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없던 일인지라 파장 또한 전례 없다. 요 며칠 새 국내 언론은 온통 이 사태의 보도와 분석 일색이다. 극우파인 아베 신조 총리의 국내외 정치 전략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대법원 판결 이후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과연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전망을 내놓고, 일본산 부품-소재의 국산화 가능성을 놓고도 갑론을박을 벌인다. 지난 주말부터는 미국의 중재 가능성이 화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렇게 쏟아지는 기사와 칼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이번 사태가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는 도무지 오리무중이지만, 더는 논의할 필요도 없이 이미 명백해진 사실이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한 교리의 사망 선고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부고 기사 하나, 추모 칼럼 하나 없다.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외로이 생을 마친 그 사망자는 바로 경제적 자유주의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사망 선고
칼 폴라니의 고전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홍기빈 옮김, 길, 2009)은 한 가지 커다란 물음으로 시작한다. 19세기의 백년평화 뒤에 어찌하여 양차 대전과 대공황 같은 대혼돈의 시기가 도래했는가?
유럽인들은 19세기를 '백년평화' 시대라 불렀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로는 적어도 유럽 한복판에서는 커다란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진실과는 한참 거리가 멀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들은 이 백년평화의 밑바탕에 경제적 자유주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각 나라 경제가 자유시장체제로 묶여 있는 한, 열강은 서로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폴라니의 대작은 이런 믿음이 거대한 환상에 불과했음을 파헤친다. 열강 간 평화의 토대라 믿었던 자유시장체제야말로 20세기 초에 전 지구적 환란을 몰고 온 원흉임을 폭로한다. 한 세대에 걸친 이 환란이 종지부를 찍는 것처럼 보이던 1944년에 폴라니는 자신의 저작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한 세대 뒤에 인류는 다시 100년 전 모험을 반복하는 길을 선택했다. 19세기를 지배하던 경제적 자유주의의 깃발을 창고에서 끄집어내 또 다시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이 흐름에 앞장 선 이들은 전 지구적 자유시장체제가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외쳤다. 이제는 1차 산품을 수출하는 지역과 공산품을 수출하는 지역의 자유 무역 정도가 아니었다. 국경을 횡단하는 제조업 생산 사슬이 구축됐다. 특히 반도체 같은 제3차 산업혁명의 핵심 산업에서 이런 초국적 생산 사슬이 나타났다. 이렇듯 지구 경제가 권력 정치와 분리돼 자기만의 합리성에 따라 작동하고 있으니 이는 또 다른 백년평화 시대의 시작이 아닌가. 의심스럽다면, '차이메리카'를 보라. 이게 불과 몇 년 전까지 주류 자유주의의 주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의 두 번째 전성기가 첫 번째 시기보다 더 빠르고 급격하게 붕괴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중이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연은 미국의 트럼프 정부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과 경제 전쟁을 벌이면서 '차이메리카' 질서를 미련 없이 허물고 있다.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려는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행태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바탕으로 지구 자본주의를 칭송하던 자유주의자들을 가장 우스꽝스러운 광대로 만든다.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다만 "포퓰리스트들"을 저주하는 단말마의 외침뿐이다.
한데 이번에 일본 자유민주당 정부도 이 드라마에서 조연 한 자리를 꿰차고 나섰다. 한국에 대한 아베 정부의 경제 보복은 단지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허구를 무너뜨리는 또 다른 일격이다. 트럼프를 모방하면서도 오히려 트럼프보다 더 잔인하게 내리친 한 방이다.
일본 정부는 미국보다 더 노골적으로 초국적 생산 사슬에서 자국이 차지하는 지위를 무기로 삼았다. 더구나 대상이 한국이고, 수단은 반도체 산업이다. 미국의 상대인 중국은 어쨌든 자유주의의 철저한 신자는 아니다. 그래서 미국의 대중국 경제 전쟁은, 물론 위선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유주의의 수사로 치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상대인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어찌 보면 어리석을 정도로 경제적 자유주의 교리의 신자를 자처한 나라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성공한다면, 이는 자유주의의 충직한 신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보여주는 세계사적 사례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여러 산업 중에서도 하필 반도체를 노렸다. 반도체 생산은 정보화 시대의 모든 첨단산업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각국의 안보와도 직결돼 있다. 그럼에도 그 동안은 마치 안보 리스크는 없을 것처럼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국제 분업을 통해 생산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은 이 불문율을 깨뜨렸다. 생산 사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치-군사적 힘으로 전용할 수 있음을 스스로 '선언'해버렸다. 이제 세상은 전과 같을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가 부품-소재 국산화를 부르짖는 것처럼,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더는 기존 생산 사슬을 당연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세계사 교과서의 한 모퉁이를 차지할만한 사건이라 할만하다. 진주만 공습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세계인의 뒤통수를 친 점에서는 가히 그 재연이라 하겠다. 인류에게 22세기에도 생존이 허락된다면, 그때 사학자들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두 번째 죽음을 다루는 장에서 아베 신조의 이름을 결코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가 주인공인 장(章)의 각주로라도 말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죽음을 부른 '1965년 체제'의 균열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따른 질서가 이토록 쉽게 무너질 수 있다면, 지난 몇 십 년 동안은 과연 어떻게 지속될 수 있었는가? 바꿔 말하면, 이렇다. 그래도 한 세대 넘게 지탱하던 질서가 지금에 와서 이렇게 무참히 파기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진짜로 강제 징용 피해 배상 문제 때문인가? 1965년에 조인된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 피해 청구권은 소멸했는데 한국 대법원이 이러한 '1965년 체제'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리는 바람에 정말 이 사달이 난 것인가? 그래서 일본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가 한 발 물러서기만 하면 지금의 이 경제 전쟁 분위기도 없던 일이 될 수 있는가?
오직 끊임없이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지식병자들만이 이 물음에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큰 사건은 큰 흐름 속에서 봐야 하는 법이다. 자잘한 이유를 따져봐야 소용없다. 지구 위의 어느 나라 정부도 위 물음들이 전제하는 과거사 논란 정도로 국제 경제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렇게 보는 것이야말로 아베 정부를 비선 실세의 꼭두각시나 극우 미치광이쯤으로 무시하는 태도다.
나는 법률가들이 말하는 '1965년 체제'를 그들이 뜻하는 것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이 사태의 맥락을 제대로 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체결이란 일제 식민 지배 책임을 어정쩡하게 정리하고 국교를 수립한 사건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뜻에 따른 한국-일본 간 동맹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것은 소련-중국-북한이라는 동아시아 사회주의 블록에 맞서는 정치-군사-이념 동맹, 한 마디로 반공 동맹이었다.
이 반공 동맹은 최근까지도 강력히 존속했다. 물론 소련이야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남았고 또한 북한이 남았다. 중국이야 지구 자본주의에 스스로 합류했기에 오랫동안 노골적으로 적대시할 수 없었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았다. "핵 미사일을 개발하는" 북한은 동아시아에서 미국-한국-일본의 동맹이 21세기까지 지속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이 반공(반북) 동맹은 동아시아에서 경제적 자유주의가 순탄하게 확산되고 작동하게 해주는 안전판이었다. 사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어느 지역에서든 이렇게 그다지 자유주의적이지 못한(illiberal) 정치-군사-이념 질서와 결합해야만 안정을 구가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21세기까지 끈질기게 잔존한 반공 동맹이 그런 역할을 했다면,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결합된 위로부터의 유럽 통합 과정이 비슷한 구실을 했다.
반공 정치-군사-이념 동맹과 경제적 자유주의의 동시 발전, 이것이 동아시아의 '1965년 체제'다. 만약 이 체제가 계속 안정적으로 작동했다면, 일본 정부가 지금처럼 경제 보복을 단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한일협정 해석과 한국 측의 그것이 충돌하더라도 반도체 관련 품목 수출 규제까지 선택지에 놓고 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1965년 체제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정치-군사-이념 동맹은 최근 몇 년 새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충격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그 충격이란 다름 아닌 2016-17년 한국의 촛불 항쟁이다.
그 전까지도 반공 동맹의 연장인 반북 동맹은 동아시아에서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북한은 북한대로 핵 미사일 실험을 착착 진행했고, 미국-한국-일본, 세 나라는 이를 빌미로 철저히 공조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네 나라에 동시에 들어선 세습, 혹은 준 세습 정부(북한의 김정은, 남한의 박근혜, 일본의 아베 신조, 중국의 시진핑)가 이러한 세력 균형을 고정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2016년 가을까지도 그랬고, 이후에도 이것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지속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느닷없이 촛불 항쟁이 일어나 네 세습 정부 가운데 하나가 무너졌다. 이를 통해 새롭게 들어선 한국 정부는 북한과 미국이 협상장에서 만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돌연 미국, 북한, 남한이 참여하는 협상 무대가 열렸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이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물론 아직까지 일본 지배 세력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실질적 결정이나 합의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등장한 정부가 전혀 개입의 여지없이 열어놓은 한반도 협상을 바라보며 이들이 1965년 체제의 생사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기존 체제가 무너진 게 확실하다면, 이후 국면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뭔가 주도권을 발휘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주도권은 오직 행동할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 일본 정부에게는 그런 어떤 '행동'이 간절히 필요했고,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란 어쩌면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 경제 보복뿐이었을 것이다.
뜻밖에 중요해진 우리, 그러나 과연 그만큼 준비돼 있는가?
지금까지의 진단이 조금이라도 진실의 한 자락을 잡고 있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가 뜻밖에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쩌면 촛불 항쟁의 주역임에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사건이 지금 동아시아에 열린 변화와 재편의 기회 혹은 소용돌이의 중대한 계기 중 하나였음을 촛불 시민 자신만이 실감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뒤늦게야 한국의 시민들은 놀랐고, 아래로부터의 불매 운동으로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과연 이것이 사태의 핵심을 겨냥한 대응의 전부일까?
그간 그나마 동아시아의 한 쪽 편을 인도하던 가치와 지향, 규범은 반공(-반북) 동맹의 이완과 경제적 자유주의의 돌연한 사망 선고, 즉 1965년 체제의 와해로 이제 과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다. 어찌 보면 혼돈의 시작이다. '문명'을 다시 묻고 재정초해야 할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의 단초를 알고 있다. 우리가 뜻밖에 중요해진 것이 촛불 광장의 '민주주의' 때문이라면, 이 민주주의야말로 우리가 내놓을 답의 단서다. 단순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말고 시민이 주도해 자유, 평등, 연대의 내용을 채워가는 민주주의 말이다.
작금의 불매운동에도 이러한 민주주의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 하지만 촛불 이후 민주주의가 하나의 문명이라 할 만한 수준으로 확장되고 풍부해지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뜻밖의 질시와 공격 속에서, 난민을 향한 공포와 혐오 속에서, 부동산 가격 상승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민주주의는 길을 잃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우리 내부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서 우리가 과연 일본 제국주의-파시즘 부활이라는 바깥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뜬금없는 결말이라 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경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고민거리다. 부품-소재 국산화도 필요하지만, 필요한 게 정말 그것뿐일까? 저 옛날 우금티의 안타까운 무장 상태를 슬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우리의 혼은 과연 그때의 동학만큼 깨어 있는가? 우리에게 정녕 "사람은 하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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