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생 여성 대선 후보의 돌풍, 이유는?
2017.12.05 10:46:36
[장석준 칼럼] 칠레판 포데모스, '확대전선' 바람이 불다

지난달 19일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총선이 있었다. 칠레는 '총선'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선거, 하원의원 선거, 상원의원 일부 선거 등을 동시에 실시한다. 이 중 대통령 선거에는 우리와 달리 결선투표제가 있다.

투표함을 열어보니 대통령 후보 중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다. 그래서 36.64%를 얻어 최다 득표자가 된 우파 선거연합 '칠레 바모스("가자, 칠레"라는 뜻)'의 후보인 전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와, 현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가 속한 좌파 선거연합 '누에바 마요리아("새로운 다수파"라는 뜻)'의 후보로 2위를 기록한 알레한드로 기예르를 놓고 이번 달 17일에 결선 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그런데 1차 투표 결과가 나온 뒤 막상 눈길이 쏠린 곳은 결선투표에 진출한 두 후보 진영이 아니었다. 3위를 한 베아트리스 산체스 후보였다. 산체스 후보는 20.27%를 득표해 2위 기예르 후보와 차이가 2% 정도밖에 안 됐다. 산체스는 누에바 마요리아보다 더 왼쪽 입장인 소수정당, 신생정당들이 결성한 정당연합 '확대전선'의 후보다. 선거 기간 내내 산체스는 주류 언론의 관심 바깥에 있었다. 그럼에도 칠레 정치를 3분하는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민주화 이후 칠레 정치는 피노체트 체제를 물려받은 우파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끈 중도파-좌파 연합의 양대 세력이 지배해왔다. 2010년대 초에 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폭발해 칠레 사회가 들썩이기 시작한 뒤에도 한 동안은 이 구도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산체스 후보 바람은 전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피노체트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칠레 '민주화'

1973년 9월 11일, 칠레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좌파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는 신자유주의 창세기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쿠데타로 들어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독재 정권은 칠레를 시장지상주의 실험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옌데 정부가 국유화한 구리 광산은 다시 사유화됐고, 공적 연금을 없애는 대신 모든 노동자가 민간 연금보험에 의무 가입하게 했다. 칠레는 금융 자본의 천국이 됐다.

물론 저항이 있었다. 쿠데타 이전 집권 세력이었던 인민연합(사회당, 공산당, 기독교 좌파 등의 선거연합) 지도자들은 해외 망명지에서 반독재 투쟁에 착수했고, 국내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군부 정권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민연합 시절의 정당 간 협력-대립 구도가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중도파 정당 기독교민주당은 아옌데 집권 중에는 정부 개혁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했다. 기독교민주당 내 좌파가 탈당해 인민연합에 합류하자 이 당은 더욱 우경화해 반아옌데 투쟁의 선봉에 섰다. 급기야는 9월 11일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단 피노체트 정권이 자리 잡자 기독교민주당도 탄압 대상이 됐다. 민주주의 파괴에 들러리 노릇을 해준 이 당은 뒤늦게 반독재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러자 아옌데의 소속 정당이었던 사회당이 논쟁에 휩싸였다. 사회당 내 일부는 옛 원한을 잊고 기독교민주당과 연대해야만 피노체트 정권을 고립시켜 민주주의를 복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걸림돌은 공산당이었다. 기독교민주당이 사회당은 몰라도 공산당과는 협력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회당 안의 친기독교민주당 세력은 공산당과의 오래 된 협력 관계를 청산하려 했다.

물론 사회당 안에 이런 흐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민주당과 우선 연대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는 그 다음에 고민해보자는 목소리가 당 안에서 힘을 얻었다. 그 결과, 사회당과 기독교민주당을 두 축으로 하는 '민주정당 간 합작', 줄여서 '콘세르타시온('합작'이라는 뜻)'이 결성됐다. 과거 인민연합이 좌파 정당들의 연합이었다면, 콘세르타시온은 중도파-좌파 정당 간 연합이었다. 공산당은 이 연합에서 배제된 채 독자적으로 반피노체트 투쟁을 벌여야 했다.

1980년대 내내 치열한 반독재 운동이 벌어진 끝에 칠레도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문민정부로 돌아갔다. 우리도 구세력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타협적 민주화 과정을 밟았지만, 칠레는 정도가 더 심했다. 한국은 1987년에 헌법을 새로 제정했지만,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이 만든 헌법의 골간이 그대로 유지됐다. 전두환, 노태우는 법정에라도 섰지만, 피노체트는 죽는 날까지 어떠한 단죄도 받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피노체트 정권이 구축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금껏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989년에 20여 년만의 자유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 소속의 콘세르타시온 후보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당선되면서 칠레는 정권 교체를 경험했다. 이후 콘세르타시온이 계속 재집권에 성공해서, 2010년에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우파인 피녜라 후보가 승리할 때까지 무려 20년을 장기 집권했다. 그러나 콘세르타시온은 피노체트 시절에 등장한 사회경제체제에는 결코 손을 대지 않았다. 대의민주제의 외피를 둘러 쓴 피노체트주의가 이어진 셈이다.

공산당만이 거의 유일한 비판 세력이었다. 공산당은 노동조합운동을 진지 삼아 콘세르타시온 정부의 사회경제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기는 힘들었다. 단지 대선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민주화 이후 오랫동안 공산당은 원내 의석이 하나도 없었다. 칠레의 선거제도 때문이었다.

칠레는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을 모두 한국에서 '중선거구제'라 불리는 방식으로 선출해온 유일한 국가다. 최근에 선거제도가 개정되기 전까지는 하원의원 선거구에서 2인의 의원을, 그보다 더 광역인 상원의원 선거구에서 2인의 의원을 선출했다. 이런 제도 아래서는 늘 피노체트 계승자들과 콘세르타시온의 양대 세력이 팽팽히 맞서는 상, 하원 구도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같은 제3세력은 한 명의 당선자도 내기 힘들었다. 소선거구제와 마찬가지로 승자독식 선거제도였다.

이런 답답한 제도와 세력 균형 속에서 칠레 사회는 좀처럼 변화의 숨통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상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을 낸 주역은 학생운동이었다. 이미 2000년대부터 칠레에서는 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중, 고등학생들의 시위와 학교 점거 농성이 빈발했다. 이 흐름이 2011년에 대학생이 중심이 된 대중운동으로 폭발했다. 대학생들은 대학교육 무상화를 요구했고, 사립대학 중심 체제를 국공립대학 중심 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 펼쳐진 '분노한 자들(indignados)' 운동과 함께 칠레 학생운동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탈신자유주의의 최전선에 나선 청년 세대 운동으로 주목받았다. 거리의 젊은이들은 교육 개혁에서 더 나아가 구리 광산 재국유화, 공적 연금 체제를 수립하는 연금 개혁, 피노체트 헌법과 선거제도의 전면 개정을 주장했다. 하나같이 다 40여 년전에 아옌데 정부가 추진했던 내용이다.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하리라"던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은 정녕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확대전선 - 정치혁명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2010년대 초반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콘세르타시온이 야당으로 밀려나고 피노체트 체제의 노골적 대변자 피녜라가 대통령일 때였다. 이때 콘세르타시온은 거리에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의 열기를 재집권의 연료로 삼으려고 나름 노력했다. 교육 개혁 요구를 일정하게 받아들였고,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하원의원 후보로 영입하려 했다.

그 일환으로 드디어 공산당도 선거연합에 받아들였다. 공산당은 칠레 노총(CUT) 안에서 기독교민주당과 함께 양대 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내에서도 최대 정파였다. 해외에 대학생 시위의 상징으로 소개된 카밀라 바예호가 바로 공산당 청년조직 소속이었다. 콘세르타시온은 공산당을 끌어들이면서 명칭을 '누에바 마요리아'로 바꾸었다. 덕분에 공산당은 오랜만에 다시 원내 정당이 됐다.

학생 시위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2013년 11월 총선에 누에바 마요리아는 2006년-2010년에 이미 콘세르타시온 소속으로 대통령을 역임한 미첼 바첼레트를 후보로 내세웠다. 이때 출범한 제2기 바첼레트 정부는 비록 대통령은 같아도 제1기 바첼레트 정부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사회 개혁이 정부의 제1과제로 부상했고, 실제 추진됐다. 장학금 제도를 확충해 대학생 중 무상교육 대상자를 절반 이상으로 늘렸고, 선거제도도 개혁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 성장한 개혁 민심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바첼레트 정부가 사립대학 중심의 대학 체제를 그대로 두고 무상교육을 추진하다 보니 실제로는 사립대학 재단만 정부 지원금 증가로 몸집을 불렸다. 정부가 대학 개혁의 또 다른 핵심인 사립대학 국공립화에 주저한 탓이었다.

칠레 사회의 뜨거운 쟁점인 연금제도도 기대만큼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바첼레트 정부는 민간 연금보험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을 뿐 보편적인 공적 연금제도를 수립하지는 못했다. 즉, 누에바 마요리아 정부는 교육이든 복지든 피노체트 시기에 사유화된 그 뼈대에는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 제2기 바첼레트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완화했다고 할 수 있지만, 탈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 핵심 인사들의 부패 추문이 잇달아 터졌다. 그 중에서도 치명적인 것은 바첼레트 대통령 친인척 비리였다. 대통령 아들 부부가 은행의 부동산 투자 대출에 부당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바첼레트 대통령 지지율은 계속 곤두박질 쳐서 임기 말까지 쭉 20% 안팎에 머물렀다.

그러자 누에바 마요리아가 안에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다. 기독교민주당이 뛰쳐나와 독자 대통령 후보를 선출했다. 수십 년 동안 굳건히 유지돼온 기독교민주당과 좌파정당들의 협력 관계가 처음으로 어긋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에바 마요리아에는 아옌데 시절에 인민연합에 속했던 좌파정당들(사회당, 공산당, 구 사회당 온건파가 결성한 '민주주의를 위한 당', 이번 대선 후보인 기예르의 소속 정당인 사회민주급진당 등)만 남게 됐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정작 "천연자원 국유화", "교육-복지 공공성 강화", "제헌의회 소집을 통한 개헌" 같은 1970년 대선 인민연합 강령을 연상시키는 공약을 외친 것은 누에바 마요리아 후보가 아니었다. 확대전선 후보였다.

확대전선은 누에바 마요리아의 왼쪽에서 칠레 사회의 근본 개혁을 외치는 정당, 정치조직들의 결집체다. 이름은 현 우루과이 집권 세력인 좌파정당연합 '확대전선'에서 따왔지만, 성격은 오히려 스페인의 포데모스에 더 가깝다. 그 중심에 바로 2011-2013년 학생운동으로 성장한 세대가 있기 때문이다.

조르지오 잭슨 등 비공산당계 좌파 학생 지도자들은 2012년에 따로 '민주혁명'이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2013년 총선에서는 누에바 마요리아와의 후보 단일화를 통해 원내에 진출했다. 그러나 바첼레트 정부를 향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자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민주혁명은 2016년에 독자 정당으로 등록한 뒤에 누에바 마요리아 바깥의 여러 급진좌파들을 규합했다. 민주혁명 외에 휴머니스트당, 리버럴당, 평등당, 녹색생태당, '시민권력', 해적당 등이 모여 올해 초에 확대전선을 결성했다.

확대전선은 예비경선을 통해 방송인 베아트리스 산체스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산체스는 1970년생 여성으로, 우리처럼 고령화된 칠레 정치 기준으로는 '젊은' 후보였다. 주류 언론은 산체스 후보의 공약을 사정없이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득표를 할 수 없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결과는 누에바 마요리아 후보와 별 차이 없는 20%대 득표였다. 언론만 몰랐던, 아니 무시한 엄청난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물론 결선투표에 진출 못했으니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만 확대전선 바람이 일어난 게 아니었다. 제2기 바첼레트 정부 아래서 칠레 선거제도는 그나마 좀 더 비례성이 강화되는 쪽으로 개정됐다. 상, 하원의원 모두 선거구 당 2인씩 뽑던 방식에서 하원의원은 선거구 당 3-8인, 상원의원은 선거구 당 2-5인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확대전선은 하원의원 선거에서 12.90%를 얻으며 총 155석 중 20석을 획득했다. 11.08%를 득표한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비록 단 한 석(총 43석)이기는 하지만 교두보를 확보했다. 양원 모두에서 칠레 바모스, 누에바 마요리아, 어느 쪽도 과반에 미달하기 때문에 대선 결선투표에서 누가 승리하든 확대전선은 캐스팅보트로 주목받게 될 것이다. 포데모스가 창당 2년만에 스페인의 오랜 양당 구도를 깬 것처럼, 등장한 지 1년도 채 안 된 확대전선이 칠레에 정치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 베아트리스 산체스. ⓒ연합뉴스


민주화 세대가 남겨야 할 첫 번째 유산은 선거제도 개혁

칠레나 한국이나 지금 정치의 중심에는 민주화 세대가 있다. 칠레에서는 콘세르타시온과 그 후신 누에바 마요리아가 이들을 대표한다. 이번 대선 결선에서도 이들이 재집권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국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민주화 세대일 뿐만 아니라 주된 지지 기반도 이 세대다.

그러나 칠레든 한국이든 이제는 민주화 세대만으로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없다. 칠레에서는 2010년대 초반에 폭발한 학생운동 덕택에 제2기 바첼레트 정부가 들어섰고, 한국에서는 민주화 세대만이 아니라 청년층이 함께 한 촛불항쟁 덕분에 부패-비리-무능 권력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한데 여전히 민주화 세대가 주축이었던 바첼레트 정부는 탈신자유주의 시대정신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그러자 구 민주파 블록이 위기에 빠지면서 새 세대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시작됐다. 우리의 경우는 어찌 될까? 문재인 정부는 바첼레트 정부와는 달리 개혁에 성과를 내서 촛불연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한국 정치에도 스페인 포데모스나 칠레 확대전선 식의 도전이 필요하게 될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칠레 사례가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바는 있다. 민주화 세대가 탈신자유주의까지 성공시키기 힘들다는 게 역사의 비극적 진실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성과만은 후세대에게 반드시 남겨줘야 한다는 교훈이다.

그것은 정치 개혁이다. 선거제도의 보다 민주적인 개혁이다. 바첼레트 정부가 그래도 '중'선거구제에서 '대'선거구제로 바꾸는 바람에 확대전선의 반란이 터져 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칠레에서는 구세대의 실패가 신세대로 그대로 이어지는 대신 신세대가 새 기회를 열어나갈 수 있게 됐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가 5년 동안 새 시대의 그림을 다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내야 한다. 그래서 미래를 실제 그려나갈 주역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 칠레보다 더 민주적인 선거제도 개혁, 즉 연동형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이 바로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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