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이정표' 4.19를 만나다
2019.04.19 08:34:58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4.19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4월 19일 오늘은 1960년 4월혁명의 전 과정을 상징하는 '피의 화요일'이 발생한지 59주년이 되는 날이다. 4월혁명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안장봉안하고 그 위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국립4·19민주묘지가 조성된다(1962년 12월 21일 기공식, 1963년 9월 20일 묘지준공식 및 기념탑 제막식).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참배객들에게는 민주혁명의 의의와 생활 속에 보훈정신을 담아가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건전한 휴식공간을 제공한다"는 국립4·19민주묘지가, 박정희 군정 시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인 재건국민운동본부에 의해 기공식과 준공식을 치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4월학생혁명기념탑 조형물(국립 4.19 민주묘지)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 이틀 후인 4월 28일, 3.15 부정선거의 주역이자 이승만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과 그 일가는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 큰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일가족이 자살하는 최후를 맞는다. 이기붕 일가가 살던 곳은 종로구 평동 116번지로,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렸다. 김동리, 박종화, 모윤숙 같은 어용 지식인과 문화예술인 무리는 만송(晩松) 이기붕을 제2의 이승만으로 떠받들었다. '만송족'(晩松族)이라 불린 이들이 활개를 칠 정도였으니 당시 이기붕의 권세를 짐작할 만하다. (<오마이뉴스>, 2019년 3월 18일)

이기붕 일가가 집단 자살한 후 부정축재로 쌓아 올린 이기붕 일가의 재산은 15억 환으로 밝혀졌다. 이기붕 일가 재산은 대부분 상속인이나 연고자에게 양도됐고, 이기붕 일가 저택과 일부 재산만 국가에 귀속됐다. 이기붕 저택은 4.19혁명희생자유족회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됐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부정선거의 주역 이기붕의 집터가 혁명기념도서관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4.19혁명기념도서관은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은 흔치 않다고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4.19'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현행 헌법인 1987년 9차 개정 헌법의 전문이다. 


4.19가 헌법 전문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4월혁명을 통해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아니라,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인 1962년 5차 개정 헌법 때이다.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된 헌법을 이제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4.19와 5.16의 이념이 새 헌법의 정신적 기반임을 밝힌 것이다, 그 이유는 반헌법적 쿠데타를 통한 기존 정부의 전복이었기에 취약한 정통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4.19는 '의거'로, 5.16은 '혁명'으로. 이처럼 '쿠데타'가 '혁명'으로 둔갑한 사이 4.19는 오랫동안 '혁명'이 아닌 '의거'로 불렸다. (※ 이와 관련해서는 5.16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4.19를 격하시켰다는 견해와 함께, 당시 의거와 혁명의 개념적 차이를 잘 몰랐을 것이라는 일부 견해도 있다.)

※ 12.12와 5.17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진행된 1980년 8차 개헌 전문에는 4.19는 5.16과 함께 사라진다.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제5민주공화국의 출발에 즈음하여…1960년 6월 15일, 1962년 12월 26일과 1972년 12월 27일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2018년 4월 19일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기념사를 통해 "우리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대한민국 정통성의 원천으로 선언한 것은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둔 정당한 평가입니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4·19혁명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중에 의해 절대권력을 무너뜨리며,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싹틔웠습니다. 4·19혁명은 아시아 최초의 성공한 시민혁명이라는 세계사적 위업이 됐습니다. (…) 4·19는 죽지 않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활했습니다. 4·19는 1979년 부마항쟁으로,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되살아났고, 2016년에는 촛불혁명으로 장엄하게 타올랐습니다. 앞으로도 4·19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4・19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이정표입니다. 동시에 4·19는 대한민국의 장대한 미래를 비칠 불멸의 횃불입니다."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다섯살배기 노회찬


▲ 1960년 3월 15일 당시 민주당 마산시대책위 명의의 3.15선거 부인 공고(왼쪽),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의 사임서 사본(오른쪽).


4월혁명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정부여당이 개표 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그 도화선은 3·15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한 3·15 마산의거였다. 뒤이어 이에 참여한 김주열이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오르고 이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186명(183명, 185명이라는 설도 있음), 부상자는 6026명(1920명이라는 기록도 있음)이었다. 4월 25일 400여 명의 대학교수단이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계엄사령관 송요찬, 계엄군의 선제발포 금지 명령)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붕괴한다. 4.19일 '피의 화요일'이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로 화하게 된 것이다.


▲ 1960년 4월 19일 서울대 문리대 <4.19 선언문>(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1960년 4월 19일 그날. 5살의 노회찬은 고향이자 주소지인 부산이 아니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다(2003년 1월 1일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퍼슨웹 인터뷰). 


저는 4.19와 5.16날이 다 기억나요. 저는 1960년 4월 19일날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거든요. 내 나이가 5살 땐데. 엄마 따라 외삼촌 면회 갔다가 나오려 하는데 형무소 근처에서 데모가 벌어지는 바람에 못 빠져 나와서 쩔쩔맸던 기억이 나고요. 또 열차 타고 부산에 왔을 때 우리 집 근처에 도지사 공관이 시위 민중들의 돌팔매질로 파괴되고 우리 식구들이 덜덜 떨고 있던 장면이 기억나고요.

작은 외삼촌의 이름은 원태진(元泰珍). 노회찬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 작은 외삼촌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원태진은 1959년 "반팟쇼투쟁청년동맹의 조직책 원태진, 신국가보안법 위반", "1958년 11월부터 1959년 3월까지 '반팟쇼투쟁청년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불온삐라를 살포" 등의 기사를 통해 신문에 등장한다. 당시 원태진은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었으며, '세미나와 유인물 배포'가 "국가변란 목적의 그룹 조직과 민심 소란"으로 조작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7년간 수형생활을 하다가 출소한다. 이승만 정권 말기 이른바 '보안법 파동'을 몰고 온 신국가보안법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 참고로 노회찬의 외삼촌은 두 분이다. 큰 외삼촌 원태호(元泰浩)는 1924년 함남 함흥부에서 출생했다. 기록에 따르면 원태호는 1942년 3월 31일 함남 공립중학교 졸업, 1944년 5월 10일 보성전문학교 경제과 2학년 편입 후 1944년 징병반대 유인물 살포로 체포되어 1945년 8월 원산형무소에서 석방된다. 해방 후 민애청(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47년 8월에 구속, 1950년 서울형무소(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된다. 이후 행적이 잘 보이지 않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구월산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당시 뇌출혈을 앓고 있던 외조부가 전해 듣게 되는 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 보안법 파동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원태진 등이 체포되기 몇 달 전인 1958년 겨울 이른바 '보안법 파동(2.4파동)'이린 것이 정국을 강타한다. 12월 24일 국회에서 경위권 발동 속에 여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와 58년의 제4대 민원선거 결과 민심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나가고 있음을 눈치챈 이승만과 자유당은 그 원인을 야당과 언론의 선동적 비판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여론과 국민의 비판을 억누를 길을 찾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자유당은 전문 42조의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마련, 1958년 8월 5일 국회에 제출한다. 


그 골자는 △보안법 적용 대상의 확대 △이적행위 개념의 확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을 받고 그 이익을 위해 선전·선동하는 행위의 처벌규정 신설 △군인 및 공무원의 반항·선동행위 처벌 규정 신설 △헌법상 기관의 명예훼손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 신설 △사법경찰관의 조서 증거능력 인정 및 구속 기간 연장 가능 △군 정보기관의 간첩수사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등. 


이에 덧붙여 이승만 정권은 「허위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조항도 끼워넣는다. 이 개정안은 국회에 상정되자마자 언론 자유와 인권보장을 침해하는 악법으로 규정되어 야당 및 법조계·언론계의 빗발치는 반대에 부딪쳤으나, 12월 24일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30여분 만에 통과된다. 신국가보안법은 1959년 1월 15일자로 발효된다.


1959년 3월 3일자 부산일보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지법에서는 二일 상오 서울, 부산, 大邱 등지에서 불온「삐라」를 뿌려오던 다음 八명에 대하여 「신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하였다. 이들은 지난해 十二월 초순경 반「팟쇼」청년동맹이란 불법단체를 조직하여 「평화통일 만세」 등의 불온「삐라」를 뿌려온 것이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윤완병, 이선환, 안순근, 이인철, 김태봉, 이건우, 이응기, 원태진."

1959년 5월 7일 오후 서울 지방법원 대법정(정인상 부장판사)에서 「불온삐라살포사건」의 원태진, 이응기, 이건우 등 세 피고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피고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다. 이날 사실 심리에서 원태진 피고는 "일인(日人) 추전(秋田)이 저작한 「평화통일 13강」이란 책을 읽고 감명깊은 바 있어 구체적인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괴뢰가 주장하는 「평화통일」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우리가 부르는 「평화통일」이란 종교적인 면에 기반을 둔 일종의 「박애」와 「인류애」의 정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대국적인 인류의 근본 이상을 말한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이응기, 이건우 양 피고는 "「쎄미날」을 위주로 한 「써클」을 가진 일이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반팟쇼투쟁청년동맹」 같은 간판 아래 행동을 한 일이 없다"고 진술하면서 기소 사실의 일부를 부인하였다(동아일보, 1959년 5월 8일).


1959년 6월 22일 오후 황진영 검사는 "설사 이북 괴뢰집단의 지령은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구룹」을 비밀조직하여 민심을 소란시킨 바 있어 극형을 구형하려 하였으나 아직 배움의 도상에 있는 학생이고 미성숙한 청년들이라는 점을 참작하였다"라는 논고에 이어 원태진 이응기 양 피고에게 「징역 20년」 이건우 피고에게는 「징역 15년」을 각각 구형하였다(동아일보, 1959년 6월 23일).
1959년 7월 13일 오후 서울지법 정인상 부장판사는 「반팟쇼동맹」사건으로 기소된 원태진과 이응기에겐 징역 15년, 이건우에겐 징역 7년을 언도했다(동아일보, 1959년 7월 14일).


▲ 왼쪽은 경향신문 (1959.3.2.), 오른쪽은 동아일보 (1960.3.3.).


▲ 왼쪽은 동아일보 (1959.3.28.), 오른쪽은 동아일보 (1959.7.14.).


▲ 왼쪽은 원태진 고등법원 판결, 오른쪽은 원태진 대법원 판결.


20여년이 흐른 뒤인 1983년 원태진은 분자교정요법(메가비타민요법)의 권위자로 신문에 등장한다.


"만성간염.심장병.당뇨병.비만증.암.정신분열증 등 각종 고질적인 만성난치병을 식사 개선과 비타민.미네랄 등의 영양물질 투여로 치료하는 분자교정요법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메가비타민요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치료법은 한국성인병예방협회 부설 분자교정의학연구회(회장 원태진)가 소개한 것으로 미 스탠퍼드대학 분자교정의학연구소의 노벨상 수상자 라이너스 포올링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난치병의 최신요법. 분자교정의학이란 신체 내에 항상 존재하는 영양물질 또는 생리물질의 세포내에 있어서의 분자 레벨의 농도를 여러 가지로 조절하여 정상으로 교정하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 및 치료하는 새로운 의학적 방법을 의미한다."(매일경제, 1983년 12월 19일).

▲ 원태진의 저서들.


교과서와 노회찬, '교과서 속의 4.19'


청소년 시절 노회찬은 교과서를 가장 좋아했고, 또 선생님을 존경하던 소년이었다. 


"저야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살았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 잘못은 없습니다. 교과서대로,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까 이렇게 돼버렸어요."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생각해봤어?-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웅진지식하우스, 2015, 12쪽). 


이후 잘못된 거대권력에 대한 노회찬의 저항은 4.19가 웅변하고 있는, 불의에 대해 맞서는 정의로운 삶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2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의 「5. 혁명과 발전」을 보면 "사변 후의 국내 정세-4·19 의거-4·19 후의 혼란-5·16 혁명-제3공화국의 오늘"로 구성된다. <고등학교 국사>는 4.19는 '의거'로, 5.16은 '혁명'으로 칭하면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4.19는 큰 문제가 없이 설명된 반면, 5.16에 대한 설명은 심각한 역사 왜곡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5.16'혁명'은 4.19'의거'의 계승이자 발전"으로 표현된다.


4·19 의거: 독재를 꿈꾸던 자들의 횡포는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선거에 자신이 없었던 집권 세력이 갖은 부정을 다하게 되자, 정의에 용감한 전통을 지닌 젊은 학도들의 궐기와 국민의 누적된 불만이 동시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자유와 민권 수호의 민주 투쟁은 3·15 선거 전인 2월, 대구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났으며,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 규탄의 대규모 시민 항거가 일어나더니, 마침내 서울 시내의 모든 학생들이 총궐기하였다. 4월 19일 독재 정권 타도와 부정 선거 규탄의 소리는 전국에 진동하였으며, 시민마저 이에 합세하였고, 또한 전국으로 파급되어 갔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하였으나, 25일의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 발표와 데모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니, 영구 집권을 꿈꾸던 독재 정부는 12년 만에 타도되고 4월 의거가 성취되었다.


5·16 혁명: 4월 의거 이후 민주적 안정 세력이 자리잡히지 못함으로써 사회의 혼란과 불안이 증대되는 가운데 38°선 이북의 공산 세력의 야심이 꿈틀거리게 되자, 파쟁과 혼란을 일소하고 공산 침략에서 국가와 민족을 건지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 5·16 혁명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한 청년 장교들은 혁명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5·16 혁명으로, 이 혁명은 4·19 의거의 계승이었으며 발전이었다. 혁명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하여 군정을 펴며, 국민 앞에 6대 공약을 제시하고 국정 개혁, 사회 기풍 쇄신, 조국 방위에 매진하게 되었다. 한편, 경제 안정이 있어야 국가 발전을 기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 자립에 매진하게 되었다. 2년여의 군정은 국정 개혁, 부정부패 시정, 관기 확립, 사회 안정에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민주 국가의 구현을 위한 민정 복귀가 시급히 요청되었다.

사실 노회찬이 고등학교를 다녔던 1970년대에는 국정교과서 중심으로 교과서 정책이 전개된다. 국정화 이전까지 한국사 교과서는 중학교용 11종, 고등학교용 11종으로 총 22종이었으나 국정화 이후부터 1종의 국정교과서로 통일됐다. 과거 국정교과서는 독재 정권의 홍보 도구로 충실히 기능해왔다. 심지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당대 권력의 입맛에 맞추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될 뿐만 아니라 되레 승승장구하며 벼슬길에 올랐다. 역대 국정교과서를 들여다보면서, 권력에 빌붙어 학자적 양심을 파는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서부원, <오마이뉴스>, 2015년 11월 25일)

노회찬이 다닌 초량초등학교(1963.3.~1969.2.)와 부산중학교(1969.3.~1972.2.) 시절은 5.16 군사쿠데타에 따라 제3공화국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제2차 교육과정기(1963~1973)에 해당한다. 그 정점에 있었던 중대 이슈가 '국민교육헌장' 선포이다. 경기고 시절(1973~1976)은 제2차 교육과정기와 10월유신의 후속으로 마련된 제3차 교육과정기(1973~1981)에 걸쳐 있으며, 초·중·고등학교 전반에 걸쳐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을 크게 강조한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에 국사 교육이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며, 민족중흥은 민족사관의 확립에 근거하도록 하여 독재를 민족이라는 용어로 포장하려 하였다. 이처럼 국가가 교과서의 내용과 해석을 독점하는 국정교과서로 <국사>가 바뀜으로써 역사적 사고력·상상력·비판력을 배양한다는 역사교육의 본질이 크게 훼손되고 만다.


▲ 국민학교에서 사용한 <국민교육헌장(그림책)>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국민 교육의 이념과 지향 과제 및 방향을 밝힌 국가 문서이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임을 밝히고 있는 이 헌장은 1970학년도부터 초등학교 4학년 이상 모든 교과용 도서의 앞표지와 표제지 사이에 게재되었다. 각급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암기할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고, 암기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체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 암송대회와 글쓰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일본의 메이지 천황시대에 제정한 군국주의적, 국수주의적인 교육칙어를 연상하게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4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6년 12월, 탄핵소추안 가결로 박근혜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인 와중에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을 시도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2015년 10월 교육부가 중·고교 역사(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공식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11월 2일 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사흘 앞두고, 노회찬은 고시 이후에도 갈등이 계속될 것을 내다보며 "교과서 국정화는 엎질러진 물이 아니라 엎질러진 휘발유가 되는 거죠."라고 묘사하기도 한다(한겨레 2015년 11월 3일).
2017년 5월 9일 대선을 통해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2일 교육 분야 첫 번째 업무지시로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를 내놓는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5월 31일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를 국·검정 혼용에서 검정으로 전환하는 내용으로 고시를 개정해 관보에 게재한다. 이로써 약 1년 7개월간 이어온 국정교과서 논란이 폐지로 종식된다.


▲ 2016년 12월 20일 광화문에서 국정교과서 철회 촉구 1인 시위 하는 노회찬과 서울시 교육감 조희연. Ⓒ 노회찬재단


고등학교 친구들과 수유리 4.19묘지 참배

1973년 4월 18일 경기고등학교 1학년 3반에 재학중인 고등학생 노회찬은 수유리 4.19묘지를 친구들과 함께 찾아간다. 2012년 4월 18일 트위터와 1년 뒤인 2013년 4월 19일 페이스북에는 당시 노회찬의 4.19묘역 참배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올라와 있다.

김종필 총리 등 5.16쿠데타세력이 4.19기념식에 설치는 게 못마땅해서 고교시절엔 4월 18일에 친구들과 참배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를 제가 낙선시킬 줄 꿈에도 몰랐던 아득한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2012년 4월 18일 노회찬 트위터)

40년 전 오늘 유신체제하의 암울한 심정으로 수유리 4.19묘지를 찾아 마음을 달랬던 고교 1학년 때의 모습입니다. 오늘 4.19 53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지난 40년의 의미를 반추해 봅니다.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만큼이라도 만들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 앞으로 가야할 길들. 민주주의의 나무는 여전히 피와 땀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2013년 4월 19일 페이스북 글)

노회찬의 기억은 이렇다. 

4.19도 1학년 때부터 참배했어요. 그 당시 19일에 가면 보기 싫은 김종필 같은 정치인 보니까 그거 보기 싫다고 우리는 18일에 갔죠. 참배하고 끝나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민청학련 사건이 2학년 때 있었는데 학교 끝나면 교실문 걸어 잠그고 민청학련 유인물 낭독하고. 그때는 우릴 지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우리끼리 모여서 했죠. 그렇게 같이하던 친구 중 6명이 국가보안법으로 나중엔 감옥에 갔다 왔어요.

▲ 1973년 4월 18일 수유리 4.19묘지 ‘수호자상’과 노회찬.


사진의 '수호자상'은 4월학생혁명기념탑 좌우로 1개씩 위치해 있는데, 남녀 한 쌍이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형상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호자상 뒷면의 안내설명서('4월학생혁명기념탑을 세우며') 이름 가운데 '탑문 지은이 이은상'이 눈에 띈다. '친일'과 '독재 미화' 인물인 노산(鷺山) 이은상. 그가 쓴 글귀와 그의 삶의 궤적이 참 아이러니하다.

▲ 기념탑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군상환조’. 4·19혁명 당시 민중의 형상을 반추상적으로, 그날의 현장을 지켜보며 후세에 이를 증거하는 묵시적 형상을 표현한 것임(오른쪽), 기념탑 비문(왼쪽)


친구 정광필은 「1973년에 입학한 경기고 1학년 3반의 악동들」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정운영, <정운영이 만난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60-61쪽). 

"경기고등학교는 서클 활동이 활발해 4월이면 신입 회원 모집과 오리엔테이션으로 바빴다. 특히 토요일이면 야외 행사가 많았는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노회찬이 4.19를 앞두고 수유리 묘소를 참배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벌써 학기 초부터 눈이 맞은 몇몇이 두말없이 모였다. 19일은 꼴도 보기 싫은 정치인들이 광내는 자리이니 우리는 전날 참배하자 하여 4월 18일 수업이 끝난 후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수유리 묘소를 찾았다. 최용석, 오재학, 남궁영, 이종걸, 이범, 장석, 나, 노회찬 등. 이후에도 우리의 행사는 계속됐다. 1974년 2학년 때는 민청학련 사건 등의 겹치면서 인원이 더 늘었고, 고3 때도 다소 줄긴 했지만 모임은 유지됐다. 그때 묘소 앞에서 다짐한 마음이 지금껏 30여 년을 살아오며 내보이고 있는 모습의 뿌리이지 않을까?"

고려대 '4.18 마라톤'

노회찬은 '국방의 의무'를 마친 뒤(1977년 4월 25일 ~ 1978년 7월 4일),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매년 4월 18일이면 고려대는 '4.18 마라톤' 행사를 한다. 고등학교 시절 100미터를 12초대에 주파하던 노회찬이 대학 재학 시절, '고려대 4.18 마라톤'을 뛰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3천여 학생들은 인촌동상 앞에서 <고대신보> 편집국장 박찬세가 기초한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라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연좌시위를 벌인다. 이들은 연행 학생 석방과 "대통령이나 내무부장관이 직접 나와 부정선거를 해명하라"고 요구하며 ① 행정부는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라 ② 행정부는 더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 정치, 살인정치를 집어치워라 ③ 행정부는 명실상부한 민주정치를 실현하라 ④행정부는 이 이상 우리나라를 세계적 후진국가로 만들지 말라 등 4개항의 대정부 건의문을 결의하였다. 

오후 6시 40분 자진해서 연좌데모를 풀고 경찰 차량의 선도를 따라 학교로 돌아가던 중 학생들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20여명이 크게 다친다. 괴한들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단장 임화수) 동대문 특별단부 소속 조직폭력배들이었다. 동대문 경찰서는 이튿날 폭력배 8명을 연행하였으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의 지시로 곧 석방한다. 이 사건은 다음날인 4월 19일 총궐기, 4월 26일 이승만 하야 성명 발표로 이어진다. 이 습격을 주도한 임화수 등 폭력배들은 1961년 8월 25일 혁명재판소에서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받았는데 임화수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 오른쪽은 고려대 4.18 선언문 친필본 1쪽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왼쪽은 국립 4.19 민주묘지 4.19혁명기념관.


▲ 1960년 4월 18일 의사당 앞에서 마산학생 석방 등을 외치면서 열좌(列坐)투쟁을 하고 있는 고려대 데모대(오른쪽), 1960년 4월 18일 정치깡패의 급습으로 쓰러져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왼쪽)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에 당시 고려대 학생회장이었던 조춘구(경제학과 66학번)가 '4.18 마라톤'을 처음 개최한다. 마라톤 구간은 고려대 4.18 기념탑 앞에서 묵념을 한 뒤 운동장을 출발해 학교 정문-종암로-미아리-수유리-국립4.19 묘역 4.19학생혁명기념탑(반환점)-수유리-미아리-종암로-고려대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총 16.2km 코스다.
※ 2008년 4월 18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나에게 묻는다'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올린다. 4.19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4.19의 정신인 "자유 민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면 한 번쯤 음미해볼 만한 글이다.

나에게 묻는다 4월 18일 (금) 맑음 

낮 12시경 KBS 라디오 박에스더 인터뷰를 기다리던 중 아주머니 한분이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나이 40세. 두 아이의 엄마라며 부천시 원미구에서 2시간 반 걸려 난생처음 상계동에 왔다면서 상계동이 이리 먼 줄 몰랐다고 한다. 가지고 온 분홍보자기를 풀더니 다양한 떡들이 정성스레 담겨져 있는 대나무 바구니를 열어 보인다. 40년간 떡집을 운영해온 70세 시어머니가 연로해서 오늘 떡집 문을 닫는 날인데 마지막 떡을 나에게 주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시어머니와 함께 만든 작품이라 한다. 어제밤 MBC 백분토론도 보았다면서 힘을 내라고 한다. 다음 선거 때는 가게문을 닫고서라도 며칠간 상계동에 와서 선거운동 하겠다고 한다. 

전화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보니 어느새 후원당원으로 등록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박규님 동지가 맛을 보라며 떡을 한접시 담아주는데 집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새벽부터 저 떡을 빚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정성이 천근만근 무게로 가슴을 누른다. 

어제 밤엔 퇴근한 직장인 부부가 유모차에 아이를 싣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둘다 후원당원으로 가입하면서 힘내라고 말한다.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 거리에 나서면 많은 사람들이 선거운동 마지막 날보다 더 적극적인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해온다.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나, 찍었는데....꼭 될 줄 알았는데...."이다. 그럴 때마다 참으로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나의 낙선으로 실망과 좌절을 경험한 분들 앞에서 나는 피해자 앞에 선 가해자일 뿐이다. 기쁜 마음으로 기대를 갖고 투표했다가 결과에 실망한 분들이 심경의 일단을 털어 놓을 때마다 나는 영락없는 죄인이다. 일주일째 낙선인사를 다니고 있지만 낙선인사란 낙선자가 위로받기 위한 인사가 아니라 사과하는 인사라는 것을 첫날부터 알게 되었다. 

선거결과가 발표되자 인터넷에서 일부 격앙된 네티즌들이 노원구 주민을 원망하기도 한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던지는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집값상승과 뉴타운에 대한 기대감으로 상대후보를 찍었다는 분들에게도 아무런 유감이 없다. 먹고 살기 막막한 상태에서 부동산가격상승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여겨지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나 이분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언제 한번 제대로 된 희망과 대안으로 다가선 적이 있는가? 얼굴이 잘생겨서 상대후보를 찍었다는 아주머니의 발언은 오히려 희망을 주지 못하는 진보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투표를 거부한 50%에 가까운 유권자들의 질책은 그중 가장 두려운 대목이다. 투표 기권을 나태한 시민의식의 소산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누가 되더라도 나아질 것이 없다는 절규 앞에서 진보정치는 과연 당당할 수 있는가? 

시인 안도현이 우리에게 물었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오늘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를 거부한 사람들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 너는 그들에게 한번이라도 희망이 된 적이 있느냐> 

같은 물음을 제대로 된 진보정당으로 거듭나려는 진보신당에게도 던진다.

2018년 4월 13일 오후 7시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고려대 총학생회와 민주동우회에서 주최한 4.18 강연을 한다. 강연명은 <4.18의 현재적 의미와 한국 민주주의의 전망>. 주최측의 한 사람인 김준수의 기억에 따르면, 4.18마라톤을 뛰었다는 이야기는 강연 중에 없었고, 그에 관한 청중 질문도 없었다고 한다.


ⓒ 노회찬재단


정치인 노회찬의 국립4.19민주묘지 참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4.19묘역을 참배한 노회찬은 정치인이 돼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참배를 지속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2년 8월 9일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출마 기자회견을 마치고 권영길 후보와 노회찬 사무총장 등 당 대표단과 당원들은 수유리 4.19묘역을 찾아 참배한다. (<진보정치> 99호, 2002년 8월 12일~8월 18일)

ⓒ진보정치


▲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 창당대회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 공동대표가 된 노회찬은 4월 19일 오후 4.19혁명 48돌을 맞아 서울 수유동 국립4.19묘지를 참배하며 방명록에 이렇게 쓴다.


영령들의 값진 희생을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데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노회찬재단


2년 뒤인 2010년 4월 19일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은 4.19 혁명 50주년을 맞아 수유리 4.19 묘역에서 진행된 진보신당과 진보진영 합동참배식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노회찬재단


어느덧 50년이 흘렀다. 4월혁명 50주년을 맞는 수유리 묘역에서 4월혁명도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현실을 발견한다. 요식적인 정부행사와 여전히 뜨거운 마음으로 찾는 시민들 외에 자발적으로 묘역을 찾는 시민들이 적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4월혁명의 정신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4월혁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 어떤 경우에도 민중의 피와 눈물로만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왔고 앞으로도 피와 희생으로만 한 걸음이라도 전진할 수 있다는 엄연한 진실이다. 사실 4월혁명이 쟁취한 소중한 민주주의가 군홧발로 짓밟히고 나서 다시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도 고초를 자초하신 선배 원로들께서 참석해 계신다. 그 결과 6월 항쟁도 있었고 두 번에 거린 민주정부의 출범도 있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우리의 과제는 민주주의다. 우리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4월혁명 이전으로 후퇴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는 것 이외에 노동자 서민에게 필요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민주정부 10년 사이에도 억압당해왔다. 이제 우리는 부정선거 없는 민주주의 원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식의 민주주의 아니다. 땀흘려 일하는 모든 일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요구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4월혁명 앞에서 머리 숙여 죄송함을 고백한다. 우리 앞에 놓인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의 과제는 좀 더 무엇을 잘 해보는 식으로 해결 안 된다. 새로운 틀로 새로운 정신 하에 함께 모일 때만이 우리 앞에 부여된 이 무거운 과제를 실현할 수 잇을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빵 부스러기 줍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조그마한 것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4월혁명 50주년, 우리는 21세기의 새로운 민주주의 꽃피워야할 책무가 있다. 한 없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피와 눈물로서 한걸음 한걸음 전진시키는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4월 영령들에게 엎드려 절한다.


2012년 4월 19일 오후 노회찬은 서울 강북구 4.19 민주묘지를 찾아 분향한다.

ⓒ노회찬재단

2013년 4월 19일 4.19혁명 53주년을 맞아 노회찬 공동대표를 비롯한 진보정의당 지도부(천호선·송재영·이소헌 최고위원, 심상정 의원, 박창완·정연욱 서울시당 공동위원장, 김형탁 경기도당 공동위원장, 김성진 인천시당 위원장 등)가 4.19민주묘지를 참배한다. 노회찬은 참배에 앞서 방명록에 "4.19정신 계승하여 경제민주화 이루겠습니다"라는 내용의 글귀를 남겨 삼성X파일 문제 등 경제 정의를 위협하는 불의한 일들과 꾸준히 맞서 싸울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2017년 4월 19일 정의당 노회찬 상임선대위원장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와 함께 제57주년 4.19 혁명 기념식에 참석한다. 이날 기념식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공헌했던 4.19혁명 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행사로 '4.19 정신으로 이룩한 국민주권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황교안은 대통령권한대행 신분으로 참석한다. 노회찬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공안검사가 가장 적성에 맞다는 황교안. 기념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4.19혁명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확고히 뿌리내리게 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자유·민주·정의의 4.19정신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대장정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극단적 대립이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를 인정하는 조화로운 사회가 돼야 할 것입니다.…지금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4·19의 정신과 열정을 이어간다면 어떠한 난관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에게 극단적 대립이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정의의 4.19정신과 열정을 잘 이어가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과연 어떤 답을 할까?


ⓒ노회찬재단


2018년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민주주의! 우리가 함께 가는 길, 국민이 함께 걷는 길'을 주제로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이 열리는데, 정의당에서는 이정미 대표와 노회찬 원내대표가 참석한다. 정치권에서는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박원순 서울시장·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 자유한국당의 홍문표 사무총장·김문수 서울시장 후보, 바른미래당의 박주선 공동대표·안철수 인재영입위원장 겸 서울시장 후보, 민주평화당의 조배숙 대표·장병원 원내대표가 참석한 반면,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는 불참했다.

1960년의 김주열과 2016년의 노회찬


2016년 4월 19일 노회찬은 <노회찬 일기>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린다. 


살아서는 호남의 아들로, 죽어서는 영남의 아들로, 4월혁명을 통해 국민의 아들로 부활한 청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 부둣가에는 '4월 혁명이 시작된 곳'이란 이름의 동판 표지석이 있다. 그리고 표지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 3․15의거 시위 도중 행방불명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다. 행방불명된 지 27일이 지난 4월 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곳은 4월혁명 발원지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김주열은 마산으로 유학와서 마산상고에 응시, 합격을 확인한 바로 그날 3월 15일 행방불명되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백여명이 총상을 입은 '3.15의거' 와중이었다. 김주열의 어머니는 바로 마산으로 달려와 김주열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고향 남원으로 가는 첫 버스에 올랐다. 어머니가 귀향하고 있던 그 시간인 오전 11시경 마산의 중앙 부두에 최류탄이 눈에 박힌 한 시신이 떠오르고, 이 주검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4월 11일 마산 2차 의거는 부산, 광주 등지로 번져갔고 서울에서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치 깡패들이 이 시위대를 급습해 수많은 학생들이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4월 19일 서울과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4·19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김주열의 묘는 모두 세 곳이다. 고향인 전북 남원 추모공원 묘역, 마산의 국립 3.15추모공원 묘역, 서울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가 그곳이다. 김주열 열사와 옛 마산상고 입학 동기로, 오랫동안 김주열열사 추모사업회장을 맡았던 김영만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김주열은 살아서는 호남의 아들로, 죽어서는 영남의 아들로, 4월혁명을 통해 국민의 아들로 부활했다."


부정선거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모든 방법이 동원된 3.15 부정선거(선거부정으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스스로도 심하다 생각했는지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다고 한다) 결과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일가는 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의해 죽고, 4월 26일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망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죽었다. 


4월혁명 56돌을 맞아 김주열을 그리며 '4월혁명이 시작된 곳'에 마음으로 국화꽃 한송이를 바친다.

그 며칠 전인 2016년 3월 15일 노회찬은 <노회찬 카카오 스토리>에도 글을 싣는다.


오늘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3.15의거 기념일입니다. 6.15공동선언실천경남본부 김영만 상임대표, 차윤재 경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의장, 김재명 민주노총 경남본부장, 그외 여러분들과 국립3.15민주묘지에 참배하였습니다. 영령들의 넋을 기리며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바친 숭고한 뜻을 되새깁니다. 이곳은 민주성지입니다.


ⓒ노회찬재단


※ (하루 전날인) 2016년 3월 14일 오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는 국립 3·15 민주묘지. 짙은 황색 코트를 입은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다가와 김주열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동안 묘비를 어루만지며 "미안하오. 미안하오"라는 말을 반복한다. 묘비 앞에 고개를 숙인 사람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마산 앞바다에 버릴 때 차량을 운전한 운전기사 김덕모(76)씨였다. 그는 56년 만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 이날 묘소를 찾았다. 


김덕모씨는 3·15의거 당시 스무 살 청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운전을 배워 마산의 한 사업가의 지프 운전기사로 일했다. 당시 차량이 흔치 않아 경찰은 이 사업가의 차를 간혹 빌려썼다. 3월 15일에도 김씨는 경찰에 파견돼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차를 탄 사람은 김 열사에게 최루탄을 쏜 마산경찰서 박종표 경비주임(당시 경위)이었다. 이날 김 열사는 박 경위가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하루 뒤 김씨는 김 열사를 처음 봤다. 박 경위의 지시로 오전 5시쯤 차를 몰고 마산세무서에 도착했을 때다. 탱자나무로 된 울타리 옆 도랑에 김 열사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다가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너무 놀랐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박 경위 등 경찰 3명과 민간인 1명이 김 열사의 시신을 차로 옮겼다. 원래 김 열사의 시신을 야산에 묻을 계획이었지만 가는 도중에 마산제1부두(현 가고파 국화축제장)앞 바다에 버리기로 계획을 바꿨다. 이들은 부두에 있던 철사를 이용해 김 열사의 시신과 돌을 한데 묶어 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철사가 느슨하게 묶인 탓인지 김 열사의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쪽에서 떠올랐다. 김 열사의 처참한 모습은 사진을 통해 마산뿐 아니라 전 세계로 알려졌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중앙일보, 2016.3.14.)

1960년 4.19혁명과 2016~17년 촛불시민혁명


2017년 2월 9일 국회 본회의장.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공정하고 평등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갑시다"는 제목의 비교섭단체 대표 국회 연설에서 2016-2017년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1960년 4월혁명을 불러낸다.


ⓒ국회방송 화면 갈무리


연인원 1천만이 훨씬 넘게 참여한 촛불항쟁이 시작된 지 100여일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 국회에서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지 오늘로 정확히 두 달이 되었습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최악의 대통령이 만들어낸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에 대한 저항이 6월 항쟁이래 최고의 국민들에 의해 촛불시민혁명으로 승화되는 한복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4.19 당시 경무대 앞에서 꽃잎처럼 청춘들이 스러져가던 그날이 훗날 혁명으로 기록될지 그 당시엔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지금 100일 넘게 진행되는 촛불은 단순히 집회와 시위를 넘어서서 역사에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촛불시민혁명이 4.19나 6월 항쟁처럼 미완의 혁명으로 끝날지 성공으로 귀결될지는 앞으로의 일들이 결정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지금 그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촛불광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들고 외쳤던 손팻말은 <박근혜 퇴진>과 <이게 나라냐>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자진사퇴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국회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의결하고 특검법을 처리하였습니다. 저는 20대 국회가 출범 6개월만에 절대 다수 국민들의 여망을 받아들여 이같은 역사적 결정을 내린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 정세균 국회의장과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의 용단에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2018년 3월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전국의 371개 청소년단체 등으로 구성된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기자회견을 열고 "청소년들에게 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 획득은 절박한 인권의 외침"이라며 "청소년 참정권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질 문제도, 협상의 대상도 아니며 '국민주권과 기본적 인권'의 문제이자 '정치적 정의'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이날 기자회견엔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의 원내대표들이 참석해 청소년들의 참정권 보장 요구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3·15 마산의거, 다 고등학생들이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만든 민주주의 우리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유한국당을 질타한다. 


19세부터 선거권 주는 나라는 거의 없다. 만 18세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될 수 있는데, 근데 투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자유한국당에 불리해서 주지 않나. 그러면 자유한국당이 한국을 떠나라. 그러면 해결될 문제 아닌가. 왜 한국에 남아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투표권을 안 주려고 하나.


ⓒ노회찬재단


※ 참고로 지난 2013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6대3의 의견으로 '선거권을 19세 이상에게만 부여하는 공직선거법 조항이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 핵심 논거는 "입법자는 19세 미만 미성년자의 경우 독자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자율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 선거권 연령을 19세로 정했다"는 것이다. 


납세의무나 국방의무 같은 핵심 의무는 18세에 강제되면서 이에 직결된 선거권은 1년 뒤에나 보장되는, 권리와 의무가 일치하지 않는 부정의한 상황에 대해 헌재가 외면한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헌재 스스로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다. 선거권 19세를 끝까지 고집하려 한다면,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납세의무와 국방의무도 법적으로 19세부터 개시되는 것으로 개정하는 것이다.


2018년 7월 23일 최인훈과 노회찬, 그리고 '광장'


2018년 7월 23일 두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광장>의 소설가 최인훈과 정치인 노회찬.


1960년 4월혁명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몰락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로 하여금 한국전쟁 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져다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1960년 10월 최인훈은 '해방 후 최고의 문학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광장>을 <새벽>지에 발표한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이었지만,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광장>의 해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광장>은 1960년 4.19혁명의 문학적 적자(嫡子)였다. 

※ 최인훈의 <광장>은 출간 직후 2018년 7월 23일 현재까지 205쇄를 찍었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광장>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우리 문단 사상 최고의 스테디셀러로 꼽히기도 한다.

"亞細亞的 專制의 倚子(의자)를 타고 앉아서 民衆에겐 西歐的 自由의 風聞만 들려줄 뿐 그 自由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舊政權下에서라면 이러한 素材가 아무리 口味에 당기더라도 敢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四月이 가져온 새 共和國에 사는 作家의 보람을 느낍니다."(<광장> 초판 서문) 라고 말할 정도로 '1960년의 4월'은 최인훈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친다. 


▲ <새벽> 1960년 11월호(왼쪽), <광장> 초판본, <광장> 초간본(오른쪽) ⓒ은평구청


1936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인 최인훈은 주인공 이명준의 입을 빌어 모순투성이의 사회인 남한 사회와 북한 사회의 실상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비판한다. '광장 없는 밀실'과 '밀실 없는 광장'은 1950년대 한반도에 존재한 두 자화상이었다. 최인훈에게 남한에서의 삶은 밀실만 있고 광장이 없는 것이었고, 반면 북한에서의 삶은 광장은 있으나 밀실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자기의 密室로부터 廣場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廣場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어느 사람의 路程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어떤 경로로 廣場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廣場은 大衆의 密室이며 密室은 個人의 廣場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廣場에 暴動의 피가 흐르고, 密室에서 狂亂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이명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 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 한' 사람이란 것만은 말할 수 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김형오(백범김구기념사업회 회장)에게 "<광장>은 1960년대 벽두에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새벽 4시의 사이렌 소리처럼 잠든 의식을 뒤흔들어 깨우며 등장했다. 전율 그 자체였다. 내 청춘의 독서, 그 맨 윗줄엔 <광장>이 있다." 7월 24일 김형오는 최인훈 선생의 빈소를, 7월 25일에는 노회찬의 빈소를 찾아간다. 


노회찬의 빈소로 가는 길에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당신의 죽음은 모든 정치인을 대속(代贖)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개혁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정치인 모두가 죽게 될 것입니다." 김형오의 눈에 비친 노회찬은 "제대로 된 진보정치인"이자 "심지는 굳건했지만 사고는 건전했다. 비판을 하되 적대적이 아니었고, 물러서지 않았지만 상대를 모욕하지는 않는" 그런 정치인이었다. "그는 지혜로웠지만 자신에게는 약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안타깝다."는 김형오는 노회찬에게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군요. 당신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고 전한다. (김형오, 「최인훈·노회찬···광장과 밀실 사이, 그 아득한 심연에서」, <아시아엔>, 2018년 7월 26일)

최인훈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강인하지 않다. 그들은 흔들리며, 괴로워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인으로서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흔들림은 자유를 억압하는 세상 속에서 자유의 조건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송은정, 여수신문, 2019년 1월 15일). 노회찬은 그의 트위터 제목처럼 보통사람들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을 꿈꿨다. 한 인터뷰에서 '노회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는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자유란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라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자유가 무의미하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자유는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선물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고 또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만큼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자유는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라 생각한다." (「'자유인' 인터뷰 8: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2011년 8월 30일)

2012년 2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최인훈은 "2차 한국전쟁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어떤 유행이나 서양식 철학보다 앞서는 한국의 소박한 토착 철학이 바로 이것이다. 그 결론이 먼저 있고, 그걸 어떻게 명제화하느냐는 학자나 예술가가 할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18년 2월 노회찬은 창비에서 주최한 '촛불시대, 정치는 우리 손으로' 강연에서 "전쟁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며 "안보, 안보 부르짖는 사람 중에 전쟁이 나면 보이지 않을 사람이 태반입니다. 전쟁에는 너무나 큰 댓가가 따르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반드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보수든 진보든, 여든 야든 평화란 의견이 갈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2018년 8월 9일자 한겨레의 「최인훈과 노회찬, 그리고 광장」에서 김규종(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은 소설가 최인훈과 정치인 노회찬을 엮어주는 하나의 어휘가 있다면 그것은 '광장'일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야기된 촛불혁명은 정권을 교체했지만, 밀실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 노회찬이 남긴 과제를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그것은 어둠의 밀실을 넘어 활짝 열린 광장으로 나아갈 것을 명령한다. 그것만이 최인훈과 노회찬이 꿈꾸었던 자유와 평등이 조화로운 이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1월 24일 창립된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https://www.hcroh.org/)은 노회찬이 남긴 과제를 그를 기억하는 길동무들과 함께 하나씩 풀어가면서 "어둠의 밀실을 넘어 활짝 열린 광장"으로 나아가는 길에 작은 디딤돌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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