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are you from?"
"I'm from Korea."
"Korea? Which Korea?"
"South Korea."
"South Korea? Which one is it? The capitalist one or the socialist one?"
"The capitalist one. It's the Olympic Korea."
"Oh! The Olympic Korea! I know which one it is!"
1990년경 한 친지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올림픽 개최 전까지 한국에 대해 '큰 전쟁을 겪은 나라' 정도로밖에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많았다. 아직도 동아시아를 좀 아는 사람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It's somewhere between China and Japan" 정도 대답이 보통이다.
묘한 말이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일본 중간에 있다는 뜻에 겹쳐서 한국인의 성격, 또는 한국이란 나라의 성격이 중국과 일본 중간이라는 뜻을 담은 말이다. 개항기 이래 서양인의 한국 인식은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 어떤 점이 어느 쪽과 비슷하고 또 어떤 점이 어느 쪽과 다른가 살피는 방식으로 이뤄져 온 것이 보통이었다.
1910년 망국 때까지 조선에는 중국과 일본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서양인의 방문도 적었고 관심도 적었다. 식민지가 된 후에는 관심이 더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조선은 세계에서 제일 적게 알려져 있는 나라의 하나였다. 1948년에 나온 마크 게인의 <일본일기(Japan Diary)>에 담긴 일부 내용이 조선 사정을 소개하는 당시 서양 출판물로 가장 중요한 것일 정도였다.
1947년 가을 조선 문제가 유엔 총회에 상정되었을 때 투표권을 가진 회원국들은 조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남아있는 자료로 볼 때, 유엔에 제출되는 보고서 외에는 거의 아무런 정보 획득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외국인의 조선 인식은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았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면 일본에 대한 외부의 인식은 어떤 것이었던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미국인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인식을 검토하면서 그 인식의 연장선 위에서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인식을 그려본다.
진주만 폭격 이전에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은 조선에 대해서보다는 물론 훨씬 더 깊었지만 깊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범위는 넓지 않았다. 적대 관계 속에서 정형화된 일본인 비하가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민정 요원들이 이런 부정적 인식에서 벗어나게 할 필요를 느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지침서가 있었다고 한다.
전시에 감정이 최고조로 격해졌을 무렵에는, 일본인이란 밥 먹듯 배신하고 야만적이며 이상하리만치 잔인한 행동을 즐기고 광신적인 '원숭이 인간'이라고 여겼다.
난징 학살, 바탄 반도에서의 죽음의 행진 그리고 진주만 공격 등에서 보이듯 일본인은 개인으로서 또 집단으로서 매번 그러한 특성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끔찍한 잔학 행위를 자행한 일본인을 옹호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일본인을 원숭이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미국인이 집단 린치나 갱, 인종 폭동에 관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만큼, 일본인을 그러한 눈으로 보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 일본인에게는 다른 특성도 있다. 성실성, 창의성, 근면, 검소, 용기, 진취적 기상, 정직함 등이다. 성격, 성별, 연령, 사회적 지위, 소득 그리고 직업에 따라 예외가 있다 할지라도 평균의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이러한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패배를 껴안고>, 220~221쪽에서 재인용)
전쟁 중 만들어진 일본과 일본인의 부정적 이미지를 깨뜨리는 과제는 점령 초기부터 뚜렷이 세워졌다. 그런데 종래의 부정적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불식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둔군은 전쟁 책임을 소수 군국주의지도자들에게 몰아붙임으로써 병사들을 비롯한 일반 일본인에게 면책권을 주고자 했다. 1946년 초 육군부가 제작한 점령군 교육 영화 <일본에서의 우리의 과업>에 대해 다우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영화는 '지도자를 무조건 추종하도록 훈련된' 사람이라는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승자가 직면한 문제는 한마디로 표현이 가능하다. 일본인의 뇌가 문제인 것이다. (…) 영화는 일본인 남성의 측면 머리가 스크린에 크게 비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두개골을 가득 채운 스펀지 같은 뇌가 보이고 점차 확대되면서 스크린에는 거대한 뇌만 비치게 된다.
(…) "우리의 문제는 일본인의 머릿속에 든 뇌다."라고 내레이터가 담담하게 말을 시작한다. "일본에는 7000만 개의 뇌가 존재한다. 일본인의 뇌는 세상의 다른 뇌와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우리의 뇌와 똑같은 소재로 되어 있으며 우리의 뇌와 마찬가지로 착한 일도 할 수 있으며 나쁜 일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뇌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가 있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그 뒤로도 거대한 뇌는 몇 차례 더 영화에 등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 병사들에게는 일본의 장군과 군벌이야말로 이 뇌에 끔찍한 생각들을 집어넣은 존재라는 정보가 전달된다. (<패배를 껴안고>, 271~272쪽)
일본인을 '원숭이 인간'으로 보던 미국인들이 조선인을 그보다 나은 존재로 보았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일반 일본인을 세뇌당한 존재인 피해자로 보려고 애쓰는 미군에게는 조선인도 같은 세뇌를 당했던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뇌를 풀어주는 노력은 조선보다 일본에서 더 체계적-집중적으로 경주되었다. 일본인은 미국인의 교육을 받고나서 "나 세뇌 풀렸어요" 선언하고 민주시민으로 거듭날 기회를 가졌고, 조선인은 그러지 못했다.
'원숭이 인간'과 함께 경멸 담긴 일본인 관을 보여주는 말이 '말 잘 듣는 가축 떼'였다. 이것은 '구세대 지일파(old Japan hands)'의 관점이었다. 선교사나 외교관으로 일본에 체류한 서양인들이 보수적 엘리트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예컨대 1931년대에 일본 대사를 지낸 조지프 그루 국무차관이 종전 몇 달 전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천황제가 봉건제의 잔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일본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는 입헌군주제가 자리 잡는 것을 뿐 진정한 민주주의는 일본에서 결코 자리 잡을 수 없음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명확하다." (<패배를 껴안고>, 275쪽에서 재인용)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1946년)은 '말 잘 듣는 가축 떼'의 순응적인 특성을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설명한 것이다. 악마구니 같던 일본군이 부득이한 상황에서 포로가 된 후 대부분이 선량한 포로 노릇을 하게 되는 사례가 이런 관점을 뒷받침해 줬다. 이 관점은 일본의 민주화 재건 정책의 바탕이 되었다.
일본인의 순응적 특성이 미군의 점령 초기에 극적으로 나타난 일이 있다. '맥아더 숭배' 현상이었다. 대다수 일본인은 점령군 사령관을 '외국인 천황'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맥아더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편지는 점령 첫 해에 가장 많은 양이 배달되었는데, 당시의 우편물 접수 대장은 SCAP(연합군최고사령부)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1946년 9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연합국 번역통역반(ATIS)에서 44만1161통의 편지와 엽서를 읽고 처리했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다. 발신인의 신분은 다양했으며 영어로 씌어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본어였다. 대부분의 발신자들은 이름을 밝히고 자신의 심경을 열심히 토로했다.
이 중에서 눈길을 끄는 편지들을 편집하고 분석한 소데이 린지로 교수는 일본 성인 인구의 약 0.75퍼센트가 자발적으로 편지와 엽서를 보낸 셈이며,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이와 같은 교류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최고 사령관의 심경을 고려한 부하들의 검열을 거친 편지들은 맥아더의 허영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맥아더에 대한 존경심과 그의 관대함에 대한 감사의 말들로 가득했다. 편지의 발신인은 백아더 장군의 '신령님 같은 자비'를 찬양하고, 그를 '살아있는 구세주'라 불렀다. 아오모리 현의 한 노인은 "예전에는 아침저녁으로 천왕 폐하의 초상을 신처럼 모셨습니다만 지금은 맥아더 장군님의 사진을 향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 그들에게 맥아더는 한 시대의 위대한 사랑의 화신이었다. 맥아더 최고 사령관은 그에게서 뿜어나오는 위광에서는 천황과 같은 존재였지만 천황보다 친근하고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패배를 껴안고>, 290쪽)
57개월에 걸쳐 44만여 통이면 한 달에 평균 약 8000통. 점령 초기에 제일 많았다고 하니 한 달에 1만 통 넘게 쏟아져 들어온 모양이다. 이 편지의 번역 작업에 동원되었던 오키나와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이 이 편지들을 읽으며 일본인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 증언도 소개되어 있지만,(<패배를 껴안고>, 294~295쪽) 이런 편지를 많은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썼다는 사실은 일본의 장래를 위해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자기네가 어떤 사람들인지 점령군에게 잘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
남조선에서는 이와 비교할 만한 대대적 주민 의사 전달이 없었다. 군정청은 주민 의견 파악을 위해 여론 조사를 수시로 실시했지만 유치한 수준이었다. 여론 조사는 1946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제일 자주 시행되었는데, 대부분 길거리에서 행인 수백 명 내지 수천 명을 대상으로 하는 몰 인터뷰(mall interview) 방식이었다. 이에 대해 전상인은 "피면접자들의 대표성도 의심스럽거니와 면접의 절차와 분위기가 과연 정확한 민심의 소재를 밝혀낼 정도로 적절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고개 숙인 수정주의>(전통과현대 펴냄), 14쪽)
맥아더는 점령을 앞두고 일본과 조선에 극히 위압적인 '포고령'을 내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실제 점령을 시작한 후 포고령의 경직성이 실제 적용에서 차츰 완화되었는데, 조선에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의 인천 상륙 때 환영 인파는 자발적인 모임이었다. 이 인파를 향해 일본 경찰이 발포해서 사상자가 났는데, 미군정은 경찰을 옹호했다. 그리고 '맥아더 포고령'은 1947년 여름의 좌익 탄압 때까지도 극히 억압적인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우익의 반탁 운동과 민중 및 좌익의 저항 운동으로 조선인의 집단행동은 국한되게 되었고, 다양한 의견의 자발적 개진을 위한 기회를 남조선 주민들은 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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