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새 정치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2017.08.06 11:00:55
[유라시아 견문] 베오그라드 : 제국의 추억

1. 호텔 모스크바

아침 8시면 호텔 모스크바로 향했다. 1층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간이다. 12시까지 꼬박 네 시간을 보냈다. 두어 시간은 내 글을 쓰고, 두어 시간은 남 글을 읽었다. 아메리카노와 터키식 커피를 번갈아 마시며 두 시간씩 버틴 셈이다. 4성급 호텔이다. 숙박료가 만만치 않아 이틀만 묶었다. 사흘째부터는 카페만 찾았다. 유서가 깊은 호텔이다. 1906년에 문을 열었으니 백년을 넘는다. 그저 오래된 곳이기만 하다면 매일같이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물렀던 사람들이 남다르다. 아인슈타인부터 막심 고리키, 히치콕과 로만 폴란스키까지 면면이 굉장하다. 카다피와 인디라 간디, 아라파트와 닉슨도 방문했다. 전시실의 방문객 사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에게 각별했던 인물은 트로츠키와 존 리드이다. 새파란 시절, 열독했던 저자들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두 사람 모두 이곳에 머물렀다. 당시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최대 일간지의 특파원 신분이었다. 호텔 모스크바에서 두 차례 발칸전쟁을 목도하고 보도했다. 당시 베오그라드의 유일한 고급호텔인데다, 위치 또한 탁월하다. 발칸대로를 따라 길을 건너면 칼레메그단 숲이 지척이다. 독일 평원에서 흑해까지 흘러가는 다뉴브 강과 발칸의 사바 강이 합류하는 명당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이른 아침에는 공원을 산보했고, 저녁에는 야경이 아름다운 강가를 산책했다. 곳곳에서 로마제국부터 비잔티움제국, 오스만제국의 흔적을 간취할 수 있다. 18~19세기 이 강과 숲을 경계로 동과 서가 나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끝나는 곳이자, 오스만 제국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허나 트로츠키는 이 장소 특유의 변경성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신경은 온통 당대에 쏠려 있었다. 급박한 정세 변화에 몰두했다. 과연 전쟁과 혁명은 불가분이다.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러시아혁명에 투신한다. 1942년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암살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 호텔 모스크바. ⓒ이병한


존 리드가 호텔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은 트로츠키가 떠나고 난 1915년이다. 대서양 건너 미국 출신의 젊은 언론인이었다. 하버드 재학 시절부터 필치로 이름을 날렸다. 수영도 잘하고 시도 쓰고 곡도 붙이는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삼았다. 데스크에서의 정보 수집보다는 르포르타주에 강한 현장파였다.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먼저 달려한 곳이 멕시코이다. 1913년 멕시코 혁명 보도로 명성을 쌓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으로 장소를 옮겼다. 유럽서도 파리나 런던에만 머물지 않았다. 전시 보도 통제로 갑갑증을 참지 못하고 발칸으로 떠난다. 1915년 1년을 꼬박 동유럽을 유랑한다. 그래서 발간한 책이 < The War in the Eastern Europe >이다. 킨들 버전으로 99센트, 채 1달러도 되지 않는 가격이다. 그러나 알토란이다. 99달러를 지불해도 아깝지 않은 책이다. 1916년에 나왔건만 100년 후의 발칸과 동유럽을 돌아다니며 나침반으로 삼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도처에서 그는 이곳에서 무슨 기록을 남겼던가 거듭 챙겨 살펴 읽었다. 


존 리드는 동유럽 너머 모스크바까지 다다른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세계를 바꾼 열흘>이다. 레닌도 만나고 트로츠키와도 조우한다. '호텔 모스크바'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통탄스러운 것은 1920년 서른 넷에 숨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병사라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멕시코부터 러시아까지 무리한 여정과 맹렬한 집필로 몸이 크게 상한 모양이다. 그가 세계대공황과 히틀러와 스탈린의 등장과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지켜보며 산출했을 주옥같은 책들을 상상하노라니 마음이 쓰라리다. 안타까운 재주이다. 아메리카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 묻힌 그의 묘소를 찾아 절을 올렸다. 


1906년 베오그라드에 들어선 호텔 이름이 '모스크바'였다는 점부터 의미심장하다. '호텔 이스탄불'도 아니고 '호텔 빈'도 아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고양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과는 멀어지고 있었고, 합스부르크제국과는 갈등하고 있었다. 


▲ 베오그라드에 있는 세계 최대의 정교회 성당. ⓒ이병한


베오그라드가 지향한 것은 정교회대국 러시아제국이다. 이슬람제국과 가톨릭제국과 러시아제국이 발칸에서 경합하고 있던 것이다. 헌데 트로츠키의 기고문에는 이런 정황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계급, 국가, 민족 등 사회과학적 접근이 다분하다. 유물론자 특유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라 하겠다. 하건만 100년 만에 다시 읽노라니 겉핡기에 그쳤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강산과 산하가 말소되어 있다. '장소의 혼'이 거세되어 있다. 


존 리드의 저서가 빼어난 것은 역사와 종교, 나아가 신화까지 아울러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만으로는 20세기 전반기 서유라시아의 천하대란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는 발칸전쟁과 1차 대전 속에서도 1500년 전, 동서 교회의 분열을 착목했다. 바티칸을 우주의 배꼽으로 삼는 서유럽과 콘스탄티노플을 '제2의 로마'로 여기는 정교회의 분화가 발칸의 20세기를 날카롭게 가르고 있었다. 보스니아까지가 서로마의 영역이었고, 세르비아부터는 동로마의 강역이었다. 서유럽의 500년 된 신/구교 분열보다 더욱 깊은 것이 1500년 전 동/서 교회의 분화이다. 라틴어와 가톨릭이 서구의 고갱이라면, 그리스어와 정교회는 동구의 정수이다. 장차 베오그라드는 '제3의 로마', 모스크바에 근접할 것이다. 향후 발칸에 등장하는 유고슬라비아왕국과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의 행보까지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아니 유고 붕괴 이후 가톨릭국가와 이슬람국가와 정교회국가들이 제각기 '민족주의'로 찢어지는 1990년대의 핵분열까지 꿰차고 있었다. 짜릿한 지성이다. 사이다 같은 직관이다.


▲ 베오그라드의 다뉴브 강. 동서유럽을 관통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이병한


2. 발칸의 체 게바라

두어 달 발칸 견문의 거점으로 베오그라드를 삼은 것은 세르비아의 수도라서가 아니다.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다. 티토가 머물렀던 곳이다. 1961년 비동맹회의가 처음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석박사 논문의 영감을 반둥에서 구했던 나로서는 베오그라드 또한 각별한 관심이 쏠렸다. 애틋한 애정이 솟아나는 곳이다. 태국의 고산 마을에서 견문을 시작한 초기부터 냉전을 거스르며 독자노선을 개척했던 티토에 대한 헌사를 한 꼭지 꼭 쓰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20세기의 거인 가운데 유독 덜 알려져 있음이 안타까웠다. 유고의 해체와 함께 티토 또한 망각되고 있음이 아쉬웠다. 


▲ 1960년 나세르와 티토.ⓒwikipedia


그런데 현지에서는 달랐다. 뜻하지 않게 머무는 동안 세르비아 대선이 한창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보다 더 눈에 띈 것은 20대의 무소속 청년 후보였다. 유고가 해체되는 1990년대에 태어난 친구이다. 헌데도 보수-진보 양당제를 돌파하는 '새 정치'의 방편으로 유고와 티토를 환기하는 것이다. '신유고주의'를 주창하고, '네오티토주의'를 표방했다. 'NATO는 가고, TITO는 오라!'는 구호 또한 참신했다. 최종 결과는 10%에 조금 못 미치는 득표율로 3위에 그쳤다. 그러나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인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새싹이다. 어떻게 성장할지, 어디까지 다다를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겠다. 


세르비아만도 아니었다. 주변나라와 이웃도시까지 티토는 이미 잘 팔리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티토와 보냈던 유고 시대를 황금시절로 회상한다. 투박했지만 정직하고 정감이 넘쳤던 시대이다. 유고가 붕괴하면서 잘난 사람들만 더 잘나가는 격차사회가 도래하고 말았다. 모자라는 사람이 여유로운 사람에게 기대는 것을 나무라고 타박했다. 잘 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감싸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이웃은 더 이상 동무가 아니었고, 동료들 또한 더는 동지가 아니었다. 삭막하고 각박해졌다. 더 바빠지고, 더욱 불안해졌다. 티토 시절에는 인간미가 넘쳤고, 스트레스는 덜했다. 그래서 흉마저 감싼다. 가난한 농민 출신에서 세계적인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티토는 다른 한편으로 쾌락을 탐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새 옷 사기를 좋아하고, 새 여자 또한 무지 밝혔다. 사생활이 복잡하다. 여기저기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혼외 자식도 여럿이다. 그런데도 밉상이 아닌 모양이다. 반듯하게 본받을 귀감은 아니지만,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폼생폼사, 로맨티스트였다. 사적으로는 마초이자 상남자였고, 공적으로는 스트롱맨이자 포퓰리스트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티토의 사후에 태어난 1980년 이후 세대도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기폭제가 되었다. '1989년 체제'의 시대정신, 자유화-민주화-유럽화-세계화에 회의감이 퍼져갔다. 이러려고 유고를 해체시켰던가, 자괴감이 번져갔다. 노동자 집회에서도, 학생 시위에서도 티토의 사진과 유고의 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최후의 발칸인', '진정한 발칸인'으로 티토를 기렸다. 티토의 초상화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고향인 (크로아티아의) 쿰로벡(Kumrovec)부터 빨치산 투쟁의 근거지였던 (보스니아의) 비하크(Bihac)를 거쳐 유고연방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까지 순례하는 '레드 투어'가 유행한다. 여행의 경로가 보여주는 것처럼 발칸의 신청년들은 지도상에서 사라진 '유고'를 복기하고 있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으로 갈라진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왕년의 티토처럼 회합하고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 크로아티아의 티토 생가. ⓒ이병한



이 독특한 사회 현상에 시장 또한 기민하게 반응했다. 자그레브에 본부를 두고 있는 한 생수 회사는 'Titov Izvor'를 출시하여 대박을 쳤다고 한다. 어른들은 어르신대로 청량감을 만끽하고, 청년들은 청년대로 갈증을 해소한다. 티토의 생일날에는 구유고의 주요 도시 클럽마다 '티토 페스티벌'도 열린다고 했다. 유고 시절의 복고풍 음악을 들으며 춤추고 노래하며 마시는 축제날이 된 것이다. 클럽들이 모여 있는 자그레브의 뒷골목 담벼락에는 "We want TITO, not the EU."라는 그래피티도 그려져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피곤함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고단함이 거듭 티토와 유고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 티토 만세_ 담장 낙서(구유고 도시 골목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병한


과연 유고 시절이 황금기였던가? 사료를 들이밀며 고치고치 따지다가는 아재 취급받기 십상이다. 19세기형 역사학의 과학성과 객관성을 맹종하는 꼰대로 전락한다. 과거는 해석의 전장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시 쓰는 창작물이다. 내일을 사는 이들은 오늘과는 전혀 다른 과거사를 창조해낼 것이다. 고로 티토/유고 열풍이 과거 회귀나 반동을 뜻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도래할 미래에 미리 건네는 인사로 접수해야 한다. "Tito is Alive"라는 머그잔 로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0세기에 결박된 인물이 아니다. 현재에 속하면서 미래를 함께 만들어간다. 혼자 추억하면 노스텔지어이지만, 다함께 추모하면 유토피아의 원동력이 된다. 고로 역사는 인과법칙을 따지는 과학을 초월한다. 주관적이며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다. 더 나은 체제를 갈망하고, 더 좋은 지도자를 갈급하며, 더 따듯한 사회를 갈애하는 미래의 반전을 예비한다. 과연 널리 환기되고 있는 티토의 이미지 또한 대통령 시절이 아니었다. 빨치산의 대장이었던 1940년대 초반의 티토이다. '발칸의 체 게바라', '유고의 체', 전설의 영웅을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 1943년 빨치산 시절의 티토. ⓒwikipedia


3. 발칸의 대장정

나로서는 체보다는 마오가 연상된다. 티토는 1893년 마오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나서, 1980년 4년 더 살다 죽었다. 동세대인이다. 더욱이 경험마저 흡사했다. 빨치산 항쟁의 근거지였던 비하크에서 연상되는 곳 또한 동시대 동아시아의 해방구 연안이었다. 중국공산당이 소련을 추종하는 지식인 정당으로 도시 봉기에 거듭 실패하다 대장정을 통하여 대중정당으로 거듭났던 것처럼, 유고공산당 또한 발칸의 산악 지대를 전전하며 토착화되어 갔다. 자그레브 대학이나 베오그라드 대학 등 발칸의 명문대학 출신 엘리트 당원들은 책 읽고 논쟁하는데 능한 입진보가 많았다. 런던과 파리의 좌파 지식인들과 세계관을 공유했지, 발칸의 농민들과는 딴 세상 사람들이었다. 민중의 거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하품을 하고 계급투쟁에 딴청을 피웠다. 국왕에 충성하고 교회에서 회개하며 가족의 안전과 농토의 보위를 으뜸으로 쳤다. 전쟁과 혁명의 동시 수행을 위해서는 '인민 속으로', 군중노선이 절실했다. 중국공산당이 농민과 결합하면서 마오가 리더십을 발휘한 것처럼, 발칸적 공산당으로 전변하면서 티토가 부상했던 것이다. 변방에서 중원으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 또한 빼닮았다. 발칸의 험준한 산세가 게릴라의 자연 요새가 되어준 반면으로, 8월에도 고산병과 추위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둠이 내리깔리면 으르릉 거리는 늑대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중일전쟁 속에서 국공내전이 전개된 것처럼, 독소전쟁 속에서는 발칸내전이 진행되었다.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서유라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육박전을 벌이고 있을 때, 발칸 반도에서는 통합파와 독립파 간 내전이 치열했다. 독일의 힘에 기대어 대(大)크로아티아를 만들고자 하는 세력도 있었고, 소련의 지원 아래 대(大)세르비아를 이루고자 하는 진영도 있었다. 티토는 끝내 유고슬라비아, 남슬라비아인의 대일통을 추구하는 통합파의 좌장이었다. 통합파 간에도 경쟁이 있었으니, 우파들은 연합국에 의존하여 유고슬라비아왕국의 존속을 추구했고, 좌파들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혁명을 추진했다. 


난마처럼 전선이 얽힌 어지러운 시대,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 독소전쟁과 발칸전쟁의 이중전쟁 속에서 티토는 독보적인 지도력을 발휘한다. 독일에 맞서 스스로 싸워 이겼다. 사라예보도, 베오그라드도, 자그레브도 자력으로 해방시켰다. 그래서 소련의 입김이 미치지 못했다. 유고슬라비아는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위성국들과 위상을 전혀 달리했다. 소련이 이식한 속국이 아니었다. 자력갱생에 성공한 토착파 공산당이었다. 그래서 서방과 소련에도 맞짱을 뜰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이 원한 것은 왕정파들과의 연합정권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국왕을 통하여 티토를 견제하고자 했다. 단박에 제안을 걷어찬 티토는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나아가 그리스 내전까지 개입하고자 했다. 여차하면 발칸반도 전체의 연방을 추진할 기세였다. 화들짝 놀란 것은 스탈린이다. 그리스 내전에 미국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미국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처칠이 나눈 대화를 보노라면, 발칸을 자잘한 소국들로 나누는 방안에 합의했던 바이다. 그래서 서구와 동구의 완충지대로 발칸반도를 삼으려 했다. 북중국의 베이징은 마오가, 남중국의 난징은 장제스가 다스리는 중국의 남북분단을 획책했던 것과도 유사한 발상이다. 남/북베트남, 남한/북조선의 분단과도 무연치 않을 것이다. 


마오가 중국분단을 거부하고 장강 이하로 남진해 갔던 것처럼, 티토는 영미와 소련의 뜻을 거스르며 유고 통합을 견지했다. 건국에서부터 이미 비동맹노선의 맹아가 역력했던 것이다. 도둑처럼 온 해방이 아니었음으로 내정에서도 소련과 다른 길을 걷는다. 노동자 자주관리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실험을 전개한다. NATO에 편입되지 않을뿐더러, 바르샤바 조약기구에도 조인하지 않음으로써 군사적 주권을 확보했다. 군사주권이 체제의 유연성도 보장했다. 시장이냐 국가냐,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강박적인 이분법에서 탈피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원조가 바로 유고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베트남의 도이모이보다 훨씬 일렀다. 그리하여 유고는 냉전기 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국가였다. 1950~80년대 세계에서 가장 성장률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50년대 폴란드와 헝가리가 소련에 반기를 들었을 때, 1960년대 체코에서 반소련 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도 티토와 유고를 모델로 삼았다. 한때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좌파 정당들도 유고슬라비아 노선을 진지하게 학습했다. 야심차게 아랍연합공화국을 추진했던 이집트의 나세르에게도, 남/북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의 인도차이나연방을 구상하던 베트남 공산당에게도 유고슬라비아는 영감을 선사했다. 반면으로 소련에는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동유럽과 아랍과 동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유고화/티토화에 노심초사했다. 1960년대 중소논쟁을 벌이며 제 갈 길을 갔던 마오를 가리켜 '아시아의 티토'라고 칭했던 연유이다.


1980년 티토의 장례식장 풍경이 인상적이다. 동서냉전을 넘어섰다. 영국에서는 대처가 참석했고, 소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방문했다. 제1세계와 제2세계는 물론 제3세계 지도자까지 그의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애도를 표했다. 재임 기간 142번의 해외 순방으로 62개국을 방문했던 지구촌 외교의 결실이었다. '최후의 발칸인', '마지막 유고인'의 최후는 화려했다.

▲ 호치민과 티토. ⓒwikipedia



4. 유고 : '7-6-5-4-3-2-1'

티토의 나라, 유고를 카운트다운 식으로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끼워 맞추기의 혐의가 없지 않지만 제법 그럴듯한 구석도 있다. '7-6-5-4-3-2-1'이다. 유고의 자화상이라고도 하겠다. 


7은 7개의 국경을 뜻한다. 서북에서 시계 방향으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알바니아와 국경을 접했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그리스는 자유주의 진영이었다.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는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다. 동서이념 대립의 한 복판에 유고가 자리했다. 흥미로운 점은 오스트리아도 헝가리도 알바니아도 불가리아도 유고슬라비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합스부르크 제국), 알바니아-불가리아(오스만 제국)의 유산이라 하겠다. 유고를 발칸반도의 기층에 깔린 다문명세계에 근대적인 정치 형식을 부여한 '소제국'으로 접근해야 합당한 까닭이다. 


6은 6개의 공화국을 말한다. 북쪽부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로 구성되었다. 보스니아 공화국만이 특정 민족명의 이름을 따지 않았다. 무슬림 4할, 정교회 세르비아 3할, 가톨릭 크로아티아 2할로 황금비율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5는 5개의 민족을 뜻한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오족공화'를 이루었다. 무슬림이 빠졌으니 어폐가 없지 않다. 혹은 민족/국가로 사람을 가르지 않았던 이슬람 문명의 고유함을 반영한 것이라고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겠다. 


4는 4개의 언어이다. 슬로바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로 나누었다. 언어 또한 칼처럼 나누기가 쉽지 않다.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는 문자가 다를 뿐이다. 입말은 거의 같다. 그래서 '세르비-크로아티아어'라는 명칭마저 있다. 러시아어를 익힌 나로서는 문자를 공유하는 세르비아어도 띄엄띄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크로아티아어는 로마 알파벳으로 표기한 러시아어 같다는 인상마저 들었다. '슬라브 세계'라고 통 크게 퉁칠 수도 있다. 


3은 세 개의 종교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로마 가톨릭에 속한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는 동방 정교회에 속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 아래서 개종한 이슬람교도들도 많았다. 


2는 두 개의 문자이다. 키릴문자와 로마문자가 유고 시절 두루 통용되었다.

마지막 1은 하나의 국가이다. 이 다문명세계를 현실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방책으로 유고공산당 1당 지배를 확립했다. 사실상 이 1을 강조하기 위해서 2부터 7까지 말을 만들어 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1당 1국의 정점에는 1인자, 티토가 자리한다. 티토의 카리스마로 복합문명세계를 하나의 연방국가로 아울렀던 것이다. 술탄과 차르와 황제의 근대화, 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시장 기제를 도입하여 경제 성장을 도모했던 티토였지만, 유독 ‘민주주의’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적인 부르주아의 힘이 너무 세다고 말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공화국의 민족주의 대두를 우려했던 것이다. 대세르비아주의와 대크로아티아주의와 몸소 부딪쳐 싸웠던 내전을 통하여 터득한 냉철한 현실 인식이기도 했다. 자신의 역사적 책무, 건국기의 지도자임을 자각하고 있던 것이다. 나라를 새로이 세우는 와중에 수성기의 온정주의를 발휘하거나 전성기의 탕평책을 구사하면 국가의 기틀이 흔들리기 십상이다.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소제국의 세계인을 양성하기 위해서 전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판단이 크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책에 만병통치, 만사형통은 없다. 그때그때 적절한 방책을 구사해야 한다.

사단은 그 정점에 서있던 1인자가 사라지고 나서이다. 티토에 필적할 후계자가 없었다. 거인이 물러나자, 소인들의 시대가 열렸다. 초인이 사라지자 범인들이 다투었다. 유고의 대의에 헌신하기보다는 각 공화국의 이익을 따지는 민족주의자들이 출현했다. 먼저 치고 나간 것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이다. 1974년 개헌을 십분 활용했다. 분권화와 시장화의 흐름에 재빠르게 편승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와 가까웠던 탓에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제조업부터 농업까지 활기를 띠었고, 국경 개방으로 관광산업도 활황이었다. 점점 더 자신들이 '서방'에 속한다고 여겼다. 발칸국가가 아니라 서구국가라고 인식했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인 보듯이, 독일인이 터키인 보듯이, 영국인이 이집트인 보듯이 보스니아와 마케도니아 사람들을 낮추어 보았다. 자기네들의 부를 동쪽의 못사는 공화국들에 나누어주는 것에 박탈감을 느꼈다. 유고에서 이탈하고 싶어 하는 '크로아시트', '슬로베시트' 기운이 지펴졌다. 


연방 내 동/서, 남/북간 격차를 조율하며 불평을 다스려갔던 세르비아에서도 티토가 죽고나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엄연히 베오그라드가 수도인데도 자그레브나 류블랴나보다 발전하지 못했음에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유고공산당, 유고연방군 등 행정도시 관료도시에 충실하면서 물질적인 번영에 뒤쳐졌다는 것이다. 못난 이들은 몹쓸 이들은 크로아티아 아버지에 슬로베니아 어머니를 둔 티토의 혈통 때문이라며 음모론을 퍼뜨렸다. 교묘하게 세르비아의 발전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각 공화국마다 감히 티토 앞에서는 할 수 없었던 말들이 분출하고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저마다 의로움을 감수하기보다는 이로움을 앞세웠다. 


1980년대 자유화와 민주화 조치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다.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 대표 1명씩 8인 간부회가 1년 교대로 국가 원수를 맡는 형태를 고안했다. 특정 개인에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는 ‘민주적인’ 제도이다. 그러나 도리어 독이 되었다. 전국 선거가 실시되자 1년짜리 국가 원수들이 제각기 공화국의 맹주를 자처하는 지역할거정당이 약진했다. 유세 기간 지역감정을 부추키는 프로파간다와 마타도어가 판을 쳤다. 티토가 극구 봉합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바람이 사후 10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하여 1991년 이후 발칸의 비극은 1941년 발칸 내전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50년 만에 재개된 내전의 정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번에는 통합파가 아니라 분리파가 승리해갔다. 그런데 유고의 숨통을 끊고 재등장한 세력들의 면모가 간단치가 않다. 크로아티아에서 정권을 접수한 이들은 나치 독일에 편승하여 괴뢰정권을 만들었던 극우파의 후예들이었다. 사회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껍데기 서사로는 잘 짚이지 않는 대목이다. 1990년대 유고 내전의 본질을 직시하기 위해서라도 1940년대의 발칸을 복기해야 한다. 발칸의 홀로코스트가 펼쳐졌던 자그레브로 이동한다. 놀랍게도 20세기 전반에도 '종교전쟁'이 자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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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