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버렸다! 푸코를 따랐다! 생명을 말하다!

[생명 자체의 정치] 사회학자 니컬라스 로즈

최근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꿰뚫는 열쇳말은 '생명'이다.

일찌감치 21세기를 '생명과학의 시대'로 명명하고 인간 유전체(게놈) 프로젝트 등을 통해서 '생명의 비밀'에 파헤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 자연과학이 생명을 되뇌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과학기술의 변화에도 꿈쩍 않던 인문·사회과학이 생명에 주목하는 일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런 변화의 맨 앞에 서 있는 지식인이 바로 영국의 사회학자 니컬라스 로즈(영국 런던대학교 킹스 칼리지 교수)다. 로즈는 2000년대부터 새로운 생명과학과 그 결과로 나타난 의료의 변화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를 고민해왔다. 그는 이런 지적 실험의 중간성과를 2006년 <생명 자체의 정치(The Politics of Life Itself)>로 펴내고, 분과 학문을 넘나드는 학제 간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도 곧 출간될 <생명 자체의 정치>는 현대 생명과학이 낳은 삶의 변화를 분자화(molecularization), 최적화(optimization), 주체화(subjectification), 전문성(expertise), 생명경제(bioeconomy), 이렇게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그것이 가지는 함의를 과학과 의료 현장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서 설명한다.

니컬러스 로즈는 푸코 철학에 대한 영어권의 대표적인 해석자로 꼽힐 뿐만 아니라, 최근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이른바 '통치성(Governmentality)'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6년간 편집장을 맡았던 <경제와 사회(Economy and Society)>를 통해서 푸코의 통치성 연구를 조명하고 발전시키며 영국의 이른바 '통치성 학파'를 이끌었다.

<프레시안>은 국민대학교 '생명공학의 새로운 정치와 윤리' 연구팀(책임 교수 : 김환석)이 개최한 국제 워크숍(21세기 생명 정치와 생명 윤리)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니컬라스 로즈를 만나 마르크스, 알튀세르, 푸코 그리고 생명과학으로 이어진 지적 여정을 들었다. 인터뷰는 김환석 국민대학교 교수(사회학)가 맡았다.


▲ 니컬라스 로즈 영국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생물학에서 심리학으로

김환석 : 한국에서 선생님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1970년대 후반에 고안한 통치성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발전시킨 영국 통치성 학파의 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명성에 비해서 정작 구체적인 연구 성과는 제한적으로만 소개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 개인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요. (웃음)

더구나 선생님은 2000년대 들어서는 현대 생명과학과 의료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는 이 새로운 지적 실험의 성과를 정리해 <The Politics of Life Itself(생명 자체의 정치)>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마침 이 책은 국내에서도 조만간 번역, 출간될 예정입니다.

1980년대부터 유럽, 미국에 득세한 신자유주의를 연구하던 미셸 푸코의 계승자가 생명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선생님의 지적 배경을 소개하는 게 순서일 듯합니다. 먼저 가족 관계부터 살펴볼까요? (웃음) 형이 저명한 과학자죠? 생물학자이자 뇌 과학자로 유명한 스티븐 로즈 영국 개방 대학 교수 말입니다.

로즈 : 맞습니다. 형이 한국에서도 유명한가요? (웃음)

김환석 : 한국에서도 1980년대부터 국가나 자본이 주도하는 현대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사회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 운동에 참여해온 이들이 참고했던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스티븐 로즈 교수가 주도한 '급진 과학 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의 지향은 잡지 <Science for the People(민중을 위한 과학)>의 제호에 잘 드러나 있지요.

아, 일반 대중에게 스티븐 로즈 교수는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한울 펴냄)의 저자로도 유명합니다. 이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와 <통섭>, <사회생물학>의 에드워드 윌슨 등을 강하게 비판한 책으로 유명하지요. 스티븐 로즈 교수는 최근에는 뇌 과학의 최전선에서 뇌 과학의 오용을 비판하는 작업도 수행하고 있더군요.

로즈 : 형(1938년생)은 저(1947년생)보다 아홉 살 많아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아주 젊은 나이에 영국 개방 대학의 첫 번째 생물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금 지적했듯이 사회운동가 정체성이 아주 강했지요. 앞으로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저는 형과 비교하면 사회 운동에 훨씬 소극적이었습니다.

김환석 : 선생님이 대학 학부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것도 형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로즈 : 아주 없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렸을 때, 형의 실험실에서 실험을 돕기도 했으니까요. 아무튼 형을 따라서 1965년에 서섹스 대학교의 생물학과를 진학했습니다. 당시 그 대학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가 가르쳤어요. 초파리의 유전학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서섹스 대학교는 새롭게 설립된 대학으로서 1960년대 후반 유럽의 급진적인 분위기가 감싸던 곳이었어요. '초파리 연구가 세상을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지' 이런 회의가 들더군요. 이후에 동물 행동학으로 관심을 옮겼지만 잘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관심을 바꿔서 생물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하다, 아예 심리학으로 관심을 옮겼습니다.

김환석 : 학생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까?

로즈 : 베트남 전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정책) 반대 운동에 참여했어요. 하지만 형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웃음)

마르크스에서 푸코로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1970년 런던 대학교(Institute of Education)에서 심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로즈 : 어린이를 가르치고 싶어서 교사로 훈련을 받았어요. 어린이 교육을 바꾸는 일이 사회를 바꾸는 길의 하나로 생각했지요. 1년간 환경 부적응 아동을 위한 학교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관심 속에서 어떻게 어린이에게 '비정상 아동', '부적응 아동' 딱지를 붙이는지를 놓고 연구를 진행했고, 그 주제로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아동 학대 예방 단체에서 3년간 일했지요. 그러다 런던 대학교(Institute of Education) 사회학과 박사 과정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저는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를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였어요. 그래서 이데올로기와 또 그것을 극복하는 문화 투쟁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서도 그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김환석 : 그 즈음에 <Ideology & Consciousness>를 창간했지요?

로즈 : 네, 작은 학술 잡지였어요. 알튀세르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잡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잡지 동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알튀세르와 같은 접근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푸코의 글을 번역해서 읽기 시작했어요. '통치성'에 대한 푸코 에세이의 첫 영어 번역이 실린 것도 이 학술지입니다.

김환석 : 어떤 이유로 알튀세르와 같은 접근에 거리를 두게 된 건가요?

로즈 : 박사 학위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관심은 알튀세르처럼 이데올로기 비판에 있었어요. 그런데 안토니오 그람시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이데올로기 개념으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없었어요. 예를 들어, 학교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심리학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감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런 질문에 이데올로기는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이데올로기는 항상 진실(truth)에 대비되는 거짓(false) 혹은 오류(error)에 집중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진실 대신 거짓을 믿는가? 그런 오류에 기반을 둔 그런 허위의식이 어떻게 확산되는가? 환영 밑의 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하지만 푸코를 읽으면서 이런 진실/거짓의 구분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왜 이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나? 무엇이 이것을 진실로 만들었나? 이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권력은 무엇인가? 이것을 진실이라고 말했을 때 그 효과는 무엇인가?

'오류의 문제'에서 '진실의 문제'로 관심이 바뀐 거예요. 그리고 이런 관심의 이동은 1984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 논문은 영국에서 심리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추적한 것입니다. 이듬해에 <The Psychological Complex>(1985년)로 출간됩니다. 이 책에 관심을 보인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요. (웃음)

당시만 하더라도 푸코의 이론이나 방법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거나 철학적으로 논의하는 연구는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활용한 연구는 영어권에서는 전무했어요. 이 책은 그것을 시도한 영국 최초의 연구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책을 시작으로 푸코의 이론과 방법을 적용한 여러 경험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합니다.

김환석 : 박사 학위 논문의 내용을 좀 더 소개하면요?

로즈 : 방금 '진실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얘기했잖아요? 영국과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권위(authority)의 획득은 국가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아요.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얘기할 때 권위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심리학이 그 하나의 예였어요. 심리학자는 인간에 대한 진실을 얘기한다고 믿어짐으로써 막강한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그렇듯이) 이들에게 '권력의 하수인'이나 혹은 '자본의 하수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들이 권력이나 자본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거짓 주장을 꾸며내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접근은 한계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들은 바보도 아니고 꾸미지도 않아요. 이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진실이며 고결하고 과학이라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심리학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진실이라고 믿게끔 하는 전제가 무엇인지 따져 묻는 게 필요합니다. 박사 학위 논문이 영국 심리학의 탄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었습니다. 1980년대는 계속해서 심리학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 <Inventing Ourselves>, <Governing the Soul> 등의 책들을 냈어요.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에 마르크스에서 푸코로 문제의식이 바뀌고 나서 계속 그걸 심화해 온 셈이군요.

로즈 : 맞아요. 마르크스에서 푸코로의 관심 변화가 현실에의 개입 의지가 약해졌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1970년대나 1980년대나 저나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들은 여전히 기존 사회 권력을 비판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아주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비판의 도구로서 마르크스나 알튀세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이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지금도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19세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걸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실의 저장고'가 아니에요. 그들이 자신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확인하고, 우리의 시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지요.

푸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푸코의 이론이나 방법이 당대의 자유주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하지만 푸코를 그대로 되뇌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활용할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당분간 사람들은 저를 '푸코디언(Foucauldian)'이라고 부를 테지만요. (웃음)

김환석 : 마르크스에서 푸코로의 이동은 '거대 이론'에 대한 회의 탓도 있지 않나요?

로즈 : 맞아요. 거대 이론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요. 거대 이론은 종종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자신의 틀에 맞춰서 설명하고 심지어 예측까지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설명과 예측에서 우리가 무슨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예를 들어, 지구화를 둘러싼 거대 이론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렇게 물어봅시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지구화요!" "그럼,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났나요?" "지구화요!"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신자유주의요!" "그럼,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났나요?" "당연히 신자유주의 때문이지요!" 이런 동어반복이 도대체 세상을 이해하는데 어떤 유의미한 통찰을 줄지 저는 의문이에요.

이제 어떤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따져 묻다 보면 작은 사건들이 다른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고 결합되며, 그 연결과 결합이 더 큰 규모의 변동을 어떻게 가능하게 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앤서니 기든스, 울리히 벡과 같은 동료의 연구가 흥미롭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과연 세상을 이해하는 적절한 설명을 제공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의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유럽을 넘어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전 세계 곳곳으로 확산될 수 있었을까요? "지구화!" 이렇게 답하고 나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그 구성 요소를 살피면 이 질문에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구성 요소는 훨씬 더 구체적으로 삶과 밀착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 개입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거대 이론의 설명 방식보다 푸코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아요.

김환석 :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거대 이론을 여전히 따르는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의 입장은 피상적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워 보입니다. (웃음)

로즈 : 맞아요. 저는 피상적인 사상가입니다. (웃음) 이것은 앞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회의하게 된 것과도 맞닿아 있지요. 마르크스주의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려면 그 심층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숨겨진' 법칙이 표면의 사건을 가능하게 한다는 발상이지요.

반면에 푸코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 자체에 주목하자고 강조합니다. 심층에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지 말고,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떻게 연결되어서 새로운 변화를 야기하는지를 보는 게 세상을 이해하는 좀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이었죠. 저 역시 그런 푸코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통치성에서 생명과학으로

김환석 : 푸코를 수용해서 기존의 사회과학을 혁신하려는 시도가 바로 통치성 연구입니다. 선생님은 1989년에 'History of the Present(현재의 역사)'라는 공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로즈 : 당시 저와 동료를 사로잡고 있었던 문제는 당시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 복지 국가에서 정치권력이 어떻게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스스로를 유지하는지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당시는 전통적인 복지 국가와는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정치권력(신자유주의)이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과제는 시급한 일이었어요.

'현재의 역사'는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해보려는 연구자들의 공부 모임이었습니다. 푸코의 이론이나 철학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푸코의 접근을 취해서) 구체적인 경험 연구를 진행하던 영국 곳곳의 연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런던에 모였습니다. 나중에는 외국 연구자도 참여해서 모임이 좀 더 국제적이 되었어요. 그 때부터 'History of the Present network'라고 불렀지요.

"현재의 역사"는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푸코는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과거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바로 '현재'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면서 이 표현을 사용했지요. 우리도 똑같은 문제의식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김환석 : 통치성 연구를 통해서 선생님이 강조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습니까?

로즈 : 한 사회의 권력관계가 유지되는 방식이 바로 푸코가 얘기한 통치성입니다. 저는 1980년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권력의 통치성에 '자유'가 핵심적인 요소임을 포착했습니다. 흔히 자유는 자동적으로 '해방'과 연결됩니다. 특히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은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모두 자유에 열광하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영국과 같은 자유주의 복지 사회에서 자유는 정치권력이 통치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그 사회 구성원이 자유의 이름으로 관리되고 지배받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저는 푸코가 던졌던 방식과 비슷한 질문을 자유를 상대로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예를 들자면 이런 질문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유라고 부르는가? 그런 자유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자유롭다고 여기고 살아가는가?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는 없는가?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게끔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게끔 하는 과정에서 지식 특히 전문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

마치 앞에서 '거짓의 문제'나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로 관심을 전환했던 것처럼, 이제는 '지배의 문제'나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로 관심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통치성 개념을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식에 당시만 하더라도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았어요. (웃음)

즉각 이런 반문이 따랐죠. "그럼 너는 영국에 사는 우리가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냐?" 이런 반응은 제 문제의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그런 당신은 왜 그렇게 자유에 집착하는가?" 혹은 "당신이 그렇게 충분히 자유롭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것이었지요.

(로즈는 1980년대 이후 영국의 대처 정부와 같은 정치권력이 득세한 시대를 흔히 통용되는 '신자유주의' 대신 '선진 자유주의(advanced liberal)'라고 부른다. 이런 선진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스스로의 삶을 관리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등장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로즈의 문제의식을 적용해 보자.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관리한다. 자기 계발에 나서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자신이 몸값을 높이지 못하거나 '혁신'에 성공하지 못한 탓이라면 스스로를 탓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나 기업(자본)은 강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가 역설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로즈의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책으로는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돌베개 펴냄), 한병철의 <피로 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가 있다.) (☞관련 기사 :
노무현 이명박 낳은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아프면 청춘, 견디면 직딩, '피로 사회'의 맨얼굴은?)

김환석 : '현재의 역사' 네트워크는 여전합니까?

로즈 : 통치성 연구의 역사를 간략히 언급할 필요가 있겠군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간 통치성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특히 런던정경대학(LSE) 교수 피터 밀러와 공동 작업을 진행했어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활용해 정치권력 일반에 대해서 분석을 시도한 논문('Political Power beyond the State')은 널리 알려졌어요.

통치성 개념은 구체적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강력하고 유용한 개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특히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젊은 연구자에게는 더욱더 그렇지요. 이런 이유 때문인지, '현재의 역사'의 멤버 혹은 다른 연구자에 의해서 통치성에 대한 수많은 논문이 생산되었고 그것이 제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Economy and Society>에 발표되었어요.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저나 밀러 모두 통치성 연구에 상당히 지치게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통치성 연구가 점차 반복적이고 창의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어요. 통치성 개념은 이것에 대한 통치, 저것에 대한 통치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유사하게 분석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1990년대 후반에는 통치성에 대해서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Powers of Freedom>(1999년)을 출간한 이후에는 더 이상 통치성 연구를 진행하기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현재의 역사' 네트워크에서도 더 이상 역할을 하지 않고 있고요. 현재로서는 '현재의 역사' 네트워크는 해체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프레시안(손문상)

'죽음의 생명 정치'에서 '삶의 생명 정치'로

김환석 : 선생님께서 새롭게 선택한 분야가 바로 생명과학과 그것에 기반을 둔 생의료(biomedicine)입니다. 2006년에는 <The Politics of Life Itself(생명 자체의 정치)>를 펴냈고요.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도 국민대학교 '생명공학의 새로운 정치와 윤리' 연구팀에서 주최한 워크숍 때문이고요.

로즈 : 화제를 바꾸기 전에 통치성 연구를 놓고서 한 가지만 덧붙일게요. 저는 많은 학자들이 한 사회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국가'에만 치중하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국가는 정치권력의 유일한 장소가 아니에요. 오히려 국가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권력의 효과로서 파악해야 합니다.

즉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여러 권력의 양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가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한다고 여겨져 온 심리학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시작해 정치권력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은 한 가지 예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국가를 정치권력의 유일한 혹은 최종적인 장소라고 보는 견해가 대세입니다.

아무튼 이런 불만 속에서 저는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이런 관심의 변화는 극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저로서는 자연스러운 관심 변화입니다. 통치성 연구에 지칠 무렵, 다시 아주 구체적인 경험 연구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다시 사회 곳곳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권력에 관심을 가지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저는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부터 계속해서 정신 의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던 당시에는 정신 병원(타비스톡 연구소)에서 일을 하기도 했었고, 친구 중에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푸코를 접할 무렵 읽은 논문 '광기와 문명'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정신 의학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정신 의학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더군요. 생물학적 정신 의학, 유전학적 정신 의학, 뇌 과학 등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물학적 사유 방식의 대두는 정신 의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범죄학 등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어요. '야,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주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생물학적 사유 방식을 이해하려면 생명과학 분야에서 무슨 일이 진행 중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저는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재직 중이었는데, '현재의 역사'와 비슷한 연구자 네트워크인 BIOS(The Study of Bioscience, Biomedicine, Biotechnology and Society)를 만들었어요.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이 새로운 연구에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생명 정치(biopolitics)'입니다. 이 개념 역시 푸코가 1970년대 후반에 고안했습니다. 사실 이 푸코의 생명 정치는 조르조 아감벤 등과 같은 이탈리아 철학자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목했지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같은 책은 한국에서도 유명합니다.

로즈 : 현대 생명과학과 의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푸코의 생명 정치 개념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감벤을 비롯해서) 이 개념에 주목한 이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존재했던 생명 정치에만 관심을 기울였어요. "추방" "절멸" "배제" "강제" "우생학" "수용소" 같은 단언들을 특징으로 하는 '죽음의 생명 정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치는 생명 정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생명 정치'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모든 사람을 위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의학이 담당하는 영역은 이제 질병 치료에서 건강관리로 바뀌었어요. 개인들은 건강을 관리하고, 생명을 연장하려고 합니다. 이런 욕망은 새로운 생명과학, 의료 기술 그리고 경제 활동을 자극하고 있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욕망은 새로운 주체화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여러 질환의 환자들이 결집해 정부, 기업, 과학자 공동체, 사회를 향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일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질환에 대한 투자, 자원, 연구, 치료법을 요구하지요. 저는 이런 새로운 주체화 과정을 (능동적인) '생물학적 시민권'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이런 생명/삶을 둘러싼 여러 관계가 비약적인 변화를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런 생명/삶을 둘러싼 권력 관계의 효과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이들이 이런 삶의 생명 정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이제는 생명 그 자체가 정치의 주제가 될 테니까요.

김환석 : 그런 문제의식에는 적극적으로 공감을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같은 입장은 자칫하면 현대 생명과학과 의료의 변화를 은연중에 긍정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로즈 : 기존의 인문·사회과학은 생명과학과 사회를 연결하려는 방식에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방금 지적한 대로 생명과학과 의료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으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었죠. 그래서인지 많은 인문·사회과학자는 생명과학과 의료의 변화를 놓고서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곤 했습니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생명과학과 그것의 결과로 나타난 의료의 변화에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우려가 과연 현실의 구체적인 내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에요. 혹시 20세기 초반 나치 독일이 우생학을 내세우면서 벌어졌던 참극의 기억을 현대 생명과학에 그대로 덧씌우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의심을 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식의 대응이야말로 지금 진행 중인 변화를 그냥 방치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과학과 그것을 이용한 의료 기술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그런 변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진지하게 숙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의 의미를 놓고서 진지하고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할 겁니다.

김환석 : 마지막 질문입니다. 아까 잠깐 능동적인 생물학적 시민권을 언급했습니다. 혹시 선생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바로 그런 부분에서 포착한 건가요?

로즈 : 사실 자신의 건강 상태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면서 전문가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는 그런 개인만 모여 사는 미래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 자칫하면 그런 미래가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들이 연대해서 공통의 목소리를 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둘러싼 권력 관계를 바꾸는 일이야말로 멋진 일 아닐까요? 이것이야말로 제가 지향하는 새로운 삶의 생명 정치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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