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실습생 사망 7개월, 자식 잃은 아버지는 지금...
2018.06.28 01:08:36
[죽음 그후 ①] 현장실습 도중 사망한 이민호 군 이야기
제주도, 한 고교실습생이 프레스에 짓눌려 사망했다. 7개월이 지났다. 이제 누가 관심을 갖고 있을까.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LG유플러스 여고생 자살, 제주 음료회사 사고... 연달아 특성화고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 과정에서, 그리고 현장실습으로 취업한 학생이 일하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지난해 12월, 교육부는 '조기취업형 현장실습 전면 폐지' 계획을 발표하면서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을 없애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일선 학교와 학부모, 그리고 재학 학생의 반발이 거셌다.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을 없앨 경우, 취업이 어려워진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교육부는 두 달 후인 2018년 2월 '학습중심 현장실습의 안정적 정착 방안(안)'을 발표한다. 문제가 되는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을 폐지하는 게 아닌, 보완·수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안전이 확보된 경우에 한해 겨울방학 전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즉, 안전 등 일정기준을 충족하는 업체를 '현장실습 선도기업'으로 선정한 뒤, 이러한 기업에 한해서만 학기 중 취업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선도기업으로 인정되지 않는 기업은 겨울방학 이후, 즉 학기가 끝난 뒤 취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직업교육을 위한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 '땜질식 처방'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다시 제2의 LG유플러스, 제주 음료회사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무엇이 문제일까. 

<프레시안>은 과거 특성화고 현장실습 과정에서, 그리고 이후 취업했다가 사고를 겪은 학생들의 유가족을 만났다. 그들이 생각하는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 제도, 그리고 특성화고 시스템의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연합뉴스


큰아들 따라 특성화고 간 작은아들

박정숙(51) 씨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큰아들을 본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버지인 이상영(56) 씨도 마찬가지다. 연신 큰아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운동도 잘하고 활발한 아들이 든든하단다. 큰아들은 지난 3월,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부대에 입대했다. 아들을 보지 못한지도 석 달이 다 돼 간다.  

석 달 만에 큰아들을 만나는 날은 한국 대 멕시코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큰아들은 밤에 치킨을 먹으면서 경기를 볼 생각에 이미 마음은 부대 밖으로 나와 있다"며 어머니 박정숙 씨가 웃었다. 첫 외박인지라 먹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 듯 하단다. 

박 씨 부부는 제주도 토박이다. 나이가 들어 서울로 상경했다. 박 씨는 제주도가 섬이라 답답해서 싫었다. 바쁘게 움직이고 변화무쌍한 서울을 동경했다. 아버지 이상영 씨는 서울에 스무살 넘어 돈 벌러 올라왔다 이내 제주도로 내려갔다. 서울의 복잡함이 자기와 맞지 않았다. 

아내인 박 씨는 이후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결심했고, 그렇게 박 씨 부부는 제주도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러 일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자연히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 씨 부부 둘 다 몸이 좋지 않아 일을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때가 큰아들이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일찍 철이 들었던 듯했다. 큰아들은 어느 날 집에 와서는 특성화고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3년 동안 수업료도, 기숙사비도 무료라고 했다.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큰아들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아빠, 나 괜찮아' 이 말 한마디 남기고는 집을 떠났다.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자기 진로를 선택한 큰아들이 기특하면서도 미안했다." 

하지만 해가 지난다고 쪼그라든 형편이 펴질 리는 만무했다. 큰아들에게는 한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활발한 성격의 형과는 달리 얌전하고 조용한 동생이었다. 큰아들은 뭐를 시켜도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작은아들은 그 반대였다. 자기가 뭐라도 먼저 하려 했다. 심성이 고왔다.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그런 작은아들이 중3이 됐을 때였다. 2학기가 됐음에도 아이가 진학 관련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참다못해 작은아들에게 진학에 관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아버지로서는 어렵게 꺼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작은아들은 '쿨'했다. "형 따라 갔어." 

집안 사정을 잘 알기에 부모와 상의 없이 큰아들을 따라 특성화고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큰아들을 보낼 때 꽂힌 비수가 다시금 아버지의 가슴을 후볐다. 

아버지가 보기에도 특성화고에서의 생활은 쉬워 보이지 않았다. 조경과를 전공으로 한 고3 큰아들이 현장실습에 나가면서 부터였다. 전공과 상관없는 일자리였다. 한창 귤을 딸 시기에는 귤을 따고 나르는 일만 죽어라 했고 그런 시기가 지나니 성산항, 서귀포항 등에서 갈치를 운반하고 판매하는 일을 했다. 일도 힘들었지만, 근로시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월급은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큰아들은 어차피 군대에 갈 생각이었다. 일한 지 1년이 조금 안 된 시기였다. 군대에 가야 하기에 그만둔다고 회사에 통보했다. 하지만 회사는 계속 다니라고 했다. "바쁜 시즌인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두면 어떻게 하느냐"는 책망이 돌아왔다. 작은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때는 그즈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 지난 3월 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청와대에 사고 진상규명과 후속조치를 요구하던 중 이민호 군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갈비뼈가 다쳤는데도 출근하라는 회사

형과 같은 학교에서 원예를 전공한 작은아들은 형과 마찬가지로 고3이 되면서 현장실습을 나가야 했다. 당시 운송업을 하던 아버지는 과거 자신의 거래처인 음료공장을 아들에게 추천했다. 회사도 건실하고 직원들을 잘 돌보는 듯했다. 착각이었다. 작업실장이 바뀌면서 아버지가 알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변해있었다. 

애초 음료회사는 자동차학과 전공만 갈 수 있었지만, 지게차 자격증이 있으면 취업이 가능했다. 마침 작은아들은 지게차 자격증을 취득해둔 상태였다. 아들이 다니던 학교는 졸업하기 위해 최소 1개의 자격증이 필요했다. 하지만 작은아들이 속한 원예과에는 딱히 취득할만한 자격증이 없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굴착기 자격증을 따라고 조언했다. 

마침 학교에 굴착기 장비가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작은아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비는 있으나 이를 가르쳐줄 교사가 없었다. 그나마 지게차는 배우는 게 가능했다. 

작은아들 학교에서 총 다섯 명의 학생이 현장실습으로 아들과 같은 음료회사에 취업했다. 이중 작은아들을 포함해 3명만이 지게차 면허가 있었다. 공장에 가자마자 지게차 운전 테스트가 있었다. 작은아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명은 면허는 있으나 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작은아들만 생산라인에서 포장된 음료를 지게차로 나르는 업무에 배정됐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작은아들은 일하는 게 무척 고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사회생활이란 그렇다"며 "배운다 생각하고 조금만 더 버텨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다. 하루 14시간 일한 날도 비일비재했다. 주말 근무도 해야 했다. 현장실습생에게 그렇게 일을 시키는 것은 불법이다. 

한 번은 작업장에서 기계를 고치다 떨어져 갈비뼈를 다치는 일도 발생했다. 응급실에 실려가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회사에서는 작은아들을 찾았다.  

"작은아들이 응급실 병상에 누워있는데도 회사에서는 계속 업무에 나올 것을 독촉하는 전화를 해댔다. 작은아들이 없으면 공장 운영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고작 일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는 현장실습생에게 그정도 능력이 있나 싶었다. 아들에게 일 못 나간다고 하고 끊으라고 했다. 그렇게 했는데, 다음 날 우리 부부가 일하러 나간 사이, 회사에서는 다시 나오라는 전화를 해댔다."

결국, 작은아들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회사로 가야 했다. 회사 공장장이 몸소 아들을 데리러 집 근처까지 온 결과였다.  

그렇게 몸을 '갈아' 넣어 한 달 손에 쥔 돈이 250만 원. 그 돈으로 작은아들은 100만 원을 부모님 생활비로, 나머지 100만 원은 자기 적금을 부었다. 그리고 50만 원은 자기 생활비로 사용했다.  

아들의 죽음에 자책, 또 자책하는 아버지

그렇게 일을 하니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작은아들은 공장 컨테이너벨트 위에서 작업하다 갑작스럽게 벨트가 역방향으로 작동하는 바람에 쓰러졌고, 동시에 멈춰 있던 프레스기가 작동하면서 그만 압사 당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손쓰기엔 치명상을 당했다. 열흘간 병상을 헤매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작은아들은 1년 전인 2017년 11월 19일, 제주도 음료회사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중 사망한 고(故) 이민호 군이다. 

아들 사고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탓했다. ‘지게차를 잘 다루지 않았다면 그렇게 됐을까', '음료공장에 취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자식이 죽었을까', '집안 형편이 좋았다면 그렇게 됐을까', '우리 부부가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됐을까' 자책하고 또 자책하는 아버지였다.

아들 죽음의 원인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들은 혼자 일하다 사고를 당했다. 애초 아들에게 일을 가르쳐준 사수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아들에게 자기가 하던 일을 가르쳐 주고는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석 달 전부터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회사에 했다고 한다. 기계 결함 때문이었다. 자기가 다루는 기계에 문제가 있다며 수리를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회사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렇게 일하다가는 자기가 다칠 수 있겠구나 생각해서 사표를 썼다고 했다. 황당한 점은 그렇게 석 달 동안 회사는 이 직원에게 새 직원 뽑을 때까지 기다라고 하더니, 그 새 직원이 현장실습생인 우리 아들이었다."

2년 동안 일해 온 직원이 나간 자리를 고작 1주일 교육을 받은 아들이 맡은 셈이다. 더구나 선임은 기계결함의 수리를 요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그만뒀다. 그런 현장에 아들이 홀로 일했던 것이다. 아들이 결함이 있는 기계를 만지다 그런 사고가 난 게 아닌가 의심하는 아버지다. 

게다가 공장 내 아들의 작업공간은 학생들만 일했다. 사고가 난 뒤, 아들을 발견한 것도 아들의 친구였다. 현장 관리자가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믿지 못하는 아버지다. 

"사고가 났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야 하는 사람이 현장 관리자 아닌가."

하지만 관련해서 만족할 만한 수사결과나 관련부처의 답변을 듣지 못했다. 공장 내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고, 죽은 아들은 말이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 지난해 12월 6일, 오전 제주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에서 열린 현장실습 도중 사고로 숨진 이민호 군의 영결식에서 유가족들이 헌화 후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같은 사고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아들이 죽고 난 뒤, 공장은 운행을 중단했다. 재가동을 하려면 안전이 담보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고 발생 이후, 노동부 관계자는 우리에게 공장을 재가동할 경우, 현장을 방문하도록 해서 안전한지를 체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공장은 운영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관계자에게 따졌더니 알릴 의무가 없다며 (약속을 지킬지는) 자기가 판단한다고 하더라."   

이민호 군의 추모비 건립도 마찬가지다. 현장실습으로 다시는 아들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주지역공동대책위 등에서는 제주교육청에 추모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교육청은 난색을 보이고 있다. 

"학생을 관리해야 하는 교육청에서 제대로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나. 그렇기에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에서 추모비를 교육청 앞에 세우려 했다. 하지만 교육청에서는 그곳에 추모비가 세워지면 선례가 된다고 반대했다. 너도나도 교육청에 추모비를 세우려 하기에 결국, 교육청은 '비석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는 자기네들은 우리 아들 같은 사고를 막지 못하기에 계속 그런 사고는 날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있나. 더구나 교육부는 이후 산골짜기에 있는 교육원 등 어떻게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추모비를 세우자고 한다. 어떻게든 아들의 죽음을 숨기고 싶은 것이다." 

허탈하다 못해 부아가 치밀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큰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은아들 사고 이후, 몇 달 동안 자기 방 안에서만 살았다. 끼니도 홀로 방에서 때웠다. 그러다가 예정된 날짜에 맞춰 입대했다. 어머니 박 씨는 큰아들이 군대를 연기하고 심리치료라도 받았으면 했다. 하지만 큰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생활하는 게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버지 이 씨는 작은아들 사고 이후 당뇨 때문에 인슐린 주사를 맞고 있다. 일도 그만두고 작은아들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자다가도 울화가 치밀어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아들의 죽음 이후, 그래도 뭐라도 바뀌었으면 하는데 전혀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게 못내 답답하다. 아버지는 곧 2학기가 되면, 작은아들과 같은 또 다른 사고가 발생할까 노심초사다. 

"우리 아들이 현장실습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표준협약서 등을 다 작성했다. 하루 7시간 일하고, 시간 외 근무를 추가로 못하게 돼 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현장에서는 안 지켜진다. 관리·감독이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사고가 나면 관련 부처는 서로 책임을 미룬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굳이 현장실습을 계속 진행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붙인 조건이 '현장실습 선도기업'에 한해서라고 한다. 궁금한 게 그러면 선도기업은 누가 정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업에서 아이들이 실습을 하다 다치거나 죽으면 누가 책임 질 것인가. 지금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나는 묻고 싶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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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기자
kakir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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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