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견뎌낸 마리 로랑생의 작품과 색채 전시
2018.03.07 14:22:09
[박물관의 '주름'] 마리 로랑생 전
몸부림 속 그의 삶

평창올림픽에서 우리는 새로운 눈을 발견했다. 국가가 우리보다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국가를 대표하는 태극기를 외치던 2002년과는 다른, 정말 색다른 풍경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성추행, 성폭행, 성폭력 사건 고발이 하루하루 다른 버전으로 공개되고 있다. 우리의 이런 변화는 진실을 묻는, 진실로 살고자 하는 새로운 가치 발견이 아닐까. 

우리의 이러한 몸부림은 우리 사회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끔 한다. 마리 로랑생은 전쟁 속에서 그 전쟁을 몸으로 겪으면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생애가 오늘의 우리 삶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우리가 겪은 일은, 그 삶의 여정은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 마리 로랑생의 초상화.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전쟁은 이미 거기에 있었네

마리 로랑생(1883-1956)은 1,2차 대전의 한복판에서 전성기를 살았다. 그가 살던 시대의 그 땅은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현실을 담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폭력을 고발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속 깊은 아름다움을 담았다. 어떻게 그런 아픔의 시대에 그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그가 추구한 예술은 그의 인생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인간에게 고통은 두 가지 갈래로 인식된다. 고통이 어떤 이에게는 교훈이 된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이 깊은 상처가 되어 존재를 상실케 한다. 이 두 가지 선택은 한 사람의 인생 경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상처를 남기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비단 승자라 할지라도. 

그런데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전쟁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새로운 제품을 생산한다는 논리, 그래서 우리 지구를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가치탐구에 힘을 얻는다. 우습게도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쟁은 경제적 이익을 주는 은폐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살아남아 마리 로랑생은 전쟁 속에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품에서는 선명한 색채와 부드러운 살결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왜 어둡고 칙칙한, 전쟁이라는 포화 속에서 그 같은 그림을 그렸을까. 그 전쟁 속에서 무엇을 중요한 가치로 들어 올렸을까. 그의 작품을 보는 나는 아마도 우윳빛 물감처럼 부드럽고 잔잔하며,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가 작품의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처럼 마리 로랑생 전시는 잔잔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격정의 세월이 담겨 있다. 그 세월 속에서 그가 살아낸 역사가 있다. 그의 작품은 선명한 실체를 그리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희뿌연한 물안개 같은 잔상들이 담겨 있다. 작품은 희뿌연한 공기 속에서 희끗희끗한 빛으로 우리 앞에 섰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했는지를 보자.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사회나 어떤 사람이 원치 않게 사회가 돌아갈 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욕망하는 사람은 많고 그것을 다 들어줄 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보이지 않던 신성을 발휘해야 하는 걸까. 

<마리 로랑생전>에는 욕망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마리 로랑생의 가슴에 깊이 상처가 된 사건들은 이렇게 작품 속에 표출된다. 그의 탄생은 당시 비정상의 상태였다. 소위 정상 가족이 아닌 채 그의 삶은 시작된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딸을 키우지 않았다. 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없음은 있음의 반대다. 있음은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가족이 없다는 것,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부재하다는 사실 자체로 비정상의 딱지를 붙인 불합리한 사회. 그 안에서 그는 성장한다. 깊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물으며. 그에게 그 물음은 내가 보기에 '나는 왜 혼자인가?' '왜 나는 다른가'였을 것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존재를 찾는 일일게다. 그만의 삶의 여정이 되는 그 빛깔을 찾아내는 것. 

▲ <터번을 쓴 여인>, 1922.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그가 쫓은 다름에의 탐험은 그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부재하지만 그 존재에 대한 탐구는 지속되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상실이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왜, 어머니는 왜 나에게 향해 있는가. 각기 다른 각도로. 

아마 그의 질문은 이렇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마리 로랑생의 작품에서 결핍은 두드러지고 독특하다. 가녀린 선은 그의 우울함 같고, 흐린 붓질은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발음 같다. 발음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언어는 그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게 했을 것이다. 

작품이 말하는 것들 

마리 로랑생의 얼굴은 작품 속에 있지만, 우울하다. 그의 눈빛은 앞을 바로 보지 못한다. 상대를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세계가 편치 않다는 말이다. 그에게 세상은 바로 볼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다. 나아가 작품이 그에게 또 다른 무거운 세계일 수 있다. 작품에 자신을 담아낼 때 그의 세계에는 어려 친구가 있었다. 그 유명한 피카소도 있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여성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마리에게 남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들의 격려를 받기보다, 그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 물음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인식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여성이 됨을 고려하면, 여성은 사회적 존재라는 여성학자들의 이야기는 타당하다. 

▲ <종려나무 아래의 젊은 여인>, 1915.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마리 로랑생의 그림에서 나를 본다. 나는 여성이고 나의 시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 딸과 나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마리 로랑생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의 시대와 그의 어머니의 시대는 달랐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 잉태된 존재에 대한 물음은 그가 붓을 놓지 못하게끔 했을 것이다. 이 물음들이 무르익는 만큼 그의 작품 수는 늘어났을 테니, 그에게 그림은 구원과 같지 않았을까.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그의 작품이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은 험상궂지 않다. 그 작품에는 가녀린 슬픔이 잔잔하게 묻어난다. 작품은 가볍지 않으면서, 무게감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동료들의 사랑으로 일상을 적셔갔던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비둘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선명한 색감으로 명쾌한 세계를 그린다. 이로써 잠시 다른 세계를 체험하는 것처럼 보는 이의 마음은 온화해진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오늘에도 있다. 지금 여기에서 그의 작품을 만난 사람들은 그 시대 그의 모습처럼 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 그가 내리그었던 붓질은 그의 삶의 몸짓으로 해석된다. 그가 날고자 했던 곳, 그가 품고자 했던 감정, 그가 나누고자한 정서가 그림에서 잔잔히 스며 나오는 듯하다. 비록 영광의 삶은 아니지만, 어제도 만났고 내일도 만날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에게 그림은 그래서 희망이고 삶의 가치였다. 

결핍이 보인다

그의 그림을 봄으로써 그의 세계에서 우리의 일상을 찾아낸다. 그가 견뎌년 전쟁에서 우리의 전쟁을 상기한다. 인간은 왜 싸우는가. 우리에게 싸움은 어떤 의미인가. 인간은 왜 적을 만드는가. 사람들은 왜 옳고 그름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가. 

그의 그림은 삽화로도 그려졌다. 그 삽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캐릭터를 드러내고 있다. 각각의 인물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는 듯 조용히 무언가를 응시한다. 무엇이 이토록 담담한 눈빛을 갖게끔 했을까. 

전쟁에서 사람은 죽는다. 전쟁은 사람을 가르는 효과적인 도구다. 무섭지만 버려서는 안 되는 필수품일지도 모르는 칼날을 보듯, 우리는 전쟁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 <푸른 옷을 입은 수잔모로>, 1940.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아름다움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고통을 통해 스며든다고 하겠다. 마리 로랑생의 깊은 슬픔은 작품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평화 올림픽 평창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평화 올림픽은 그동안의 적을 순화시켰다. 실로 오랜만에 남북한이 서로를 헐뜯지 않고 정상으로 대했던 드문 시간이었다. 마리 로랑생이 그랬듯이 평화의 붓질을 시작하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평화를 퍼주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만드는 용광로다. 북이 말하고 우리는 듣고, 다시 우리가 말하고 그들이 듣는 이 희한한 경험은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에게 전쟁 없음은 민족통일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나'는 그렇게 통일이 간절하지 않다. 왜 그럴까. 통일은 정치권력의 문제다. 내 문제가 아니다. 통일이 높은 허들을 넘지 못해 서성이고 있듯, 마리 로랑생의 작품들은 서로를 비껴가면서 새로운 질서를 선보인다. 그에게 작품은 떠나지 못한 이 세상의 모습을 담은 그릇이다. 작품이 작품답다는 것은 작품에 진정성과 시대, 고민과 상처의 변이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마담 앙드레그루의 초상>, 1937.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마리 로랑생이 결핍의 세계에서 퍼즐을 맞추는 일을 끊임없이 해 왔다면, 그에게 작품은 그 빈틈에 서는 일이었다. 그의 작품은 그래서 가치 있다. 극복의 시나리오를 만든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통은 고통으로 남지 않는다. 적어도 인간이 성숙하려 했다면. 그에게서 그런 면모를 발견한다. 전쟁과 아버지의 부재. 또 다른 헤어짐의 연속. 부재의 물음 속에서 그의 예술은 그 의미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삶이 별난 것처럼 작품이 그의 마음을 담아냈다. 삶을 산다는 것은 새로운 견딤의 과정이다. 견디자. 그 견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다. 마치 컬링 선수들처럼 마리 로랑생은 아름다운 삶을 그림에 담았다. 부드러움과 밝은 색채는 그에게 유토피아였을지라도. 그것이 그의 세계를 열었고 그의 세계는 그렇게 남아 우리에게 말을 건다. 너는 어떻게 그 삶을 마무리 할 것인지를. 

나는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다.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보면서 다시 생각한다. 그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불편한 빈 것들, 부재의 공간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 부재와 결핍 속에서 무엇을 건져 올릴 수 있었을까. 그의 삶의 여정을 살아보자. 그의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가녀린 슬픔을 느껴보자. 인생은 가볍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쁨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올지라도 우리는 꿈꿔야 한다. 산다는 것은 불행한 상황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상황을 새로 건설하는 것. 그것이 삶을 산다는 사람들의 증거일 것이다. 살아 있음에 대한. 

시를 쓴다. 스삭 스삭

그가 남긴 시를 나도 쓴다. 그가 말한 구절을 나도 웅얼웅얼 거리며 되뇌인다. 그렇게 삶은 2018년에 이어지고 있다. 그가 남긴 것들을 통해 우리는 대화한다. 먼 곳에 간 그라 할지라도 우리의 가슴 속에 그가 들어와 있다. 이미. 한번 뿐인 인생은 모두에게 서툴다. 그가 걸었던 그 서툰 길을 따라 나도 걷는다. 

▲ <책 읽는 여인>, 1913.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잊혀진 여인(진정제) 

지루하다고 하기 보다 슬퍼요. 
슬프다기 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 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 보다 
버림 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 보다 
나 홀로. 
나 홀로라기 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 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 보다 
잊혀졌어요. 

위의 시를 보면, 마리 로랑생은 죽음을 늘 가까이 두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일상을 사는 우리들은 그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까마득히 두고 있지만, 적어도 마리 로랑생에게 죽음은 그를 살아있게 한 물음이 아니었을까. 

마리 로랑생에게 결핍은 성장의 원천이었다. 결핍이 없었다면 그의 성장은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결핍을 들여다보고 내 안에서 잘 달래보자. 그것이 우리와 함께 이 세계를 견디게 한다. 

작품을 본다는 것은 작품에 깃든 의미와 색채, 그 느낌을 공유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 두드러진 특징은 색채다. 작가의 삶 속에서 색채도 변했고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이 색채의 향연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인 김규리(한국컬러테라피협회회장)님의 해설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색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 색을 우리 일상에 다양하게 조합해 보자. 넥타이와 머플러. 작은 소품들로도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색의 치유효과를 통해 우리 삶에 새로운 기운을 넣어보자. 오늘은 힘들었을지라도 내일은 새로운 날들을 꿈꿔보자. 

▲ 색채로 다양한 감상을 할 수 있는 전시장의 한 장면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변주를 보자 

김용관 작가와 마리 로랑생을 결합한 큐레이터의 시도는 신선했다. 색채가 주는 느낌이 다시 다양한 도형들에 얹히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평면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는 작품의 다양함은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두 작품을 보는 과정은 뭔가 잘 조직된, 그래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몸짓, 더 잘해보려는 노력처럼 보였다. 마리 로랑생을 재해석한 김용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접할 수 있는 호사는 이 전시가 단순히 프랑스의 작품을 전하는 데만 목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해석을 반기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반향을 주면 좋을지 고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큐레이터가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물음일 것이다. '작품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 작품은 우리 일상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마 그런 물음이 이 전시를 기획하게 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던진 것은 아닐까. 

▲ 김용관 작가의 작품 전시 모습. 다양한 도형과 색채가 결합된 새로운 해석을 볼 수 있다.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작품을 다 보고 나면 관람자들에게 남는 것은 추억 한 조각일 수 있다. 그것은 작은 기념품들,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책자, 엽서, 손수건, 편지지... 마리 로랑생 전에는 특이한 공간이 있다. 엽서를 다시 작품처럼 전시한 공간. 뮤지엄 숍의 엽서 공간은 다시 작품을 보게 하는 잊히길 망설이는 기억의 공간이었다. 작은 엽서들이 우리 마음에서 새로운 물음을 싹티울 수 있다면. 엽서 한 장을 품고 나서는 것도 좋을 듯싶다. 마리 로랑생의 그 향기를.

마리 로랑생 전 / 색채의 황홀 . 2017. 12. 9-2018. 3. 11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기획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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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오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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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성공회대 연구교수. 박물관의 전문직인 정학예사. 박물관교육의 새로운 교육콘텐츠를 개발하는 기관 <새롭게보는박물관학교> 대표. 박물관은 일반대중들에게 아직은 낯선 곳이다. 박물관에서 성찰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안내하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