 분할 지배, 내면화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것을 되찾는 게 협동이고, 혁명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자본주의 구조는 오래가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생산보다 수요가 못 따라가는 게 보인다. 지구라는 시장은 한계가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흥행하고 있는데, 이 영화를 삐딱하게 보자면 지구 시장이 한계가 있어, 우주 공간을 뚫으려는 영화 같다.(웃음) 자본 입장에서 지구라는 공간이 막다른 공간으로 몰리는 측면이 있다. 그러면서 시장 측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고민하게 된다. 그게 자본에는 신세계다. 

과거에는 신세계가 미국이었다. 그게 서서히 없어지니 다른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동력 성장을 우주로 돌리는 게 아닌가. 굉장히 위험하다. 생명의 입장,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하고 오만하다. 더 심각한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고 본다. 

위험하다고 한 이유를 쉬운 사례를 들어 이야기해보겠다. 1억을 받고 명예퇴직한 사람이 PC방을 차렸다고 하자. 이 사람이 본전을 뽑으려면 2~3년 정도 영업을 잘해야 한다. 그런데 옆집에서 더 좋은 시설로 PC방을 차렸다고 치자. 그러면 1억의 PC방을 차린 사람은 1년 만에 망한다. 주목할 점은 더 좋은 시설로 PC방을 차린 사람은 5년 영업해야 본전을 뽑는데, 그 옆에 더 좋은 시설로 PC방이 차려진다면 그 역시도 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아무도 본전을 뽑는 사람이 없는 셈이다. 

소련의 멸망 이후, 자본은 새로운 시장으로 들어갔다. 이를 두고 세계화, 현지화라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서서히 포화상태가 되고 있다. 미국 리먼브라더스 사태는 80년대 이후 25년 정도 억지를 써서 승승장구했던 자본주의가 소강상태, 즉 슬럼프로 들어가는 신호탄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침체 기간이 적어도 10년, 길면 20~30년 갈 수 있다. 

새로운 시장, 즉 수요가 부족하니 자연히 자본은 인간노동력을 쥐어짜서 수요에 맞춘다.  중국 애플 공장에는 노동자가 100만 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60~70년대처럼 부려 먹으니 계속 자살 행렬이 나온다. 

노동만이 아니다. 국가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30년 가까이 공공부분과 복지부분은 민영화를 통해 새로운 이윤으로 창출해내고 있다. 이는 자연, 인간, 공공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내다보는 사람들이 현 구조 속에서 얼마나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고 자본의 내면화에 저항할 수 있는가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관적이다. 이것을 인식하기 쉽지 않다. 해봐야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팽배하다. 가장 열심히 해야 할 노동자가 책 읽을 시간도 없다.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비판적 통찰력으로 지성의 세계를 선도해야 할 대학 지식인도 거의 사라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주체성, 연대성은 끊임없이 마모되고 있다. 

무엇인가를 늘 파괴해야 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한계를 이야기하다 보니 주체적인 면까지 넘어왔다. 한계 부분을 또 다른 부분에서 본다면, 자본주의는 결국에는 자원의 고갈 문제, 인간의 저항, 시장의 한계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주의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저항이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발악한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주는 정치체제가 파시즘이고 한 단계 더 나가면 전쟁이다. 전쟁은 자본주의의 위협이자 기회다. 부서지기에 위협이지만, 부서져야 재건되기 때문에 기회다. 

전쟁으로 누가 살아남는가. 독점자본주의가 살아남는다. 그래서 권력과 일정 관계를 맺고 있다. 독일의 많은 기업(폴크스바겐, 벤츠 등)이 다 마찬가지다. 제약산업도 마찬가지다. 생체 실험하는 가운데 기술 발전을 이뤘다. 벤츠 마크는 전투기 프로펠러를 정면에서 본 모양이다. 미국이 전쟁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금융도 거품이다. 부의 원천이 100이면 그보다 15~20배의 거품을 만들어 돌리는 식이다. 한 군데가 꺼지면 연쇄적으로 꺼진다. 건설은 어떤가. 사람들이 필요해서 집을 짓는가. 아니다. 인간다운 주택이라면 영구임대주택이 딱 맞다. 기차를 탔는데 누가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비켜달라고 한다. 하지만 내릴 때 그 자리를 가지고 내리진 않는다. 집도 살아 있는 동안에 잠시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토지, 주택 등을 빌리는 것으로 합의한다면 좀 더 여유롭게 살아가는 디자인이 가능하다.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면 내 집 한 채 장만한 사람이 서운해한다. 원리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은 모든 것을 개인화해서 집집이, 개인마다 갖게 한다.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 말해 인본, 생명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는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그것은 '사람'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협동을 통한 풀뿌리민주주의가 근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리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소란을 일으켜야 한다. 의회 안에 민주주의는 가짜라는 것이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지금의 의회민주주의 제도는  중간 정도는 되겠다. 하지만 그것도 믿음은 안 간다. 

의회민주주의는 겉모습만 민주주의다. 국회에는 특정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로비스트들이 상주하면서 '자기'들끼리 소통한다. 우리가 어렵게 국회의원을 찾아가면 얌전히 대접을 해주지만, 결국은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시오' 식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 척, 아무 문제 없는 척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런 틀을 넘어가는 상상을 못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에서 거칠고 야생적으로, 다듬어지지 않는 가치가 강조돼야 한다. 어설프지만 부대끼면서 만들어가는 게 진짜일수 있다. 음식을 예로 들면 깔끔하게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고, 포장돼 있는 것은 보기 좋지만, 막상 먹으면 이게 아닌데 싶다. 의회민주주의도 그렇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런 부분이 하루아침에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손톱이 부딪쳐서 다치면 시커멓게 변한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나. 그 손톱은 나중이 되면 서서히 빠져나온다. 안에서 새 손톱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새 손톱이 까만 손톱을 밀어내듯이, 혁명도 그렇게 일어나야 한다. 5.16 같은 혁명이 일어나면 안 된다.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혁명은 그게 진보적일지라도 반드시 부작용이 생긴다. 그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겠는가. 삶의 일관된 실천 속에서 이뤄지고 그 힘이 민들레 홀씨처럼 번져가는 게 필요하다. 결국, 사람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끼리 좌절하는 것도 사람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적정한 수준에서 갈 길인가. 큰 선에서 사람과 사람, 내면과 외면의 동일성을 바라는 게 있다면, 실수도 어색함도 손잡고 격려하는 관계를 맺어가는 게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 아닌가 싶다. 마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kakiru@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