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바에서는 어떤 술을 마시는 게 좋을까?
2019.11.23 10:21:02
[북토크] <마냥 슬슬>

"찻잔을 감싸듯 살그머니 술병을 쥐어본다. 유백색 표면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조금 더 느끼고 싶지만 데운 술이 가득 찬 술병은 아직 지나치게 뜨겁다. 몇 초 쯤 손을 떼었다가 손끝으로 병목을 기울여 투명한 술을 따른다. 술잔 위로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훈김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놓인다. 하물며 두 볼이 에이도록 거센 겨울바람을 맞은 뒤라면 더더욱, 데운 술만큼 반가운 것은 없다. 그래도 잔을 들어 단번에 술잔을 비운다. 뭉근한 단맛이 느껴지는 후끈후끈한 술이 입안을 채웠다가 온몸으로 부드럽게 퍼져나간다. 이렇게 다정한 존재가 또 어디에 있을까. 누가 이토록 내 마음을 잘 알아줄까." (은모든, <애주가의 결심> 시작 부분)

은모든 작가는 술을 주제로 한 소설 <애주가의 결심>으로 데뷔했다. '안락사'를 주제로 한 은 작가의 중편 소설 <안락>에서도 손녀와 할머니를 이어주는 강한 끈으로 자두주가 등장한다. 소설 속 손녀와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만나 자두주를 마시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지난 7월 은 작가는 술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작품 <마냥 슬슬>(숨쉬는책공장 펴냄)을 냈다. <마냥 슬슬>은 10개의 술에 대한 5편의 소설과 5편의 에세이, 그리고 각각의 술에 대한 테이스팅 노트로 구성된 책이다.

"술을 주제로 작품을 썼는데 애주가냐"는 질문에 "물론입니다"라고 답한다는 은 작가가 지난 20일 서울 합정 ‘디어 라이프’ 북카페에서 <마냥 슬슬> 북토크를 열었다. 애주가의 북토크답게 참석자들에게는 맥주 한 병씩이 제공됐다. 은 작가는 참석자들에게 술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냈다.


▲ 은모든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이야기 하나. 애주가에 대한 가벼운 정의


은 작가가 처음 꺼낸 이야기는 애주가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였다. 좋은 음식을 보고 좋은 술이 떠오른다면, 당신도 애주가다.

"애주가라고는 하지만 필름이 끊기거나 많이 마시는 날이 많지는 않고, 평소에 한두 잔씩 마시는 걸 좋아해요. 다만 어디서 들은 말 중에 공감한 게 술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음식을 먹으면 좋은 술이 떠오른데요. 보통은 좋은 음식이 최고의 행복이니 그것만으로 충분한데 그럼에도 술이 떠오르면 애주가라는 거죠."

애주가에 대한 생각에 걸맞게 은 작가는 술과 음식의 궁합 이야기도 술술 풀어냈다. 은 작가는 위스키와 석화를 함께 먹는 것을 "겨울의 호사"라고 부른다. 맛이 섬세한 고급 사케라면, 튀김 안주보다는 흰 살 생선이나 야채 안주가 제격이다. 한산소곡주에는 담백한 고기 요리나 생선회도 좋지만, 제철 나물을 선호한다.

이야기 둘. 지금은 없어진 술집, 아직도 건재한 술집

애주가라면, 좋아하던 술집이 어느 날 사라져 슬퍼한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반면, 오랫동안 버티는 술집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사는 동네가 망원동 같은 '핫플레이스'라면 더 그렇기 마련이다.

"<애주가의 결심>으로 데뷔했는데, 제가 사는 망원동이 배경이에요. 소설에 망원동의 여러 가게가 나오는데, 원래 제 꿈 중 하나는 망원동에 자리 잡고 10년 정도 있으면서 <애주가의 결심>에 나오는 가게를 배경으로 작업을 해보는 것이었어요. <애주가의 결심>이 나온 지 1년 반 정도 됐는데 절반 정도는 없어지거나 바뀐 것 같아요. 매일매일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있는 거죠. 소설로 썼는데 없어졌네 생각하게 돼요.

'바 사뭇'이라고 지금도 건재한 곳도 있어요. 소설에는 스치듯 등장하는데요. ‘어쩌다 가게’라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항하고자 5년 단위로 계약하는 건물에 입점해있어요. 위스키와 어울리는 안주인 석화를 내놓는 곳이기도 하고요. 여성 오너가 있는 바라서 혼술하고 싶다는 분들에게 강추합니다."

이야기 셋. 세상이 변하면 술도 변한다

변하는 것은 술을 파는 가게만이 아니다. 어떤 술은 세상이 변하며 같이 변한다. 은 작가는 술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데킬라 이야기 한 토막을 꺼냈다.

"술에 대한 전문지식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 권유받은 책 중 한 권이 <칵테일 스피릿>이었어요. 코리아 베스트바 100에 들어간 바 틸트를 10년째 운영 중인 바텐더가 쓴 책인데요. 데킬라의 향과 맛을 아주 시원하게 표현하더라고요. 도라지, 인삼 맛이라고. 데킬라의 미묘한 내음을 전문적 지식이 있는 분은 이렇게 특정해서 이야기할 수 있구나.

그 책에 보면 데킬라가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는 술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데킬라의 원료인 용설란이 원래 다 자라는데 10년이 걸린데요. 그런데 여름이 더워지니 5, 6년 만에 다 자란다는 거예요. 그러면 당분이 충분히 고이지 않는데요. 금방 못 마시지는 않겠지만, 10년, 20년 뒤에는 데킬라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북토크 참석자들은 맥주 한 병 씩을 마시며 은모든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야기 넷. 여행지의 바에서 마시기 좋은 술

시간만 술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공간과 만드는 사람도 술을 바꾼다. 바마다 나라마다 맛이 다른 술을 마셔보는 것은 애주가가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다. 은 작가는 특히 여행지의 바에서 마시기 좋은 술로 네그로니와 불바디에를 추천했다.

"네그로니는 진과 캄파리아, 베르무트를 섞은 새빨간 술이에요. 바마다 베리에이션이 다양해요. 넓은 잔에 내느냐 작은 잔에 내느냐, 위에 어떤 가니쉬를 올리느냐. 바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향도 즐길 수 있는 칵테일이라 알아두면 여행지에서 마시기 좋은 술인 것 같아요. 불바디에도 비슷한데 위스키 베이스의 술이라 제게는 느낌이 더 좋았어요."

마지막 이야기. 애주가의 덕목

술을 좋아하는 은 작가지만 강권만은 사절이다. 술을 좋아한다면서 남에게 강권하는 사람을 보는 일은 괴롭다. 북토크 말미, 참석자 중 한 명의 "인생에 얼마만큼의 술이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에도 은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저에게는 좋은 책이나 술이 친구와 연결되는 느낌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많은 친구가 필요하지는 않잖아요. 어떤 사람은 한두 명이면 족하기도 하고요. 술도 친구와 같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에게는 맥주 한 잔, 어떤 사람은 위스키 더블."

술과 술이 주는 즐거움과 위로를 사랑하는 사람인 은 작가는 <마냥 슬슬>에서도 이렇게 적었다.

"당신과 나의 심신을 헤치는 음주는 사양합니다. 분연히!"


▲ <마냥 슬슬> 북토크.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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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기자
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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