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미식회>가 말해주지 않는 것은?
2018.02.17 12:20:12
[함께 사는 길] '미식'에 대하여
'흙밥'은 서글픈 말이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뼛속 깊은 자기비하감이 배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흙밥이라 부를 만한 밥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금만 넣어 먹은 밥", "다시마 넣고 끓은 물", "공깃밥에 단무지 몇 개", "해동되지 않은 삼각 김밥"(<시사인> 493호에서 인용)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흙밥들. 흙밥은 건강한 미래세대 창출의 실패, 심화된 경제 불평등이라는 실패라는 역사의 얼룩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 보면, 흙밥은 몇 가지 현실들이 수렴된 결과물이다. 대학에서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부채 경제'를 운영하며 각자가 분투하는 현실. 그 분투의 내용이 열에 아홉은 저임금 계약직 노동이라는 현실. 그리고 여기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식(푸드) 교육'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현실이 추가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세 번째 현실에 관해선 어느 누구도 입을 열고 있지 않다.

하지만 누가 이 나라에서 공교육을 통해 식 교육을 받아봤을까? '식사권'이라는 말이 등장했듯, '식 교육'의 필요성도 이제는 등장해야 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미식'의 정의

오해의 가능성은 싹부터 잘라두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식 교육은 식사 예절 교육이나 기초 영양 교육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음식물이 인체의 건강, 농지 및 농생태계와 동식물들, 나아가 농민의 삶, 식품 기업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기초교양 교육, 과학 교육을 뜻한다. 영양과 건강, 음식물(농산물)의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성격, 농생태과정 전반에 관한 교육이다. 또한 어떤 농산물을 골라 어떻게 조리하는 것이, 또 외식이 필요한 경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자기의 몸과 인격(존엄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의 보호에 바람직한지에 관한 실용적 성격을 지닌 교양 교육을 뜻한다. 조리법, 섭식법, 푸드 윤리에 관한 교육이다.

하나의 문화는 '당연시'라는, 마음으로부터의 승낙의 기제를 통해서 '공동체'라는 서식지에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일단 당연시되면 그것은 뽑아내기 어려운데, 편의점 도시락 문화나 맛집 검색 문화나 맛집 투어 문화 역시 그러하다. tvN <수요미식회>라는 어느 '먹방'의 승승장구 역시 이렇게 굳건히 공동체에 뿌리 내린 특정 식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문제는 이러한 식 문화들이 뿌리 내린 토양의 지반 자체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과연 무엇이 '미식(美食)'일까? <수요미식회>는 미식을 전혀 정의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미식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보다는 느끼는 것이 중요해서도, 우리 모두가 미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합의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미식을 정의할 능력이 방송 제작진이나 출연진에게 아예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묻고 싶다. <수요미식회>에 나온 맛집에 들락날락할 권리가 모든 청년들에게 보장되면, 저 '흙밥'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라고 봐도 좋을까?

미식은 취향에 관한 판단의 사안이기는 하지만,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영역은 아니다. 어떤 판단 기준? 보편적이면서도 고유한 미감(美感)의 색향미(色香味). MSG 등 인공 감미료 사용 여부. 영양과 건강. 유기농산물 여부. 동물 복지. 생산자 공정 거래 등 생각해볼 만한 기준들이 얼마든지 있다. (물론 예시일 뿐이다.)

혹자는 미적 판단의 영역을 윤리의 영역까지, 음식의 영역을 농업의 영역까지 지나치게 확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음식(美食)은 오직 아름다운 농업의 결과물로만 가능하고, 생산자-농부, 동물·자연을 착취하는 식의 미식이란 도대체가 형용모순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식의 향유란 모종의 환경 운동적 성격을 내포할 수밖에는 없다. 동물과 토양, 미래세대와 자연의 착취가 음식의 기본이 되어버린 시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화학농지가 세계 전체 농지의 99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다.)

"미식가가 아닌 환경주의자는 슬픈 사람일 뿐"

국내에 들어온 지 벌써 10년을 넘긴 슬로푸드 운동은 이러한 의미의 '미식 운동'이라고 부를 만하다. 슬로푸드 운동에서는 음식을 농업·자연·인체·공동체와 분리해서 사고하는 방식을 지양하자고, 대신 음식을 전체론적 관점에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즉, 땅, 물, 공기, 생물다양성, 경관, 영농지식, 건강, 즐거움, 관계, 나눔이라는 10가지 관점에서 음식을 바라보자고 말이다. 이 역시 지나친 확장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맛있는 음식의 맛이란 기실 훌륭한 물과 공기의 맛, 생물다양성이 풍부하여 건강미 넘치는 흙(흙양분)의 맛이며, 그런 삶의 환경에서 농작물을 기른 농부의 마음(정신)의 맛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맛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즐겁게 나눌 때 가장 감미로울 것이다.

뒤집어 말해, 토양 생물다양성과 물과 공기의 질을 파괴하는 농법으로 나온 농산물, 지속가능한 농업에 무관심한 농부가 키운 농산물은, 맛이 있을 리도 없지만 설혹 여러 감미료, 셰프의 조리 실력 같은 보완 수단을 통해서 향미 좋은 요리로 둔갑 했다 해도, 그것이 곧 미식이 될 수는 없다. 이처럼 우리 시대에 미식은, 엄밀히 말해서, 생태계 보존의 음식이다. 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 카를로 페트리니(Carlo Petrini)가 말한 그대로 "환경주의자가 아닌 미식가는 분명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미식은 '운동'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인간의 '홈(Home)'이기도 하다. 미식은 인간의 귀소지(歸巢地)다. 또한 코이노니아(koinonia)의 자리, 즉 모두가 함께 공여(供與)한 선물의 자리다. 페트리니는 그래서 곧바로 첨언한다. "미식가가 아닌 환경주의자는 슬픈 사람일 뿐"((국내 미 번역))이라고.

흙밥이 하늘밥이 되는 순간

한마디로 미식은 해방의 음식이다. 미식은 여러 겹의 나를 한 번에 해방한다.

첫째, 떡 한 점이 함유한 탄수화물과 단백질은 내 몸을 추(醜)와 병고라는 무질서의 세계로부터 해방한다. 둘째, 미식의 미감은 내 감각을 자동화된 일상에서 해방하여 미(美)의 세계, 느린 지각의 세계로 인도한다. 셋째, 농지와 주변 자연을 돌보는 농부의 마음의 맛까지 느낄 때, 내 지성 역시 유의미한 지성으로 세계에 확인된다. 넷째, 유년 시절 체험한 미감을 다시 느낄 때, 내 심층에 잠재되어 있던 무목적의 존재, '어린이'가 깨어난다. 마지막으로, 식탁에서 농지 생명의 커다란 명상적 심포니에 접속하며 무언가를 명상적으로 음미할 때, 나는 결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 밥은 흙밥이 아니라 하늘밥이 된다.)

이렇듯 모든 미식은 실용적이면서도 예술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영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따뜻하다. 그것은 감싸고 감돈다. 그러나 지금 역사는 우리에게 미식을 다급한 사회적 실천과제로서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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