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한국정치사 최초 좌파 정치인" 조봉암을 만나다
2019.07.31 08:37:26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조봉암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 1959년 대법원 선고 공판. 맨 왼쪽 흰 옷이 조봉암 (출처: (사)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 망우리 조봉암 선생 묘소 입구에 세워진 어록비 앞면, 뒷면


"한국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 죽산 조봉암 (竹山 曺奉岩, 1899.9.25.~1959.7.31.)

2009년 7월 29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죽산 조봉암 서거 50주기를 이틀 앞두고 진보신당과 당 부설 미래상상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한 '조봉암과 21세기 진보' 토론회가 열린다. 윤영상 미래상상연구소 부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는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인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가 발제를 하고, 성공회대 오유석 교수, 성신여대 홍석률 교수,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 진보신당 장석준 연구기획실장이 토론을 맡는다.
인사말을 통해 노회찬(진보신당 당대표)은 "사법 살인이라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적 명예회복 및 국가유공자 지정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뒤,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인 조봉암 선생이 50년대에 이룬 업적을 아직까지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진보정당의 현주소"라며 "선생의 정신과 추구했던 바를 계승 발전시켜나가겠다"고 말한다.
발제 제목은 「조봉암과 21세기 진보: 2009년 오늘 되돌아보는 진보당과 죽산 조봉암의 삶과 죽음」이다. 조현연은 "현대인은 그가 지나온 저 희미한 빛 속을 열심히 되돌아보는데, 이는 그 가냘픈 빛이 그가 지금 가고 있는 어두운 길을 비춰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라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카(E. H. Carr)의 말을 인용하면서 발제를 시작한다. 이어 "한국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조봉암만큼 선거와 정당을 중시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며 "조봉암은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꿈을 키웠고 정당 속에서 성장했으며 정당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이어 "이승만 정권 반대 투쟁 과정에서 보수야당 민주당과 연합을 모색하면서도 '독자적인' 진보 정치를 개척한 조봉암의 리더십이 우리 시대의 고민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것을 강조한다(구영식, 「정치권에 '조봉암 바람'이 분다」, <오마이뉴스>, 2009년 7월 29일).
토론자들은 조봉암에 대해 '진보적 현실정치인', '경륜을 갖춘 대중정치인' 등으로 평가하며 그의 업적과 추구했던 바가 21세기에도 계승돼야 한다고 같은 목소리를 냈다. 장석준은 "조봉암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너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너희 시대의 조봉암'이라는 것 아닌가"라며 의미를 더한다.


▲ 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정종권 진보신당 부대표, 노회찬 당대표,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 윤영상 미래상상연구소 부소장(사회), 조현연 정책위 의장(발제),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오유석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 장석준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 노회찬재단


2019년 7월 31일 오늘은 노회찬이 "한국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칭한 죽산 조봉암의 60주기가 되는 날이다. 추모제는 올해도 오전 11시 망우리의 조봉암 묘소에서 지낸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항일 독립운동가 조봉암

조봉암은 어떤 사람인가?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조봉암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1899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죽산(竹山), 본관은 창녕이다. 
조봉암은 1919년 3월 18일 강화의 만세 시위에 참가, 주동자로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개월간 복역한다. 복역 중 심한 고문에 시달리면서 삶의 큰 전환기를 맞이한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1920년에서 1999년까지 기사 서비스)에 조봉암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20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1920년 서울로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수학하다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 20여 일 동안 평양경찰서에 구류되었다가 무죄방면되었다는 내용이다. 


▲ 1920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후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박헌영, 김찬, 김단야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2년 9월 28일 중국 상해 프랑스 공원에서 체포, 고국으로 압송되어 7년 형의 언도를 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39년 7월 41세 때 석방, 고향인 인천으로 돌아온다. 감옥에서 살을 에는 추위와 갖은 고문으로 손가락 일곱 마디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 동아일보 1932년 10월 1일자 조봉암 체포 기사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다시 검거되었으나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출감한다.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그의 출옥을 직접 환영했다 해서 화제에 오르기도 한다. 이후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 의장에 취임하지만, 1946년 5월 7일과 5월 8일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들에 실린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서신과 1946년 6월 23일 「비공산정부를 세우자」는 글을 발표, 박헌영과 결별하고 조선공산당도 탈당한다.



▲ 동아일보 1946년 5월 7일(一), 5월 8일(二), 동아일보 1946년 6월 26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초대 농림부 장관, 2대 국회 부의장 조봉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 참여하여 그가 구상하는 이상과 비전을 제도권 안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이승만이 조봉암을 최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한 것은 좌익계의 농지개혁 요구를 무마하고, 지주정당인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이승만이 조봉암의 개혁을 승인하기로 약속하고 재차 승낙을 요구하자 농림부장관직을 결국 수락한다. 그의 장관 재임은 오래가지 않는다. 농지개혁 저지에 사활을 건 한민당은 그를 끌어내리려 했고, 이승만이 이를 방조했기 때문이다.


▲ 이승만 정권의 초대 내각, 가운데가 이승만, 바로 뒤 왼쪽이 농림부 장관 조봉암 (출처: (사)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1950년 5월 30일 2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된 조봉암은 6월 19일 2대 국회 전반기 의장단 선거에서 장택상과 함께 부의장에 당선된다(국회의장은 신익희). 6일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회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 경무대로 갔다가 이승만의 도피소식을 접한다. 신익희는 측근들과 함께 가자고 해놓고서는 가족들과 먼저 수원으로 피신한다. 반면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키고 나서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한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야반도주하면서 한강 인도교까지 폭파해 800여명의 피난민을 살상한 이승만 등과는 달리 조봉암은 맡은 바 소임을 한 뒤 서울을 탈출한다.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방이 붙여져 있었다고 한다. 1952년 7월 10일 후반기 국회의장단 선거에서 부의장으로 재선출된다.


▲ 제2대 후반기 국회 의장단. 좌로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1952년 2대 대선, 범민주 단일야당 결성운동 실패와 1955년 '광릉회합'


1952년 8월 5일 2대 대통령 선거에 조봉암은 "나는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 한다."는 정강을 내걸고 출마, 11.3%의 득표율을 얻는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발췌개헌안 파동'(1952.7.4.)에 뒤이어 실시된 1952년 8월 5일 직선에 의한 정․부통령 선거는 사실상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7월 18일 선거일 공고, 7월 26일 후보등록 마감, 8월 5일 투표로 선거운동 기간은 불과 열흘이었다. 선거운동 없는 선거, 참관인 없는 개표 결과 유효투표 7,020,684표 가운데 이승만 5,238,769표, 조봉암 797,504표, 이시영 764,715표, 신흥우 219,696표로 집계된다. 보수야당 민국당의 조병옥은 같은 당의 이시영이 출마했음에도, 그리고 이승만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자신의 동료들을 탄압한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견제하기 위해 이승만을 적극 지지한다. "조봉암씨에게 자리를 맡길 것이라면 차라리 김일성과 타협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그를 비롯한 보수야당 지도자들에게 조봉암은 김일성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한홍구, 「'강도당한 지갑'을 기억하라」, <한겨레21>, 2004년 4월 28일).


▲ 왼쪽: 대통령입후보 기호1번 조봉암 광고(동아일보 1952년 8월 2일) ▲ 오른쪽: 제2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출처: 국가기록원)


1954년 11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 파동' 이후 갈수록 악화돼 가는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대동'의 기치 아래 범민주 단일야당 결성운동이 나타난다. 그 핵심역할을 한 호헌동지회는 신당의 이념과 지향점을 반공과 반독재 두 가지로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조봉암과의 연대가 핵심 문제로 부상했는데, '반독재'보다 '반공'을 앞세운 조병옥과 장면과 김준연 등 '자유민주파'의 매카시즘적 공세로 끝내 무산되고 만다.
애초 범민주 단일야당에의 합류를 목적으로 한 혁신세력의 재규합은 1955년 9월 1일 '광릉회합'을 계기로 반보수 혁신정당 결성을 지향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속에서 진보당 창당으로 이어진다.
광릉회합 자리에는 조봉암, 서상일, 장건상, 정화암, 최익환, 박용희, 서세충, 정이형, 남상철, 양우조 등 원로와, 윤길중, 신도성, 김기철, 이명하, 조규희, 김경태, 김수선, 조향록 등 신진 혁신계 인사 40여명이 참석한다. 이 회합에서 민주대동운동의 중간평가와 함께 혁신 신당 조직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 회합에서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로 사회민주주의 내지 민주사회주의가 공식 이데올로기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 후마니타스, 2006, 166~167; 179). 물론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후 진보당이 창당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핵심 문제는 무엇보다 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것으로, 이데올로기 문제나 창당 시점 문제('선 이념통일 후 창당' 대 '선 창당 후 이념통일'의 대립)도 사실은 그것의 다른 표현이었다.

1956년 3대 대선과 진보당 창당

▲ 경향신문 1956년 4월 9일 (오른쪽 위부터 대통령 후보 신익희, 이승만, 조봉암. 부통령 후보 장면, 이기붕, 윤치영, 이윤영, 백성욱, 박기출, 이범석, 이종태)

노회찬이 태어난 해인 1956년은 제3대 정.부통령선거가 있던 해였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 본격적으로 슬로건이 등장한 것은 제3대 대선 때부터다. 당시 민주당이 내걸었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슬로건이다. 민주당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밑져봐야 본전이다. 갈아나 보자', 진보당 조봉암 후보의 '갈지 못하면 살 수 없다' 등 야당의 '갈아보자' 공세에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로 맞선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비행기, 신익희의 민주당은 버스, 조봉암의 진보당은 지게'라고 할 정도로 당 조직역량의 차이가 확연했던 56년 대선에서 진보당추진위원회 후보로 출마한 조봉암은 금기시된 평화통일을 계속 강력하게 주창한다. 피 흘리는 것은 민족의 자멸을 의미할 뿐이므로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말해 북진통일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유엔 보장하의 평화통일을 성취하겠다는 것으로, 전쟁이 끝난 지 3년만에 나온 파격적인 주장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 본격적으로 슬로건이 등장한 것은 1956년 대선 때부터다.


▲ 1956년 대선 당시의 조봉암의 벽보, 신문광고 등

3대 대선에서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여러 움직임이 있었으나, 쉽지 않았다. 야당 단일화협상에서 진보당은 선거 종반전에 정부통령 후보를 양보하는 것에 합의했으나,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급서하자 조봉암은 야권 단일 후보가 된다. 그러나 민주당은 조봉암을 후보로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승만 편을 든다. 민주당은 조봉암을 용공분자라고 비난하며 공식적으로 신익희 후보 추모표를 던지라는 특이한 결정과 함께, "본 당 이외의 후보자는 정치적 행장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정권교체로서 우리 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하려던 초지의 관철을 후일로 미룬다."는 성명을 낸 것이다. 심지어 조병옥과 김준연은 조봉암에게 표를 주느니 차라리 이승만을 찍으라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한다.
개표 결과 이승만은 504만 표를 얻어 당선된다. 진보당은 테러 등 선거운동 방해 때문에 선거운동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선거운동과정과 투개표에서 엄청난 부정과 탈법이 있었음에도 이승만이 총투표수의 80%를 획득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겨우 50%선에 그친다. 부통령에는 장면이 당선되는데, 여기에는 진보당 박기출 후보의 사퇴 영향이 컸다.


▲ 왼쪽과 가운데: 제3대 정부통령 선거 전국 개표 집계 속보 게시판(경향신문사) ▲ 오른쪽: 경향신문 1956년 5월 21일


▲ 당시 대선 득표율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

5월 15일 3대 대선에서 216만 3천표(23.8%)를 획득한 조봉암은그 여세를 몰아 선거 종료 한 달 이내에 신속히 당을 창당하려 했지만 11월에 가서야 진보당을 창당한다. 1956년 11월 10일 서울 시공관에서 조봉암계 단독으로 진보당 창당대회가 개최된다. 전국 대의원 900명 중 853명이 참가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채택하고 노동대중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민주적 혁신정당임을 밝혔으며, 위원장에 조봉암, 부위원장에 박기출과 김달호, 간사장에 윤길중을 선출한다.


▲ 1956년 진보당 결당대회


창당 직후부터 지지세력이 강한 경남을 필두로 지방당부 조직결성대회가 개최되었고 몇 번에 걸쳐 경찰과 정치폭력단의 방해를 받았지만 당세는 지속적으로 확대된다. 1957년에 들어 진보당은 58년 민의원․참의원 선거에 대비하여 지방조직 결성에 나선다. 조봉암은 자유당, 민주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캐스팅보트를 쥘 만한 세력으로 진보당이 의회에 구축되리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지방당 조직을 확대하면서 전국적으로 세를 확장하던 1958년 1월 13일 4대 총선(1958.5.2.)을 4개월 앞두고 '진보당 사건'이 터진다. 육군 특무대와 서울시경이 수사에 나서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진보당 간부들과 조봉암을 기소한 것이다. 조봉암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된다. 1심 재판부(판사 유병진)는 간첩 혐의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는 유죄로 해서 5년형을 선고한다. (※ 유병진 판사는 이 판결로 인해 연말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게 된다.)


▲ 왼쪽은 경향신문 1958년 1월 13일 ▲ 동아일보 1959년 2월 27일


그러나 고법과 대법원은 1심에서 무죄로 결론 난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선고를 했고, 재심청구가 기각된 다음날인 1959년 7월 31일에 전격적으로 처형된다. 재심청구가 기각된 지 17시간만의 일로,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하자 이른바 '사법살인'을 당한 것이다. 즉 조봉암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당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박기출은 이렇게 증언한다. "조병옥과 이기붕은 진보당 말살계획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처형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한다. 치안국장 이강학의 명의로 각 언론사에 민심을 자극하고 북을 이롭게 하니 일절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다. 이 지침에 따라 독립운동가이고 진보적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봉암의 처형사실은 모든 언론이 침묵하는 가운데 동아일보 기사와 함께, 한국일보가 1단 6행으로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지난 7월 31일 상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3시 서울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 반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 동아일보 1959년 7월 31일

두 사람의 만남

노회찬이 조봉암이라는 이름을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지 현재의 기록으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90년대 후반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 2000년대 초 민주노동당 부대표와 사무총장 시절 노회찬은 정태영과 여러 차례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저는 진보당에 대해서는 故정태영 선생이라고 우리나라 사민주의 정당에 관련된 저술을 많이 하셨고 또 진보당에 직접 참여하셨고 또 가장 오래까지 생존해 계시면서 이렇게 활동을 해오신 분으로부터 진보당의 활동에 대해서 얘길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폴리뉴스>, 2009년 5월 4일)

정태영은 1931년 전북 익산 출신으로 서울 문리대 수학과를 나온 후 진보당에 '정동화'란 가명의 비밀 당원으로 입당한 사람으로 청년조직을 확대하는 일을 맡았다. 정태영은 진보당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로 2008년 3월 22일 눈을 감을 때까지 조봉암과 진보당의 명예회복을 평생의 꿈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그 하나로 그는 쉰아홉 살에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에 입학해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건국대에서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다.

노회찬이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고 있던 1980년대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 두 권의 책이 출간된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혁명'을 꿈꾸던 때여서 당시 노회찬이 이 책을 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 왼쪽: 이영석, <죽산 조봉암-그의 슬픈 삶과 죽음의 이야기> (원음출판사, 1983) ▲ 오른쪽: 권대복 엮음, <진보당-당의 활동과 사건관계 자료집> (지양사, 1985)


노회찬이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인 1991년 7월 조봉암의 32주기에 맞춰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이 출간된다.

▲ 왼쪽: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 1991) ▲ 오른쪽: 한겨레 1991년 7월 27일


이후 진보정당의 설계자이자 개척자로서 노회찬이 국민승리21을 통해 민주노동당 건설에 진력하고 있을 때인 1999년 탄생 100주년 서거 40주기를 맞아 정태영.오유석.권대복 등이 엮은 <죽산 조봉암 전집 1-6>(세명서관)과 서중석의 <조봉암과 1950년대 상, 하>(역사비평사)가 출간된다. 서중석은 "광기가 지배하던 1950년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조봉암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면서 "조봉암은 1950년대 희망이었다"고 말한다.


▲ 오른쪽: 동아일보 1999년 7월 5일

▲ 오른쪽: 경향신문 1999년 12월 30일


2004년 17대 총선에서 43년만에 원내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감격이 당내 정파 갈등과 당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 전략적 무능으로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고 있을 때인 2006년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후마니타스, 2006)이 출간된다. 이 책은 1991년 출간된 초판본(<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을 개정한 책으로, 1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역사 자료에 대한 재확인을 통해 오류를 바로잡고, 독자들이 보다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문장을 많이 다듬었다.


▲<조봉암과 진보당>

이 책에서 정태영은 "많은 사람들이 진보운동은 정권의 탄압이나 냉전과 같이 외적 요인들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의 모든 것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더 중요한 측면은 진보운동이 현실에 기초를 튼튼히 둔 이념적 좌표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조직 내 건전한 작풍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당내 정파들의 조급한 헤게모니 투쟁 때문에 분열하고, 결과적으로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사실이다"라는 말로 당시 민주노동당에 일침을 가한다.

2006년 8월 2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죽산 조봉암 4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정태영은 옆에 있던 문성현(민주노동당 당대표)에게 "민주노동당은 진보당의 실패에서 배우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내부 파벌 다툼에 치중하고 투쟁중심 노선만 고집해서는 국민들에게 외면 받다가 수십년 내에 그 소중한 진보정당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병인 간경화와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태영은 2007년 겨울 쓰러지기 전까지 활발한 사회 참여와 저술 활동을 계속한다. "사회운동 단체들의 모임 뿐 아니라 학술행사에도 늘 참여했고, 민주노동당이 행사를 할 때마다 그는 청중석 한 자리에 꼭 앉아 있곤 했다. 하지만 2007년부터는 민주노동당 행사에 가지 않는다. 이미 자신을 포함한 제1세대 진보파가 50년 전에 겪었던 오류와 실패를 민주노동당이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박상훈, 「'진보당 사건'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박사 별세-[弔辭] 진보정당 실천 위해 일생 바친 큰 스승」, <프레시안>, 2008년 3월 23일)

ⓒ노회찬재단

2007년 9월 마지막 저작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후마니타스)을 내면서 정태영은 과거 1세대 진보정당 운동과 민주노동당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명분을 앞세우며 끊임없이 반목을 만들어낸 작풍의 문제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문제를 분단 때문으로 보는 분단환원주의와 통일지상주의의 폐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늘 정치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운동을 앞세워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치의 영역에서 보수 세력의 영향력은 공고화되었고, 진보 세력과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졌으며,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정당의 사회적 기반 역시 소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다가 진보 세력은 시민사회에서만 목소리를 높일 뿐 정치체제의 운영은 보수 양당에 의해 주도되는 한국 정치 고유의 패턴이 고착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크다." (13~14쪽)

글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노회찬재단의 '노회찬의 서재'에 있는 관련 책들 가운데 몇 권을 사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모아봤다.


죽산 조봉암 사면 복권과 진실화해위 권고

<조봉암과 진보당-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후마니타스, 2006)에서 정태영은 "조봉암의 억울한 죽음과 불명예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무슨 민주주의냐"고 항변한다.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던 조봉암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와 진보당이 추구했던 정치실험이 온전히 평가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불구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조봉암의 명예회복을 위해, 그리고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자생적'인 진보정당 건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오다가 2008년 3월 갑자기 세상을 뜨신 정태영 선생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요즘 젊은 진보파들이 과거로부터 배우려는 노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젊은이다운 패기와 배포도 없다."

지난 1991년 당시 민자당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민주당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 등 여야 정치인 86명이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과 '사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국회가 여야 격돌로 파행되면서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된 바 있다.

2007년 9월 18일 진실화해위는 진보당 조봉암의 처형 사건에 대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국가에게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총체적인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등 상응한 조치,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인정 등을 권고한다. 반세기 만에 조봉암에게 덧씌워진 누명이 어느 정도 벗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2009년 7월 31일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 50주기 추도식


죽산 조봉암 선생이 법살된 지 꼭 50주년이 되는 2009년 7월 31일을 하루 앞둔 7월 30일, 사회원로들과 여야 정치인 145명이 죽산의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진실과 정의, 인권은 이념의 문제를 넘어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헌정사상 '사법살인' 첫 희생자로 꼽히는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항일독립운동가면서 건국의 주춧돌을 놓고, 평화통일을 지향한 조봉암 선생이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는 여전히 온전치 못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우리 서명인 일동은 항일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제헌의원과 국회부의장, 그리고 초대 농림장관을 역임하고 두 차례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이 대한민국의 명예회복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법원의 신속한 재심 개시결정을 통해 조봉암 선생과 유가족의 명예회복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청원합니다."라고 밝힌다.

다음날인 7월 31일 오전 11시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 조봉암의 50주기 추도식에 노회찬은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과 함께 참석한다.


ⓒ노회찬재단


고인을 추모하며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고의 세월을 견뎌 오신 유가족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더불어 그 오랜 세월 동안 조봉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오신 점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조봉암 선생이 돌아가신지 1년도 안 돼, 4.19혁명이 일어났다. 김구, 여운형 선생의 뒤를 이어 조봉암 선생의 죽음은 그 다음해 4.19 혁명의 한 밑거름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4.19 혁명이 한 해만 일찍 일어났어도, 조봉암 선생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진보정치는 더 빨리 꽃피웠을 것이다. 그만큼 민주주의와 민생, 진보정치에는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림이란 없다. 이명박 정부의 독선과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지금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 민생, 사회진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현실에서 대중적인 목소리로 진보정치를 치열하게 설파한 조봉암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진보신당도 더 적극적인 진보정치의 길을 개척할 것이다. 더불어 억울하게 정치적 살인을 당하신 조봉암 선생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사법부는 재심을 하루빨리 결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진보신당도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다하겠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 판결 – "조봉암은 무죄"

2007년 9월 진실화해위의 권고가 나온 이듬해인 2008년 8월 조봉암의 유족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재심을 통한 사법부 과거사 청산을 강조해 온 대법원은 2010년 10월 이를 받아들인다. 석 달 뒤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부―대법원장 이용훈(재판장) 대법관 박시환(주심) 김지형 이홍훈 김능환 전수안 안대희 차한성 양창수 신영철 민일영 이인복―는 조봉암의 재심사건 선고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다. 조봉암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사법살인의 첫 희생자로 간첩죄는 조작이며, 조봉암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된 인권 유린 사건이자 사법권의 독립이 침해받은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을 법원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52년 만에 마침내 복권된 것이다.

대법원은 이날, 52년 전 자신들이 유죄로 판단한 부분을 모두 뒤집는다. 1959년 판결 당시 대법원은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는 혁신정치 실현 △생산·분배의 합리적 계획으로 민족자본 육성 △평화통일 실현 등을 내세운 진보당 강령에 대해 "국헌에 위배해 정부를 참칭, 북한에 동조해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은 "진보당의 경제정책은 사회적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작용·모순점을 완화·수정하려고 했을 뿐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체제의 골간, 대의제도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이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 통일론이었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고 해서 헌법에 위반된다거나 국가변란을 주창한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대법원은 또 남북을 오가며 북한의 지령과 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사업가 양이섭(일명 양명산)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조봉암의 간첩 혐의도 무죄로 판단한다.

그 판결문은 이러했다.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제헌국회의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과 1956년 제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고인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 후 진보당 창당과 관련한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로 사형이 집행되기에 이르렀는바,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

2012년 7월 31일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 53주기 추모제


ⓒ노회찬재단

2012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 죽산 조봉암 선생 53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노회찬은 추도사를 한다.

"저는 11여 년의 준비와 노력 끝에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때 저는 '41년전 무산된 조봉암 선생님의 진보당 정신을 잇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11년이 흘렀습니다. 과연, 41년 전의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다시 출발한다 라는 그 자랑과 약속이 지금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참담한 심정을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조금전에 상록수 노래를 조가로 들었습니다만, 25년 전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많이들 부르고 많이들 들었던 노래입니다. 지난 25년간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일정한 진전을 보았고, 죽산 선생님의 대법원 재심 무죄 판결도 그 민주화의 한 성과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5년간 우리 경제 민주화는 거의 진척을 이루지 못한 채,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시대적 과제로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육성으로 한국적 진보주의의 구체적인 내일까지 제시하는 죽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의 가장 적합하고 살아 있는 정치적 실천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오늘에야 의미 있는 일이 50년 전에 시작해서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50년 전부터 추진됐어야 될 일들이 선생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서 지난 50년간 묶여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가 지난 50여 년간 조봉암 선생님이 형장의 이슬로 가시면서 역사의 시간 바늘이 멈춘 채로 반세기가 흘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지금 다시 가기 시작한 이 역사의 시계 바늘이 제대로 정확하게 가도록 해야 할 의무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거 같습니다.
최근에 부끄럽고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죽산 조봉암 선생의 그 정치적 프레임이 우리 사회에 절실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또 다른 조봉암이 나올 수 있도록 진보당 창당 정신이 지금에서라도 한국사회의 발전에 강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죽산 선생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길은 죽산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우리 사회의 생생한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음 잊지 않고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동안 심려를 많이 끼쳐 드려서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도 함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10월 27일 대검찰청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

2017년 10월 27일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대검찰청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과거 검찰의 잘못을 지금의 검찰이 안고 갈 필요가 없다"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서라도 '조봉암 사법살인' 사건에 대해서 검찰이 사과하면서 정리해야 한다"고 검찰의 사과를 촉구한다.


ⓒ노회찬재단

노회찬은 2007년 9월 진실화해위의 재심권고 결정과 관련, "특히, 검찰과 관련한 부분이 있는데, 조봉암 사건 당시 '검찰은 아무런 증거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를 하였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은 소추의 대표기관으로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고 규정하면서, "이 사건에 대하여 2010년 당시 검찰은 '의견서를 통해서 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권고에 대해서 엄격한 증거·판단 없이 역사적, 주관적 가치판단에 따른 것이어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했다'고 비판"한다.
이어 노회찬은 "검찰이 재심권고를 거부한지 1년도 채 안 지나서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이 사건과 진보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의 이 재심 판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묻는다. 문무일은 "과거에 검찰이 권위주의 정부에 있었던 인권 보호기능이 약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답변한다.
계속해서 노회찬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마지막 검찰의 태도는 2010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심 권고에 대해서 강력히 부정하던 그 입장이 최종의 입장으로 되어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역사로 돌려보내는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 이 점에 대해 검토할 의향이 있는가?"라고 재차 질의했다. 이에 대해 문무일은 "지난번 과거사에 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조봉암 사건에 대해서도 유념하겠다"고 답변한다.

2018년 7월 31일 죽산 조봉암 선생 59주기 추모식


2018년 7월 31일 찜통더위 속에 100여 명의 사람들이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역을 찾았다. 그러나 매년 자리를 지켰던 노회찬은 추도사를 하기로 돼 있었음에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장은 "고 노 의원께서 추도사를 하기로 하고 자료집에 수록할 추도글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며 "그로부터 며칠 뒤 슬픈 소식을 듣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노 의원은 죽산 선생의 길을 좇아 진보정치를 실천해 왔다. 때문인지 추모제식마다 어김없이 참석했다"고 말했다(심규상, 「조봉암 59기...추도사 맡은 노회찬은 거기에 없었다」, <오마이뉴스>, 2018년 7월 31일).

이날 추도사에서 오유석(성공회대 교수)은 며칠 전인 7월 23일 삶을 마감한 고 노회찬을 추모하며, 그와 정의당을 죽산과 진보당에 견줘 '진보정당의 길'을 설파한다. 오유석은 "2017년 대선에서 정의당은 1956년 죽산이 받은 216만표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드디어 200만표를 넘어섰다. 그리고 조봉암과 진보당의 노선과 현실적 고민은 2016년 촛불혁명 이후 한국 민주주의 재구성을 말할 때 여전히 큰 가치와 실천으로 다가온다. 특히, 죽산이 주창한 평화노선은 2018년 판문점선언을 통해 분명하게 다가온다."며 "변화의 출발은 냉전과 분단의 한계에 과감한 도전한 죽산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자리매김과 함께, 정당정치의 지형을 진보로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조봉암과 노회찬 두 사람의 유언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두 사람을 추모하고 진보정당을 응원한다(인천일보, 2018년 8월 1일).

ⓒ노회찬재단


58주기에 이어 59주기에도 조봉암의 영정 앞에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가 놓여졌다. 대법원의 재심 무죄판결도 받았다. 그러나 기념사업회와 유족이 바라는 죽산의 명예회복 완결인 건국훈장 추서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11년과 2015년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광복절을 앞두고 "일제 말기 행적이 불분명하다"며 조봉암을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제외한다.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단신 기사를 문제 삼는다. 1941년 12월 23일자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주소가 부평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성금을 낼만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에도 국가보훈처는 유가족에게 서훈에 필요한 "보완 자료를 제출하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인천일보 2018년 7월 31일). 당시 일제에 골치 아프고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죽산이 정말 그런 돈을 냈으면 총독부에서 대서특필하고 죽산을 크게 이용했을 거(「조봉암이 떠난 지 60년, 딸의 간절한 염원」, <시사인>, 제592호, 2019년 1월 25일)라는 유가족의 항변에도 묵묵부답이다. 

※ 참조)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1년 8월 11일 국가보훈처 정관회 공훈심사과장은 CBS라디오 <정관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해 사회자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프레시안>, 2011년 8월 12일).
- 조봉암 선생의 전체 행적에서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150원 국방헌금 그거 하나냐
= 그렇다.
- 150원이 요즘 돈으로 얼마 정도냐
= 그 때 교사 봉급이 한 50원 정도 했다.
-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지 않냐
=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액수로 봐야 된다. 물론 (조 선생의) 그 공적은 인정이 된다. 다른 이유로 번복할 수 있는 그런 자료가 나온다든지 이렇게 될 때까지는 보류를 시켜놓는 것이다.
- 누가 어떻게 소명을 할 수 있냐
= 저희도 난감한 부분이다.
- 조 선생이 공산당 활동을 하던 시기였고, 아마도 이름만 빌려줬을 것이라고 유족들이 주장을 하면 되냐
= 소명…그런 주장을 가지고서는….
- (소명할) 무슨 자료가 하나도 안 남아있으면?
= 계속 보류가 되어 있는 그런 상황이 되겠다. 자료가 안 나오면 논의도 안 된다. (독립유공자 선정) 심사를 세 번 하는데 거기에서 의결된 사항이다. 포상의 보류는 1심, 2심, 합동심까지 가서 의결을 하는데 (심사위원) 명단을 밝힐 순 없다. 

2018년 7월 30일 국가보훈처는 또다시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에 보류 결정을 내렸다고 밝힌다. 3년만의 재심사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죽산을 외면한 것이다.
만약 노회찬이 있었다면, "보완자료를 제출하라"는 문재인 정부 국가보훈처의 이런 '일관된' 태도에 대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궁금하다.

엄혹했던 시절, 가명(假名) '박철환'과 '최형기'


▲일제강점기 조봉암 선생의 가명 '박철환'

일제강점기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가서 서명을 남긴다. 박철환(朴鐵丸)은 조봉암이 독립운동을 하며 쓰던 가명으로, '철환'은 총탄이란 뜻으로 조국 해방을 위해 전선에 나선 전사를 의미한다고 한다.
가명(假名)은 한자풀이 그대로 본인의 본명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가짜 이름을 말한다. 흔히 가명을 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떳떳하지 못해 실명을 숨겨야 할 때고,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혁명운동 등 체포를 피하기 위해 철저한 위장 생활을 하면서 사용하는 경우다.

님 웨일즈(Nym Wales)의 <아리랑>에 나오는 독립운동가 김산 역시 가명으로 본명은 장지락이다. 1896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하고('치하포 사건') 인천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다 탈옥한 김창수, 즉 백범 김구는 김두호라는 가명으로 전남 보성 쇠실마을에 은거한다. 중국에서는 60만원의 현상금을 건 일본의 체포령을 피하기 위해 장진구 또는 장진 등으로 이름을 바꾼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출신으로 '칠가살'(七可殺. 7가지 부류의 암살대상)의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약산 김원봉은 최림, 이충, 진국빈, 천세덕 등 17개의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노동자와 노동절>은 석탑출판사 사장 장명국과 최형기 공저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노회찬이 집필한 최초의 저서다. '최형기'는 당시 노회찬이 사용하던 가명으로 마치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 경감처럼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장길산을 쫓던 좌포도청의 포도종사관 이름이다. 노회찬은 "수배생활을 하던 나의 처지를 풍자하기 위해 최형기라는 이름을 썼다"고 말한다(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64쪽). 오데사 감옥 탈출과정에서 간수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한 것을 계기로 평생 이름이 된 '트로츠키'의 경우와는 다른 것 같다.
이외에도 노회찬은 청소년직업학교를 함께 다니며 형제처럼 친했던 동료의 이름인 '이동수',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여성독립운동가인 '김명시'라는 가명을 썼다. 노현기가 한 인터뷰에는 "마지막 가명은 필명과 다르게 김창남으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 참조) 정운영의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125쪽에는 김명시가 6.25 때도 활동한 여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공식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인 1949년 9월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하로 잠적한 김명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가 1949년 10월 11일 도하 일간지 2면 한 귀퉁이에서 실린 작은 기사로 그의 마지막 소식을 전하게 된다. <자유신문>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은 「북로당 간부 김명시, 부평서 유치장서 목매 자살」이란 제목으로 그의 최후를 간략히 전하고 있다.


'닮은꼴' 두 사람

▲ '닮은꼴' 조봉암과 노회찬


조봉암은 인천 강화 태생으로 인천은 그의 활동의 거점이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와 인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책임졌고, 1948년 제헌의회 선거와 1950년 2대 총선에서 당선된 곳도 인천을구와 인천병구였다. 인천광역시 홈페이지 '인천소개-인천역사-인천의 인물'을 검색하면 401번에 조봉암이 등장한다.
2019년 7월 19일 오후 인천대 송도캠퍼스 대강당에서 '노회찬 국회의원 1주기 추모음악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인천은 노회찬 의원의 제2의 고향이며 그가 진보정치의 꿈을 키운 곳이다."라는 인사말이 흘러나온다. 노회찬은 1983년 인천에서 용접사로 노동운동을 시작해 1987년 인민노련 창립을 주도한다. 인천은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며 산 '평생 동지'" 아내 김지선을 만난 곳이자, "먼 길을 함께 한 아름다운 동행"(노회찬재단 모아냄, <그리운 사람 노회찬>, 259쪽)의 첫 걸음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생전에 노회찬을 보면 조봉암이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가 안재성은 2017년 월간 <시대>에 기고한 「진보정당운동의 산증인, 노회찬」에서 노회찬을 '한국 현대 진보정당사의 주역'이자 '조봉암을 닮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고 정태영 선생과 <죽산 조봉암 전집 1-6> 출간 작업을 함께 한 오유석 교수는 2018년 7월 31일 죽산 조봉암 선생 59주기 추모식에서 "노회찬은 진보정당이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정치인이 되고, 그런 정당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살았던 조봉암과 진보당의 후예였다."고 말한다.

조봉암(1898~1959)과 노회찬(1956~2018). 60년 가까운 삶과 죽음의 시간 간격이 있음에도, 진보정당의 설계자이자 개척자로서 두 사람의 시선의 끝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조봉암은 「나의 정치백서」(<신태양>, 1957년 5월호, 별책부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보당이 걸어 갈 길은 뚜렷합니다. 공산독재도 자본주의 독재도 다 같이 거부하고 인류의 새 이상인 진보주의의 진리를 파악하고 만인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죽산은 "우리가 못한 일을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 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인천일보, 2017년 11월 15일) 라는 말을, 진보당 간사장으로 함께 옥고를 치른 윤길중에게 남긴다.

2016년 3월 20대 총선 당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선진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꿈입니다. 노동이 존중될 때 선진복지국가는 그만큼 빨리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노동존중사회를 만드는 데 이 몸 바치겠습니다."
1990년대 진보정당 건설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이 떠나갔지만, 노회찬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참 어려웠다. 새로운 역에 도착할 때마다 많은 동료들이 하차했다. 장기전을 유지해온 동력은 맨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정신과 의지와 열정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출발할 때 나를 이끌었던 그 기관차를 타고 계속 달렸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54쪽)
2018년 2월 20일 창비에서 주최한 '지혜의 시대' 연속특강 중에 노회찬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한다.
"1987년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길에 들어섰지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진보정당은 없었습니다.…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 제 평생의 목표가 됐습니다.…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진보정당을 만들기만 하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제 평생의 과업이라고 했는데, 또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10년 만에 진보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2000년의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제 역할은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4년 만에 국회의원이 되었지요.…제가 빠진다고 진보정당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남은 사람들은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도록 지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9, 135-137쪽)


▲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95쪽

서중석에게 조봉암은 "확고한 정치철학과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이자 이상과 현실적 대응이 조화를 이룬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다(「조봉암과 진보당」, 정태영․오유석․권대복 엮음. <죽산 조봉암 전집 6 : 한국현대사와 조봉암 노선>, 세명서관, 1999).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의 주요 정치 지도자 가운데 조봉암만큼 선거와 정당으로 상징되는 '정치'를 중시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봉암 정치노선의 특징은 정당정치, 의회정치, 대중정치를 결합하려 했다는 점이다. 조봉암은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꿈을 키웠고 정당 속에서 성장했으며 정당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 조봉암에게 '자생적'이고 독자적인 정당적 실천은 '조국과 민족과 국민을 존망의 위기로부터 구출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조봉암 이후 선거와 정당, 정치를 중시한 진보정치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노회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치가 희망이 되어야 한다"며 정치의 매력에 대해 "권력 의지를 실현하는 길이자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길"이라고 밝힌 노회찬은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과제를 풀 수 있을까요? 우선, 정치를 바꿔야 합니다. 불공정한 불법 채용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함도, 한반도의 평화도, 정치가 움직이면 바꿔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쿠데타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86쪽)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의 전략과 전망」(<노동사회> 통권 37호, 1999년 10월호)에서 정당과 진보정당의 역사를 개관한 뒤 선거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부르주아 대의체제 하의 모든 정당들은 선거를 통해 평가받고 선거결과에 따라 영향력의 증대와 쇠퇴를 겪게 된다. 정당인 한 이것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는 것은 지난 20년 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진보정당으로 성장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자기고백이다. 100년을 넘어서는 유럽 진보정당의 역사는 자신들이 취한 정책의 변천과 선거에서 획득한 의석 수의 변화를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노회찬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진보정치를 현실화시키는 무기는 정당, 즉 진보정당으로 단기적으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회찬은 "진보정당의 기본 발전전략이 야권연대일 수는 없다. 자신의 철학과 정책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기본이다.…더디다 해도 진보정당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난 여전히 믿고 있다. 진보정당이 독자적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기적 발전 전략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힘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을 동원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야권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야권연대에 기대지 않으면 잘하는 거고 야권연대에 기대면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35쪽; 31쪽)

한편 조봉암의 동지들은 그의 인품과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조현연, 「일곱 가지 닮은꼴 찾기」,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미래공방>, 2007년 3월호).
"조국의 미래이며 빛나는 희망의 별"(1959년 8월 2일 일본 도쿄에서 조봉암 구명위원회의 '조사' 가운데)이던 조봉암은, '반동.배신.타락'의 정치인이 아니라, 레닌처럼 정치를 예술의 경지에 두고 본, 정치가로 전환하고자 노력하던 혁명가였다(박기출 평)고 한다. 또 무모하고 저돌적(서상일 평)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혁명가다운 대범성에 넓은 적응성과 민첩한 실천력을 지닌 인물(박기출 평)이자, 선천적으로 명랑 쾌활하고 인정미가 풍부한 인물이기도 했다. 권대복은 남북전쟁의 치열한 와중에서 꿋꿋하게 평화통일론을 주창할 수 있었던 그의 의지, 어느 누구도 겨루어 볼 수 없었던 카리스마적 통치자 이박사와 대결할 수 있었던 용기, 그것은 그때의 많은 젊은이들이 지녔던 죽산에 대한 매력이라고 회고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역경에 빠져 있을 때 인간적 본질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게 마련…(죽산은) 자신은 배가 주려도 함께 고생하는 동지들을 먼저 생각했고, 사탕 반쪽이라도 쪼개 나눠 돌리는 자상하고 섬세한 동지적 애정을 보였던 것"(권대복, <월간 인물계> 1989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노회찬의 동지들은 그의 인품과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노회찬재단(준) 실행위원들, 「함께 꿈을 일구며」,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나에게 인간 노회찬은 함께 일하는 후배들을 동료로 대하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말없이 함께 나누는 선배이자 동지였다. 노회찬처럼 진심으로 존경하고 믿음을 줄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김윤철 평). "언제나 자리를 지키면서 우리 팀을 이끌어줄 대장이라 생각했다. 그를 대장으로만 생각하고 전장으로 밀어내었으니, 단기필마로 나가 싸우다가 죽게 하였다. 은퇴하시면 종종 찾아뵙고 세상사 지혜를 배우고 이야기를 듣는 어른으로 편하게 모셔야지 혼자 계획했다. 이제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없음이 너무 서럽다. 아직도 그의 죽음이 농담 같다"(박갑주 평). "61년 동안 122년을 살듯이 치열하고 엄격하게 살았던 노회찬은 호기심 많은 만년 소년이었다. 그는 연애를 하듯이 여성들에게 편지와 장미꽃을 보냈던 '여성의 날'을 두근두근 기다리던 낭만쩌는 소년이었다"(박규님 평). "당신과의 토론은 치열했지만 술자리는 유쾌했습니다. 조직이 처한 현실과 진보정치의 미래가 늘 먼저였던 사람, 당신은 큰 형님이었고 스승이었고 친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제 자신이 밉습니다."(이종석 평).
노회찬을 "진보보다 예술을, 예술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인간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평한 30년 동지 조승수(현 노회찬재단 사무총장)는 이렇게 덧붙인다(「추모의 글: 그를 보내며」, 노회찬, <노회찬의 진심>, 사회평론, 2019).
"오랜 시간 그와 함께 하였던 내가 내린 결론은 신념과 책임의 문제였으리라 짐작합니다. 굳은 신념이 있었기에 항상 유연했지만, 자신에게는 늘 엄격했던 무한의 책임의식이 그를 멈추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가고 싶었던 길이, 하고 싶었던 일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유시민(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2018년 7월 26일 추도식에서 그를 보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회찬이 형.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어서 형을 좋아했어요. 다음 생은 저도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때는, 만나는 첫 순간부터 형이라고 할께요. 잘 가요, 회찬이형. 아시죠? 형과 함께한 모든 시간이 좋았다는 것을요."

두 사람은 모두 휴머니스트였다. 그 또한 닮은꼴이다.
2006년 4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조봉암의 딸 조호정은 "아버지는 제게 조국과 이웃을 위해 늘 선량하고 정직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상냥하고 자상했던 아버지는 낭만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고 추억한다(「아버지는 낭만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 <오마이뉴스>, 2006년 7월 31일).
노회찬의 길동무 김윤철에게 노회찬의 정치적 삶은 '약자들의 벗'이라는 한마디 말로 압축된다.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부와 권력의 횡포로 고통받고 상처 입은 자들을 보듬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시민적 권리를 지켜내고자 애썼던 정치가였다. 그는 여성, 노동자, 철거민, 청소노동자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동반자'이자 '호민관'이었다.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정치다운 정치'를 구현코자 했던 이가 걸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길이었다."(김윤철, 「약자들의 벗」,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2019, 후마니타스, 304쪽)
이와 관련해 노회찬 스스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좋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휴머니스트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크다." (정치와평화연구소의 컴퓨터통신, '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년 11월 3일)
"누구에게나 그렇듯 삶은 한번 밖에 없죠.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껴야 해요. 삶 자체를 소중하게, 무겁게, 동시에 낙관적으로 즐겁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만 잘사는 삶이면 되나요. 개인의 삶이 우선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다들 형편이 어려운데 나만 잘 산다고 과연 내가 기쁠 것이냐. 그렇지 않죠. 그런 점에서 저는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고, 이것이 제 가치관인 휴머니즘의 바탕입니다." (경향신문, 2011년 1월 17일)

끝으로, 조봉암과 노회찬이 남긴 말에서도 두 사람의 닮은꼴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 망우리 조봉암 선생 묘소 입구에 세워진 어록비
"이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 노회찬,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 2010년 5월), 5쪽

두 사람이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을 헛되이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 조봉암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 노회찬

조봉암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바로가기)를, 노회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노회찬재단 홈페이지(바로가기)를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