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출퇴근 시간'에 달려있다

[이관후 칼럼]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하여

지난 8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의 김윤철 교수가 한 칼럼에서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마지노선 민주주의'. 지난 촛불을 2차 대전 직전 프랑스군이 독일에 대항해 구축했던 만리장성 같은 길고 긴 방어선인 마지노선에 빗댄 것입니다. (☞칼럼 바로 가기)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쁜 대통령을 유권자의 투표로 심판하기 위해서 촛불을 드는 방어적 성격의 민주주의다. (…) 대통령 심판의 권리를 양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쟁취 및 수호의 경계로 삼고,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과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은 삶의 현장에서 각자 맞서 싸우거나 적응해야 할 사적인 문제라 여기는 민주주의다."

9월에는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장석준 위원이 이 개념에 호응했습니다. (☞칼럼 바로 가기)

"대통령을 바꾼 뒤에 시민들은 예전처럼 수동적 방관자로 돌아선다. 관심을 놓지 않는다 하더라도 새 대통령을 응원하는 정도다. 개혁의 무거운 책무는 모두 새 대통령의 몫이 된다. 탄핵을 요구하던 만큼의 열기로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은 손에 꼽을 정도다. 노도와 같던 민주주의는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기만 하다. 안타깝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것이 촛불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딱 들어맞는 묘사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는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주권과 헌법의 수호라는 기본 원리와 법적 정당성이라는 절차적 정당성의 요소에서 각기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할 때 작동하는 장치처럼 보입니다.

김윤철 교수가 이러한 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면, 장 위원은 그것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했습니다. 마지노선이라는 황당무계한 방어 작전의 문제점은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 프랑스군이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최소한의 방어선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종잇장처럼 긴 방어선을 펴고 있던 프랑스군은 중앙돌파를 당한 뒤에 손쉽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핵심 거점에서의 필수적인 전투들을 회피한 대가였습니다.

장위원은 그래서 촛불 이후에 나타날 불가피한 전투를 외면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촛불 이후에 열린 전장들은 안개 속이다. 주로 경제, 사회 개혁의 전장들이다. (…) 탄핵 직후에 제2의 노동자 대투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약속한 개헌 일정이 있다. 개헌 토론이 그나마 새 국면을 열 기회가 될 수 있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 경제와 노동, 민주주의와 같은 의제를 개헌이라는 장에서 이야기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촛불과 '주말이 없는 삶'

문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 전투를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투는 87년 민주화나 2017년 촛불처럼 호쾌하거나 장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매일 반복되는 실로 지긋지긋한 일입니다. 더 절망스러운 사실은, 민주화 이후의 어느 정권도 이 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개혁은 언제나 시장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개헌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이슈에서도 시민들은 촛불에서처럼 열심을 갖고 나서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나은 정치의 가능성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이 시민들이 쉽사리 움직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마지노선 민주주의 특징이 있습니다. '마지노선'이 일정한 원심력을 갖고 있어서 민주주의가 어떤 기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으로부터 상승하려는 힘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헌정원리와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외한 모든 사회적, 경제적인 공적 사안을 사적인 개인의 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노선은 양날의 칼인 셈이지요. 저는 이 현상의 원인을 촛불과 몇 해 전 유행했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용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촛불이 87년과 현상적으로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일상이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직 대통령을 쫒아내기는 했지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촛불이 주중에도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주말에 자신들의 여가를 활용해 광장에 나왔습니다.

촛불 광장은 말 그대로 사적인 시공간을 희생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최소한의 국민주권을 발휘하기 위해 기꺼이 '주말이 없는 삶'을 받아들인 셈이지요. 그리고 문제는 이들이 주중에는 늘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장에 나올 수 없었던, 이미 '주말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많았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민주주의는 야근과 출퇴근 시간에 달려있다

우리에게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삶이 지속되는 것이고, 그 삶에서 더 많은 자유시간, 바로 '여가'를 갖는 것입니다.

촛불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찬양하는 아테네 민주주의는 '여가' 없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전체주의 정권이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 바로 '여가'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의 적나라한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가' 없이 민주주의 없습니다. 여가는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정보를 얻게 하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생략된 상황에서 위로부터 던져지는 민주주의는 환상입니다.

마을만들기 '사업'과 주민참여예산 '제도'를 한다고 해서 '여가'가 없는 보통의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민주주의는 사업과 제도로 출현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사업과 제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국민주권이나 헌정의 수호만큼의 가치가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래서 지금 추진되고 있는 많은 풀뿌리 민주주의 사업과 제도가 '자영업자'와 '주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민주주의가 마지노선을 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여가를 확보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야근은 5일 중에서 절반인 2.5일, 시간은 평균 2시간 30분입니다. 그래봐야 밤 10시에 퇴근하면, 집에 바로 가는 게 아닙니다. 회식이 있고, 출퇴근 시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직장인이 출퇴근에 쓰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 41분입니다. 한국에서 아버지들이 자녀와 갖는 시간은 하루에 6분입니다. 야근을 줄이지 못하고, 출퇴근 시간을 줄이지 못하면 우리에게 더 많은 민주주의, 마지노선을 넘어서는 민주주의는 어렵습니다.

성장과 경쟁이 중심이 된 삶을 여가 위주의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미 새로운 세대는 그러한 삶의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망제작소>에서 수행한 '좋은 일, 공정한 노동' 프로젝트에 따르면, 많은 젊은이들이 임금(12%)이나 고용안정(16%)보다 근로조건(48%)을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꼽았습니다.

근로조건의 내용은 주 40시간 이하의 야근 없는 적절한 근로시간, 강제 회식이 없는 개인 삶의 존중, 육아와 같은 사적인 문제를 대비할 수 있는 탄력적인 근무 환경이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직장과 노동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성장 시대에 우리의 미래는 더 적은 노동과 더 많은 여가에서 얻는 삶의 가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에 달려 있고, 젊은이들의 지향은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세계는 이미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고성장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노동은 줄어들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민주주의는 삶의 질적인 변화와 함께 올 것입니다.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더 많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나를 발견하고, 가족과 이웃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삶이 우리 앞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정치를 요구할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이후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을 더 많은 민주주의로 담아낼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전히 '사업'과 '제도' 중심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가시적인 눈앞의 성과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긴 안목이 더욱 필요합니다. 지속되는 삶을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서, 야근과 출퇴근 시간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를 국가가 고민할 때입니다.

내년은 지방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촛불 이후의 새로운 정치인들이 새로운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선도함으로써,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민주주의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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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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