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기획재정부 국고국 사무관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신재민 전 사무관은 지난달 29일부터 유튜브와 고려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고파스' 등을 통해 기획재정부 근무 시절 경험을 공개했다.
기획재정부는 "공무원이었던 자가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며 신 전 사무관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신 전 사무관의 폭로 내용 가운데는 담당 업무와 무관한 자료를 임의로 빼돌린 것도 있어서, 기획재정부는 강경한 입장이다. 신 전 사무관은 2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공익신고에 대한 탄압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그는 앞서 공개한 유튜브 동영상에서 자신도 최순실 사태 당시 촛불을 들었다고 밝혔다. 수구 세력을 이롭게 하는 등 정치적 동기와는 무관한 폭로였다고 강조했다.
사장 선임 개입 의혹 : KT&G와 서울신문의 닮은 점과 다른 점
그가 공개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정부가 민간 기업인 KT&G 및 서울신문 사장을 교체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청와대가 정치적 이유로 '분식 재정'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국채 발행을 요구했고 1조 원 규모의 국채 매입(바이백)을 갑작스레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내용이다.
기획재정부는 IBK기업은행의 대주주다. 그리고 IBK기업은행은 KT&G 지분 가운데 7.5%를 갖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KT&G 측에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근거가 있다. IBK기업은행과 국민연금은 백복인 현 KT&G 대표이사의 연임을 반대했다. 그 배경에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다는 게 신 전 사무관의 폭로다. 그러나 백복인 KT&G 대표이사는 IBK기업은행과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임에 성공했다. 또 정부가 주주로서의 권리를 아예 행사하지 말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굳이 세금으로 기업 주식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 정부가 주식을 보유하기만 할 뿐,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무책임하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다.
서울신문은 기획재정부가 약 34% 지분을 가진 대주주다. 따라서 정부가 마음대로 사장을 고를 수 있다. 실제로 고광헌 전 한겨레 대표이사가 최근 서울신문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청와대의 뜻이 그대로 관철됐다는 게 신 전 사무관의 폭로다. 이 경우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언론 산업의 특수성 때문이다. 정부가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언론이라고 해도, 독립성은 보장돼야 한다. 대주주가 언론사 내부 구성원의 뜻과 무관하게 대표이사를 정하는 관행은, '촛불' 이후의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박근혜 정부의 초과세수를 어떻게 봐야 하나
복잡한 논란을 낳는 대목은 두 번째다. 박근혜 정부는 각종 비과세 항목을 축소해서 10대 대기업 실효세율을 약 2.1% 올렸다. 여기에 담뱃세까지 올렸다. 그런데 재정 집행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초과세수가 발생했고, 이는 현 정부로 이월되거나 국채 매입(정부 빚을 갚았다는 뜻)에 사용됐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가 재정 집행 규모를 키우면, 보수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사기 쉽다. 보수 진영은 대체로 '재정 건전성'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편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박근혜 정부는 재정을 극도로 아꼈는데, 문재인 정부가 마구 퍼서 썼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이런 부담 때문에 현 정부가 인위적으로 지난 정부의 재정 건전성 관련 지표를 악화하려 했다는 게 신 전 사무관의 주장이다.
신 전 사무관은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이 적자 국채 발행이 가능한 최대 규모를 8조7000억 원이 아닌 4조 원으로 보고했다가 김동연 전 부총리에게 질책을 들었고, 그 배경에 대해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핵심은 2017년 국가채무비율을 덜 떨어뜨리는 겁니다"라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국채 발행 없었고, 국채 매입 취소 충격은 미미했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는 추가적인 국채 발행이 없었다고 밝혔다. 4조 원대 국채를 추가로 발행해도,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고작 0.2%포인트 증가하는데 그친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요컨대 적자 국채 발행을 놓고 정부 안에서 논쟁이 있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설령 실행했다고 해도, 정치적 효과는 미미했다는 게 기획재정부의 설명이다.
신 전 사무관의 폭로 가운데는 현 정부가 갑작스레 국채 매입을 취소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는 사실이다. 기획재정부는 2017년 11월 3일 1조5000억 원을 시작으로 같은 달 15일과 22일에 각각 1조 원씩 국채를 매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채 매입 하루 전인 2017년 11월 14일 갑작스레 취소했다. 신 전 사무관은 이 때문에 국채 금리가 출렁이고 시장에 충격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충격이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취소 결정 직후, 국고채 3~10년 물 금리는 3bp(0.03%포인트) 이상 변동했다. 그러나 곧 회복했다.
'긴축' 주도한 기획재정부 국고국
논란이 복잡해지는 까닭은, 신 전 사무관이 재직했던 기획재정부 국고국의 역할 때문이다. 세수 추계까지 담당하는데, 현 정부 출범 이후 매년 크게 엇나갔다. 실제 세수보다 수십조 원씩 적게 예상했다. 올해 초 발표될 2018년도 세수 역시 실제보다 크게 미달하리라는 게 일반적 예측이다.
이는 사실상 긴축 재정으로 이어졌다. 국회예산처 사업평가국장 출신인 조영철 고려대학교 초빙교수에 따르면, 2018년 정부 예산의 재정충격지수는 '–0.09'였다. 재정충격지수가 마이너스라는 건, 긴축 재정을 했다는 뜻이다.
신 전 사무관의 폭로에서 드러난 사실은, 그를 포함한 재정 관료들이 재정 확대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 전 사무관의 폭로대로, 청와대가 국채 추가 발행을 실제로 요구했다면, 이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있다. 신 전 사무관, 그리고 보수 진영의 해석처럼, 현 정부가 정치적 부담 때문에 지난 정부의 재정 건전성 지표를 인위적으로 악화하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청와대가 실제로 확대 재정을 계획했고, 지난 정부가 넘겨준 초과 세수로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국채를 추가 발행하려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현 정부가 출범 초기에 내세운 정책들은 모두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소득주도 성장은 최저임금 인상만 포함한 정책이 아니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충격을 완화할 사회안전망 강화 등이 담겨 있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역시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신재민 주장대로 됐다
이런 정책을 부작용이 적은 방식으로 추진하려면, 초과 세수로도 부족하므로, 세금을 늘리거나 국채를 발행할 필요가 있었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증세에 부정적이었으므로, 청와대 참모들이 국채 추가 발행을 추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채 추가 발행은 이뤄지지 않았고, 현 정부 역시 지난 정부와 마찬가지로 사실상의 긴축 재정을 했다. 매년 수십조 원대 세금을 남기고 있다. 신 전 사무관의 동료였던 재정 관료들의 역할이 작용했다.
이는 재정의 뒷받침이 필요한 정책이 제 구실을 못하게끔 했고, 사회안전망 확대 관련 공약이 대부분 불안정한 상태에 그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반면, 대기업에게 유리한 규제 완화 조치만 속도를 내고 있다.
경기 하강 국면에서, 금리를 낮출 수도 없고(오히려 금리 인상 압력이 있다), 재정을 대폭 확대할 수도 없다면, 대기업의 투자를 독려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 전 사무관의 폭로는 이런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재정 관료들은 정부가 지금보다 더 큰 역할을 하기(재정을 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청와대 참모들 역시 이런 관료들과 타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 전 사무관의 폭로에 대한 정부의 해명이 뜻하는 바가 그렇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초과 세수로 국채를 매입했다고(나라 빚을 갚았다고) 자랑했다. 사실상 신 전 사무관의 프레임을 지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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