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재배식물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곡물에 달렸다
2018.01.06 15:17:25
[귀농통문] <곡물의 역사>
'곡물' 그리고 '재배식물'의 대하드라마

한스외르크 퀴스터의 <곡물의 역사>(송소민 옮김, 서해문집 펴냄)는 "만일 재배식물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로 시작해 "결국 곡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곡물에 모든 것이 달렸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다"로 끝맺는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제목이 '곡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것 중 에너지의 주된 공급원이며 영양소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탄수화물을 가장 많이 함유한 곡물이 여러모로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탄수화물' 네 글자를 검색하면 <○○○○이 인류를 멸망시킨다>, <○○○○은 독이다>, <50세부터는 ○○○○ 끊어라>, <○○○○ 중독증> 같은 부정적인 제목의 책들이 바로 검색된다.

오늘날 농사를 짓고 가공하고 유통하고 조리하는 모든 과정이 잘못돼 있기는 하지만 탄수화물 자체가 비난을 받는 건 억울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평소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혹시 이 사회에 만연한 탄수화물 혐오에 대한 개인적인 의구심 또는 반감을 규명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이 책은 '곡물'을 포함한 '재배식물'의 발생지와 이동 경로, 변화 또는 발달의 흐름을 추적하며, 그와 함께하는 인류의 역사 또는 문화를 이야기한다. 다분히 유럽을 중심으로 서술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재배식물에 대해 동서고금이라는 광활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거대 사극처럼 방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곡물'로 상징되는 탄수화물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한 개인적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것과 별개로, '곡물'은 이 책이 다루는 ‘재배식물’의 대명사로서 손색이 없다. '전분 성분을 함유한 큰 낟알을 가진 특정한 풀', 즉 곡물은 빙하기 이후라는 특정 기후 조건의 결과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풀의 낟알을 '채집'하고 '수집'했다가 '뿌리고' '수확'했을 것으로 추론되고, 다른 여러 재배식물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을 것이다.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과 목축으로

열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현대인의 선조는 사냥꾼과 채집인이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기 전 지구 기온이 온화해지면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식물이 살 수 있는 지역도 확장되었다. 더불어 인류 문명도 변하기 시작했다. 신석기시대 인류는 야생식물을 재배하고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곳, 즉 재배식물의 유전자 중심지는 서남아시아 지역이다. 구체적으로는 오늘날의 레바논, 이스라엘, 시리아, (터키의 일부인) 아나톨리아, 이란, 이라크의 산악 지대다. 서남아시아의 저지대 건조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이곳을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1만 1000년 전부터 밀, 보리, 콩 등 '기초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바로 농사의 탄생, 농부의 탄생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벼, 인도의 목화와 콩과 식물, 중국의 조와 기장과 대두, 뉴기니의 사탕수수, 아프리카의 얌, 아메리카의 옥수수, 퀴노아, 카사바, 고구마, 감자 등도 오래된 재배식물이다.

재배식물의 발생 과정은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서로 접촉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빙하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환경 변화라는 공통의 동기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심는 많은 작물의 원산지가 이런 곳들이다. 재배식물은 "농업의 영향으로 그리고 이후 체계적인 품종개량을 통해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재배식물과 야생식물이 분리된 후 재배식물만 발달한 건 아니었다. 재배식물은 인간의 의도적 선택에 의해, 그리고 야생식물은 자연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오늘날의 재배식물이 그 지역에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는 야생식물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건 잘못된 표현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야생식물은 최초의 재배식물이 유래했던 야생식물과 정확히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오늘날의 재배식물과 조상이 같은 야생식물이 여전히 자라난다"고 해야 맞는다는 것.

재배식물의 유럽 전파

▲ <곡물의 역사>(한스외르크 퀴스터 지음, 송소민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서남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농사가 전해진 건 아마도 지중해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동서에 걸쳐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은 이런 교류가 활성화되는 데 유리한 배경이 되었을 터이다. 점차 수많은 식물이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서남아시아 산악지대보다 비옥한 토지와 유리한 기후 조건을 갖춘 유럽은 점차 재배식물 경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항해를 통해 무역로를 개척하면서 유럽인들은 "이슬람 중개인을 무시하고 향신료를 얻는 방법"을 얻을 수 있었고, 옥수수, 토마토, 파프리카, 감자, 호박, 그리고 카카오와 담배 등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반대로 밀은 유럽에서 남북아메리카로 퍼진 대표적 재배식물이다.

농부들이 곡물 위주로 농사를 지은 반면에 채소, 상추류, 과일의 초기 재배는 수도원, 도시 근교의 정원, 성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에 의해 재배식물과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졌고, 특히 양귀비, 파슬리 같은 향신료 식물과 치유 작용이 있는 약초가 재배되던 수도원 정원은 '살아있는 약국'이라고 불렸다.

독일인인 지은이는 '스웨덴순무의 겨울'이라는 사연도 소개한다. 스웨덴순무에는 전분이 많아서 감자 대용으로도 이용되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1917년 독일에 식품 공급 위기가 닥쳐 시민들이 여러 달 동안 스웨덴순무만 먹으며 견뎠다고 한다.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고 고향을 등져야 했던 19세기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다. 독일 사람들이 양배추를 발효시켜 만든 겨울 음식 사워크라우트는 우리나라 김치와 비슷하다. 짓이긴 양배추에 공기를 차단하면 유산균이 생기고 발효가 되는데, 이 절인 양배추는 산도가 높아 효율적으로 저장할 수 있었다. 신 양배추에는 해충이 침범할 수 없었기에 예전에 사워크라우트는 "겨울 음식 중에 몇 안 되는 비타민 C 공급원"이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가장 오래된 유채밭의 내력도 흥미롭다. 근대 초기에 양배추와 평지의 교배로 탄생한 유채의 씨앗에는 기름이 풍부한데, 녹비작물로, 식용유로, 등잔용 기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유채는 큰 선박에서도 사용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선을 소유하고 있던 네덜란드에서 특히 유채기름 수요가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근·현대 농사의 달라진 모습


이 책은 선사시대에서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마지막에는 슈퍼마켓으로 시선을 돌린다. 슈퍼마켓에서는 빵, 밀가루, 설탕, 과일, 채소, 샐러드, 감자, 포도주, 과일 주스 등을 언제고 살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이 1년 내내 자라고 성숙하는 곳은 오직 열대기후 지역뿐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계절에 상관없이 슈퍼마켓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열대우림에서 식물을 채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편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이것이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위대한 문화적 성취"인 무역망 건설 때문이라고 본다. 밤낮과 계절이라는 흐름 그리고 삼라만상이 특정 조건에서 구체적으로 형상을 갖게 되는 공간적 범위를 벗어난, 즉 시공간 개념이 거세된 먹을거리를 취하는 것에서 어떤 '성취감'을 맛볼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전까지 몰랐던 대륙을 발견하고 세계무역이 발달하자 유럽에서는 중세의 삼포식 농업이 사라지고 작은 재배지가 큰 경작지로 통합되었다. 대량재배가 이루어지면서 식량을 도시로 수송하기 위한 도로망, 마차를 끌 말, 말의 먹이를 공급하기 위한 목장이 필요해졌다. 상업적 경향이 확대되면서 특정 재배식물 경작이 특화되었고, 점차 전 세계에 걸친 곡물 무역이 중요해졌다. 19세기에는 어마어마한 무게가 나가는 기본 식품의 대량 수송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고, 중국 사람들이 마시던 차와 동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커피 같은 기호품도 대량 무역 품목이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몇몇 과일이 무역을 통해 널리 퍼졌고, 이제는 '이국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싼 것'을 뜻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한편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재배식물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과 별개로, 기계화와 대량생산을 주로 하는 현대에 와서는 재배식물 다양성이 줄어들었다. 18세기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농부가 다수였지만 이제 소수의 사람만이 농업에 종사한다.

"농업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바람에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농부의 일을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이후 수십 년 동안 환경운동가나 비판적 소비자들이 농사 또는 식품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자연적인 것과 순환적인 것의 의미

지은이는 책 후반부에서 화학비료, 곡물 과잉생산과 바이오연료, 기아, 유전자조작 등 최근의 농업 관련 이슈들을 언급한다. 자못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전문가로서 분명한 견해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관례적인 품종개량은 허용되는 것이고, 유전자 변이 개량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유전물질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이른바 유전학적 처리"는 경우에 따라 기존의 품종개량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 298쪽의 "이른바 유전학적 처리" 그리고 "유전자 변이 개량"이 GMO 기술을 뜻하는 거라면, 식물생태학자인 그는 (비록 인위적으로 환경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자연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유전자 결합과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믿는 유전자 조작의 질적인 차이를 모르는 걸까?

식물생태학자로서 특허를 바라보는 시각도 살펴보자.

"그 식물도 미래에는 변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전자 변이된 식물 역시 계속해서 유전물질의 새로운 재구성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사실을 현대적으로 개량하거나 유전자 변이를 실행한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린다. 그들은 자신의 '생산품'을 전적으로 특허권 보호 아래 두려고 한다. (…) 경제적, 법적으로는 이 같은 태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생물학적 상관관계의 기초에서는 이해 불가능한 일이다. (…)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교배에서도 예전에 '특허'를 받은 개체의 특징을 더 이상 나타내지 않는 식물도 생겨난다."

또 화학비료와 유기물 거름 모두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미네랄을 거름으로 준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여긴다. 그는 농산물에서 나온 것을 농사에 재사용하는 유기농을 '순환 농업'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진정한 순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수확 시에 항상 경작지의 미네랄을 빼앗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토양 내에 조절되지 않고 투입된 미네랄이 대기나 특히 하천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현대적인 기술과 하이테크 방식의 거름(화학비료)과 식물 보호제(농약)를 쓰는 '정밀 농업'이 그에겐 더 순환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거름 방식과 해충 박멸 방법이 다른 형태에 비해 장점을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바이오 또는 유기농 방식은 아무튼 '자연적'인 방법이 아니"고 "재배식물의 성장은 어떤 경우에도 생물학적인 과정이다". 그리하여 "이제 이런저런 식품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다소 소비자의 세계관에 의해 좌우된다".

결국은 세계관이다

지은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것 같다.

"전체적으로 재배식물의 역사가 문명사의 중심임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재배식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열대우림 지역 외에서도 매일 충분하고 영양이 풍부한 식용 식물을 얻을 수 있게 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바로 재배식물 경작이 없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지역, 즉 지구의 온대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오늘날 문화의 발전은 그 발전에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기근에 맞서 계속 싸워야 한다. 그리고 생명의 발전을 위한 기초가 미래에도 확실히 마련되어야 한다는 과제도 있다. 이 두 과제는 오늘날 알려진 자연적 상관관계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면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문화의 상호 의존성을 최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와 결부된 문화적 책임이 필요하다."

1996년 기아와 식량 안보 등의 문제를 다룬 세계식량정상회의에서는 2015년까지 영양 부족에 시달리는 8억 인구를 절반 수준으로 낮춘다는 내용의 '세계 식량 안보에 관한 로마 선언'을 채택했다. 이에 피델 카스트로는 20년 후에도 4억 명이나 굶게 내버려 두자는 회의의 목표가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라며 일침을 가했다는데, 한스외르크 퀴스터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미래를 위해 고작 기근 퇴치를 이야기한다.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과도한 육류 소비나 곡물 메이저에게 장악된 왜곡된 식량 시장이 아니라, 과연 '기근'과 싸워야 하는 걸까?

지은이는 어떤 식품을 선택할 것인가는 세계관에 좌우된다고 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도 결국은 '세계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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