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나 연령을 구분할 때에 우리는 흔히 그들을 특징짓는 사건을 덧붙여 이해를 돕곤 한다. '4.19 세대', 'IMF 세대' 등은 이러한 표현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조금 표현은 다르지만 '베이비붐 세대'나 'X 세대' 등도 그 세대의 특징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혹 '세월호 세대'라는 표현도 가능할까? 평자와 마찬가지로 저자도 세칭으로는 'x86'세대이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세월호 세대'에 속하는 듯하다.
<시민교육이 희망이다>(장은주 지음, 피어나 펴냄) 저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특히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첫째는 재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다.
"우선,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계속했다는 승무원을 보자. 그도 사실은 그 방송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음을 의심하고 계속해서 지휘부와 연락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지시’가 없자 그저 지침서대로 똑같은 방송을 계속 내보낼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 해경들을 보자. 그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상부의 ‘명령’이 없었다고 또는 그 명령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고 해야 한다. 또 비상대책본부의 공무원들도 보라. 그들의 무능과 혼란은 기본적으로 그런 상황에 대한 행동지침서가 없었고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확립되지 못했던 탓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그저 의전이나 챙기는 일밖에는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스스로 무얼 잘못했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에 못지않게 수용하기 어려웠던 점은 그 와중에 광장으로 뛰쳐나온 일베 회원들의 이상행동이다. 더구나 그들은 이러한 이상행동을 정의감으로 포장한다.
"이런 폭거를 자행한 일베의 회원들, 이른바 '일베충'은 그저 무식한 우리 사회의 '루저'나 '찌질이'가 아니다. 그들은 나름의 논리 체계와 정의 관념을 갖추고 있는 '아주 예의 바른 청년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특히 여성, 진보·개혁 진영, 호남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흥미롭게도 이것은 '무임승차 혐오'라는 모종의 정의감에서 나온 표현이란다."
저자가 볼 때,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우선 입시경쟁으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비판적이며 독립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있는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이들이 "시민들 상호 간의 존중과 인정, 다양성에 대한 포용과 관용, 연대 등의 [민주적] 가치와 태도"를 갖추지 못한 채 사회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를 저자는 '시민의 부재', 또는 '시민의 미성숙'의 문제로 특징짓고, 그래서 시민교육이 필요하다는, 즉 '시민교육이 희망이다'라는 표제를 이끌어 낸다.
그러면 이러한 시민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시민교육의 일반론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현실에 적합한 시민교육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시민적 주체들의 실존적 허약성, 즉 '시민적 자존감'의 결여 상황이다. 이는 좀 설명을 요하는 부분인데, 우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는 길은 택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현실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현실의 탈락자가 된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가령 이들을 신분 사회에서의 희생자들과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신분사회에서는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무시와 배제의 위협이 단지 사회적 배경이나 계급, 신분 등으로 인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희생자들이 그로 인해 과도하게 자기 탓을 하거나 결과적으로 사회적 변화의 동력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처럼 탈락자들이 그러한 탈락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게 되면, 한편으로 '헬조선'이라고 우리 사회를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신보다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일그러진 시민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 시대의 탈락자들은 탈락의 원인을 사회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는가? 저자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으로서 우리 사회의 고유한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이데올로기를 든다. 그런데 '능력지상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메리토크라시 이념이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메리토크라시는 '기회의 균등' 및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등적 분배'를 기본 원칙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하는 한에서 이러한 원칙들은 일견 타당하거나, 적어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반성 없이 이를 수용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모든 차등, 또는 차별이 개인적 능력과 노력의 결과가 되어 버린다.
거기에다 우리 교육 현실은 이러한 메리토크라시 이데올로기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고 개인적으로 내면화하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한다. 이른바 메리토크라시적 이데올로기를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능력'이나 '노력'을 어떻게 정의하며 측정해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교육에 의한 입신양명의 전통을 갖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능력과 노력을 미시적으로는 성적, 거시적으로는 학벌로 치환해버렸다. 이제 실제로는 능력의 차이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점수 차이가 개인적,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리고, 나아가 이를 위해서는 온갖 비정상적 행위가 당연시되는 학력, 학벌 중심 사회가 탄생한다. 이러한 학력, 학벌 중심 사회는 다시 모든 차별을 정당화하여, 심지어 탈락자마저 이러한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의 전체적인 결과는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이른바 '헬조선'과 'N포세대'이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메리토크라시적 이데올로기는 실천적으로 자기배반적이며, 이론적으로 부당하다. 우선 메리토크라시의 실천적 자기배반성은 그것이 정당화하는 불평등, 특히 경제적 불평등의 인과적 귀결이다. 주지하다시피 경제적 불평등이 아무런 단서 없이 정당화되면, 그것이 직, 간접적으로 상속됨으로 인하여 새로운 계급사회, 또는 새로운 신분사회가 탄생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권력에까지 미치고, 그 결과 개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부와 사회적 지위가 재생산되는 '신귀족제'가 자리를 잡는다. 요컨대 엘리트들이 특권의 성채들을 쌓아 올려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것을 메리토크라시로 정당화하는 형용모순적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서술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우리나라의 결손 민주주의, 즉 메리토크라시를 적용하는 조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능력지상주의'를 표방하는 메리토크라시 자체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만약 사회적 부와 권력을 능력을 기준으로 분배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분배할 것인가? 비록 능력이나 학력이 분배의 기준으로서 부적절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능력분배 원칙을 공고히 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저자는 이러한 반론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이른바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고찰한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는 우선 이렇듯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 자체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메리토크라시 이념이 강조하는 기회 균등이라는 전제가 충족되려면 우선, 다양한 수준의 '차별(discrimination)'부터 없애야 한다. 그러니까 남녀 차별, 빈부 차별, 지역 차별, 종교 차별, 학력 차별, 지방대 차별 등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는다면 기회 균등 원칙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특권을 폐지하라는 요구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차별이나 특권이 철폐된 상황에서도 문제는 남는다. 이 수준에서 확보된 기회의 균등은 단지 '형식적인' 차원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그런 형식적인 기회 균등의 원칙만으로는 경쟁 관계의 출발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 배경 등의 영향 때문에 그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들어가는 '능력의 차이'라는 문제를 없애지 못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이나 상속, 가정환경 등과 같은 사회적 배경이 경쟁의 출발선에 서기 전에 사람들 사이의 능력과 조건의 차이를 결정지을 가능성이 크다."
평자의 느낌으로는 메리토크라시가 이런 조건들을 선결적으로 충족시키기를 요구하는 이념이라면 메리토크라시 사회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싶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런 체제가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저자는 여기에서 '능력'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문제 삼는다. 자본주의적 메리토크라시에서는 생산과 이윤 창출에 기여하는 능력만을 능력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는 다른 수많은, 그리고 인간적으로 중요한 능력 또는 요소에 대한 무시, 또는 배제를 의미한다. 가령 호네트(A. Honneth)는 사랑, 권리, 연대 등을 중시하는데(87), 인간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러한 요소는 메리토크라시적 사회에서는 충분히 고려될 수 없다. 설령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메리토크라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경쟁 체제에서 승리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이기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승자독식을 정당화하고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만들어 낼 우려가 있다."
메리토크라시의 실천적 자기배반과 규범적 한계를 지적한 저자는 그 대안을 민주주의에서 찾는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저자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논리의 전개상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이는 물론 이 책의 주요 주제가 '시민교육'이고, 또 저자가 이미 2012년에 <정치의 이동: 분배 정의를 넘어 존엄으로 진보를 리프레임하라>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밝힌 만큼 충분히 관용될 수 있는 결점이기는 하다.
취지에 맞추어 요점만 전한다면, 저자는 우선 "한 사회에서 어떤 능력을 어떤 기준에 따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로부터 특정한 능력이나 기준이 정당하게 사회적 인정 질서로 수용될 수 있으려면 먼저 "사회적 기여에 대한 평가 방식이나 기준 등을 결정하는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지배의 관계에 노출되지 않고 서로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연스럽게 도출해낸다. 요컨대 '시민들의 평등한 민주적 자율성'을 활성화해주는 '민주주의적 정의'의 확립이 다른 무엇보다도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교육과 관련된 이하의 논의는 이 책의 실질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상의 주장들의 논리적 귀결 및 그와 관련된 교육적 경험, 특히 독일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소개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제가 광범위한 데에다가, 평자의 지식과 관심이 아직 충분히 미치지 못한 내용들을 많이 다루고 있어서 섣불리 소개하는 것보다는 인상 깊은 대목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또, 저자는 'IV장 촛불혁명의 일상화'에서 독일 시민교육 자료들을 토대로 학교에서 시민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독일 정치 교육은 정치적 판단 능력, 정치적 행동 능력, 방법론적 활용 능력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저서를 참고하기 바라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세부 목표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기대하는 시민교육과 분명히 차이가 있다.
* 공적 결정과 그 결정의 대안들을 사회체제, 특히 국내외의 정치·경제·사회·환경 영역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 자신의 직업적 전망을 전체 사회와 정치적·사회적 발전 과정을 고려하여 계획할 수 있다.
* 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연출의 메커니즘과 논리를 파악할 수 있다.
교육 현장에 이를 곧바로 도입한다면, 당장에 아이들을 의식화를 시키려 한다거나, 학생들에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는 등의 반응들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다른 맥락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평자로서는 이러한 저자의 시사가 교육 주체들의 자기 성찰로 연결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러한 논의에 이어서 저자는 한국 민주시민교육의 특별한 요소로 주목했던 '시민적 자존감'의 문제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제껏 체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저자의 논의 방식이 여기에서는 다소 길을 잃는 듯하다. 저자가 제시하는 시민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아이들로 하여금 단순히 시민적 주체성에 대한 실질적 경험을 쌓아나가게 하는 것이다. 동아리를 만들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학교의 의사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촛불 시위 같은 데에 직접 참여해 보는 등의 경험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 전공자라는 점에서 저자와 동일한 한계를 갖고 있는 평자로서는 저자의 전개방식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다음과 같은 것들도 고려했으면 어떨까 싶다.
첫째, 철학자인 저자에게 구체적인 교육방법을 제시하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라 하더라도, 교육자, 또는 교육학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방법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도는 저자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밝힐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물론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민주시민교육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성공 사례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의 일반화를 보증할 수 없다.
둘째, 아이들은 백지 상태에서 시민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적 자존감을 결여하게 만드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시민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플라톤식으로 좋은 것만을 넣어주고 접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쁜 것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안이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저자는 모든 개입이 아이들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는 듯하며, 또 민주적 시민성을 강제로 이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시민적 주체로서 우뚝 서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시민교육의 문제를 교정적 관점에서도 살펴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이러한 교육을 누가 할 것인지와 관련된 논의이다. 여기에는 의외로 심각한 경험적 문제가 내재해 있는데, 초중등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를 포함하여 기성세대 거의 전부가 학교에서 제대로 된 민주시민교육을 받아 본 경험이 없다. 거기에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반드시 달갑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법은 무엇인지, 가령 독일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이 궁금하다.
아무래도 저자와 평자가 대체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보니 전체적으로 서평이 비평보다는 소개글에 가깝게 되는 듯하다. 하지만 입장의 유사성 여부를 떠나서 이 책이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우선 이와 관련된 많은 연구 업적을 갖고 있다. 이 책은 단지 한 권의 독립적인 저술이 아니라 중간에 언급했던 <정치의 이동>, 그리고 <생존에서 존엄으로>, <인권의 철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등의 저서와 '통합진보당 이후의 진보', '메리토크라시와 존엄의 정치' 등의 논문들이 반영된 집약적 저작물이다. 그런 만큼 다양한 토픽을 체계적이면서도 심층적으로, 그러면서도 철학 비전공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해내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철학 전공자로서는 드물게 많은 실무 경험을 갖고 있다. 오래 전부터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고, 2년 동안 경기도교육연구원의 선임연구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교육현실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개천에서 용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이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나마 그러한 주장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꾸라지가 아니라 용이 중요한 한에서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든 미꾸라지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확실히 울림이 있다.
저자의 이후의 작업을 돕는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저자와 평자는 '민주적 공화주의', 또는 '공화민주주의'라는 지점에서 입장을 거의 같이하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시민들의 평등한 민주적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고, 평자 또한 공화주의를 절차주의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듯 자율성이나 절차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최소한이나마 그것들이 주어진 경우에는 공허한 구호로만 남을 가능성이 있다.
아직 적지 않은 과정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촛불혁명을 이끌어낸 시민들은 이미 광장 민주주의를 충분히 맛보았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이러한 광장 민주주의의 제도화 외에, 그것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촛불혁명을 바라보면서 저자도 아마 평자와 유사한 생각을 했었으리라. 그러나 그랬다면 시민교육의 내용이 크기만 줄인 광장에 계속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감이다. 저자가 소개한 독일 시민교육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개인이 각자 존중받아 마땅한 개체로서 광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또 광장 속에서 어떻게 자기를 실현해 가는지 등에 관한 논의가 규범적, 제도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문화적 차원에서도 추가되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시민과 세계> 2017년 상반기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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