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그 섬, 45%가 징용 한국인 혈통이었다
2017.12.06 15:54:20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⑦·끝]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남태평양의 한국인
일본과의 역사 청산은 아직 요원하다. 일제에 희생된 이들의 절규가 아직 오늘의 역사로 남아 있다. 아직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피해 사례도 많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의해 태평양전쟁에 휘말린 조선인 피해자 문제 역시 해결이 난망하다. 이 문제가 현재진행형임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8.15 경축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문 대통령은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며 "그간 강제동원의 실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그 피해 규모가 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일본과 시베리아, 남태평양 곳곳에 일제에 강제동원되어 혹사당하다 죽어간 조선인들의 원념이 서려있다. 이동석 다큐멘터리 PD(앤미디어 회장)는 1992년, 남태평양 곳곳에 남은 우리 선조들의 피해 사례를 파헤친 9부작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를 연출해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희생된 조선인들의 한을 재조명했다. 

이 PD는 KBS와 MBC에서 수많은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특히 우리 다큐멘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 시리즈 <인간극장>을 처음 기획·제작해 휴먼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했다. 보통 사람의 삶을 다큐멘터리화한다는 발상은 혁신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졸속 합의함에 따라 일본과의 역사 문제는 다시금 두 나라 외교, 시민 문제에 첨예한 갈등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에 이 PD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용을 총 7차례에 걸쳐 재조명해, 잊혀서는 안 될 역사 문제를 환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일제, 시간을 넘은 큰아버지와 조카의 연원

노부르 킹은 거구에 호남(豪男)이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를 둔 60대 중반의 노부르 킹은 너그러운 눈매와 품 넓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팔라우에서 이름난 실업가였다. 나는 그에게서 꼭 궁금한 몇 가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펠렐리우섬의 동굴 속에서 잡혔던 그 조선인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 노부르 킹의 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 등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아파했다. 오래 앉아 있기가 힘겨워 보였고, 기억을 모아 옛일을 생각해내는 것은 더욱 무리가 될 듯 했다. 

다만 그는 한국의 다큐멘터리PD가 면담을 청한다 하니 어렵게 몸을 일으켜 거실까지 나왔던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동경했고 한국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방에는 한국노래 가라오케가 설치되어 있으며, 차에는 한국노래 테이프가 얼마든지 있다고 럭키 김이 귀띔했다. 그 노부르 킹은 지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어 역사를 증언할 기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PD님,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이토록 편찮으시니 어쩌겠습니까? 차라리 나에게 그 질문서를 주고 가시면 기력을 회복하시는 대로 내가 알아내서 연락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단순히 몸살입니까? 아니면 어떤 숙환입니까?" 
"글쎄요, 그동안 괜찮게 활동하셨는데…." 

취재(取材)란 때때로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만일 노부르 킹이 숙환을 앓고 있다면 오히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알 것은 알아내고 일어나야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노부르 킹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보였다. 그는 한 점의 서류를 건네주고 아쉬운 듯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가 고국 조선 땅을 떠나올 때 품고 왔다는 호적등본이었다. 신분증이 따로 없었던 당시는 해외여행자들에게 호적등본을 지참하게 했다. 호적등본에 노부르 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럭키 김이 평소 그에게서 들은 대로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김해 김(金)씨였고 이름은 금등(金登)이었다. 登(오를 등)은 일본어로 '노보리'라 발음하고 金은 '긴'이라 발음한다. 

'노보리 긴'. 일제 치하에서 그의 이름은 그랬다. 金登은 당시 조선의 북쪽에서 붙들려온 징용자였다고 한다. 웬만한 지식인 그룹이었던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金登은 일본 패망 후 연합군에 의해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으나, 그를 실어 나를 곳은 조선의 남쪽이었다. 그곳은 그의 정치적 이념과 맞지 않는 땅이었다. 결국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원주민과 혼인하여 원주민으로 살다가 세상을 버렸다고 했다. 조선에서 지참해온 호적등본에 노부르 킹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조선 땅에서 이미 노부르 킹을 낳았고 팔라우로 끌려올 때 아들 노부르 킹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징용자가 아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징용자였는지 일본기관이나 남방관련 일본회사의 현지파견 임직원이었는지 그 신분이 애매하다. 그렇지만 지금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동굴 속의 짐승이 돼 버렸던 그 조선인 청년의 이야기가 노부르 킹을 찾아온 핵심적인 이유였는데, 노부르 킹에게 그걸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튼 노부르 킹이 아버지를 잃고 그 섬 팔라우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연합군이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살아남은 주민을 등록하면서 '노보리 긴'을 '노부르 킹'으로 알아듣고 그렇게 적어 버렸다. 승자인 연합군은 그가 김 씨건 긴 씨건 킹 씨건 알바 아니었다. 등록 행위 자체를 마치는 게 중요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팔라우사람 '노부르 킹'이 됐다. 나라가 구심력을 잃었을 때 거센 역사의 바람에 날려 강남의 귤에서 강북의 탱자로 변해버린 잊힌 한국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분주히 남태평양 섬들을 돌아다니며 그곳 구천을 떠돌지 모르는 고혼(孤魂)들의 사연을 캐고 다녔다. 집터를 조성할 때 흙더미 속에서 발견해낸 이름 모를 유골이 혹시 조선의 징용자이거나 종군위안부일지 몰라 명절 때마다 태평양 절벽에서 한국을 향해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내주는 사이판 이장수 씨의 이야기, 온 섬 주민의 45%가 징용한인이 남긴 한국혈통이라는 티니안 섬의 슬픈 이야기…. 답사출장이었으므로 수사관이 취조파일을 만들 듯이 꼼꼼히 취재노트를 정리해놓고 귀국길에 올랐다. 부족한 것은 촬영 출장 시에 더욱 보충해야 한다는 메모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팔라우 답사사진들을 정리하는데 몇 장의 사진이 눈에 밟혔다. 김정곤 씨와 그의 딸 아리랑이었다. 애초의 생각대로 김정곤 씨의 고향집에 우송해주려고 사진을 봉투에 넣고 김정곤 씨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님댁 주소를 써서 우체통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편지로 부칠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 전해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뜬금없이 나를 압박했다. 다음날 나는 떠밀리듯이 경상남도 사천의 아버님댁 농가로 차를 몰았다. 

김정곤 씨의 부모님을 만나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부모님은 중심을 잃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14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큰아들의 소식과 사진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묻고 대답하고 눈물 짓고 또 묻기를 한 시간여. 나는 슬프고 무거운 그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어서 그냥 물었다. 

"큰아버님이 계시다는데 어디 사십니까?" 
"바로 뒷집입니다." 
"가면 뵐 수 있을까요?" 
"네, 그라지요." 

내외분과 함께 뒷집 큰아버님댁으로 올라갔다. 뒷산에서 칠십 노인 한분이 나뭇단을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 큰아버님이었다. 다리를 절었다. 모두들 마루에 걸터앉았다. 편안하게 질문을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으니까. 

▲ 김정곤씨의 큰아버님.


"할아버님, 다리 왜 저세요?" 
"징용 가서 피부병 옮아가지고…." 
"징용 어디로 가셨나요?" 
"남양군도지." 
"남양군도 어디였나요?" 
"어디라 캤더라…. 남양군도…, 가만 있거라…. 파…라…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라오요? 할아버님 혹시 팔라우 아닙니까?" (참고 : 팔라우=Palao) 
"맞아요 맞아. 일본 놈들은 파라오라고 했지. 섬이 엄청스레 많은 나라요." 

피가 머리로 몰리는 듯 했다. 그때까지 마루턱에 걸터 앉아있던 나는 마루위로 올라앉았다. 

"할아버님, 저도 팔라우에 다녀왔는데요, 섬이 정말 많던데요." 
"그럼그럼. 그 놈들이 섬 하나하나에 전부 지 군인들 배치했었지. 동굴파고 대포 숨겨놓고…." 
"할아버님, 그 나라 섬이 삼백 개나 된다던데 할아버님은 어디서 일하셨죠?" 
"찾기 쉬워. 끝에서 두 번째 섬이었으니까." 

이런, 이런, 세상에 이런! 그 섬은 지금 김정곤, 당신의 조카가 살고 있는 섬이 아닌가? 입이 마르고 목이 잠겨들었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큰아버님께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할아버님, 그 섬 이름이 뭐였습니까?" 
"가물가물해. 그게 몇십 년 됐는데…. 페… 페…." (참고 : 끝에서 두 번째 섬 = 펠렐리우)
"그럼 어떻게 생겼었는지 생각은 하시겠습니까?" 
"밀림지역이었어. 달팽이 잡아서 끓여 먹었으니까. 밀림 속에 우리가 비행장 만들었어. 죽을 고생 다했지 뭐. 전부 산호 빻아서 모래대신 깔고 활주로 만들고…. 그 끝자락에." 
"네, 할아버님. 그 끝자락에…." 
"끝자락에 일본 놈들 신사가 있었지. 일본귀신 모시는 절 말이야! 그 뒤에 자그마한 산이 있었는데 그 산 이름도 신사산이라고 했어." 

나는 떨렸다. 세상에 어찌 이런 기막힌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섬과 그 밀림은 김정곤 씨가 살고 김정곤 씨가 자식 낳고 김정곤 씨가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니는 펠렐리우섬이었던 것이다. 남양군도에 나라가 몇 십 개요 섬 또한 천 수백 개를 헤아리는데, 징용으로 끌려가 매 맞고 굶주리며 죽다 살아온 그 원한의 섬에 훗날 당신의 혈족이 상륙해서 원주민으로 살고 있다니…. 큰아버님이 매 맞고 배고플 때마다 흐느끼며 불렀던 그 노래 ‘아리랑'이 그 조카의 딸 이름이 되다니…. 이 기막힌 운명의 주인공을 눈앞에 두고 나는 말문이 막혔는데, 되레 큰아버님은 말문이 열리고 기억이 40여 년 전으로 돌아가 혼자 도는 바람개비처럼 당신의 고생담을 술술 풀어놓고 있었다.

"치가 떨릴 만큼 고생했지. 배고픈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 달팽이 잡아먹고 팔뚝만한 도마뱀도 잡아 먹었는걸. 그렇게 굶주리면서 비행장 만들고 선착장 만들고 동굴파고 무기 들어다 숨겨놓고…." 

할아버님! 정곤이가 할아버님이 만드신 선착장마을에 살고 있어요. 할아버님이 건설하신 비행장 활주로가 정곤이의 찻길입니다. 할아버님! 정곤이 처가 다음 달에 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셋째아이 낳으러 코로르(Koror)로 나간대요. 할아버님! 정곤이가 안내해서 제가 그 신사산에 올라갔다 왔어요. 내 입안에서 그런 말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끝내 이 팽팽한 긴장을 더 견디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님, 조카 정곤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남양군도 어디라 카더만…." 
"그 이상은 모르시고요?" 
"낸들 아나? 동생은 알랑가 그 섬 이름을." 
"저도 모릅니다, 형님." 

이제는 말씀을 드려야 했다. 나는 도대체 왜 아직까지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님, 그리고 정곤이 부모님! 정곤이가 바로 그 섬에 살고 있어요. 큰아버님께서 고생하고 오신 팔라우, 그 끝에서 두 번째 섬 펠렐리우에요. 큰아버님 말씀 들어보니 바로 그 섬이네요. 정곤이도 모르고 있어요. 큰아버님이 그 섬에서 고생하셨다는 거요. 제가 며칠 전에 그 섬에서 정곤이를 만났습니다. 이 사진 다 거기서 찍은 것들입니다." 

순간 물을 끼얹은 듯 모두가 말을 잃었다. 큰아버님은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정곤이 부모님은 내가 찍어온 아들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어머님은 사진속의 아들을 쓰다듬었다. 큰아버님은 그러나 사진들을 외면했다. 침묵이 흘렀다. 불안하리만큼 긴 침묵이었다. 큰아버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씀을 하셨다. 

"거기가 어디라고,
............... 
거기가 어디라고,
............... 
정곤아 이놈아! 거기가 어디라고 하필 거기 산다는 말이냐?" 

맥없이 몇 마디를 내 놓으시는 늙은 징용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40여 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위로받지 못한 눈물, 참고 삭이는 것밖에는 할 바가 없었던 울분이 바위의 이끼처럼 달라붙은 얼굴이었다. 형제 넷 중 셋이 징용으로 끌려갔고, 그중 하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깊은 한이 서린 맏형의 눈물이었다. 그 섬 팔라우에 끌려가 생사를 넘나든 이야기를 꺼내실 때 거기가 거기라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내가 그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르신의 충격이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힘을 잃어버린 늙은 징용자에게는 극단에까지 이를 수 있는 감정의 힘마저 쇠약해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 집을 나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새벽녘까지 차를 몰아 서울집에 도착했다.

얼마 후 나는 팔라우로 돌아가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정곤 씨에게 큰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은 대로 들려주었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허허… 참 희한한 일이군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 펠렐류 섬의 일본군 비행장. 김정곤씨의 큰아버님이 동원됐던 그 공사장이다.


▲ 큰아버님이 강제 동원됐던 비행장을 주행하는 김정곤 씨.


▲ 펠렐리우 섬. 맨 오른쪽 끝에 선착장이 있다. 김정곤 씨의 큰아버님은 이 선착장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 셋째 아기를 출산하러 수도 코로르 섬에 가기 위해 선착장에 도착한 김정곤 씨와 부인.


그렇다. 모든 일은 당사자에게만 심각할 뿐, 한 뼘만 떨어져서 보아도 그 빛깔이 바래져 보인다. 세월은 억울함과 비통함을 두리뭉실하게 만드는 묘약이며 역사는 그런 아픔까지도 세세히 담아줄 여백이 없다. 

*** 나는 이 글에 쓴 거의 모든 과정을 담아 1992년 3월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3부작)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MBC를 통해 방송하였다. 

10여년 뒤, 나는 KBS를 통해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5부작)을 기획 제작하면서 제작진을 팔라우에 보내 김정곤 씨의 삶을 기록했다. 나는 그 참에 김정곤 씨를 제 고향집에 다녀가도록 돕고 싶어서 편집중인 제작진에게 지시했다. 

"원주민 인터뷰를 번역하려면 팔라우 원주민 말과 우리말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세상에 김정곤 씨 말고 누가 있겠나? 왕복여비를 보내서 김정곤 씨를 초청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해서 그는 20여 년 만에 고국에 왔다. 프로그램은 많은 감동을 남겼고 그는 고향집에서 이제는 가난을 면한 부모와 형제를 만났다. 그리고 또 갔다. 가면서 하는 말은 "거기에 처가 있고 자식이 있으니…."였다. <연재 끝>
기사를 끝까지 읽으셨다면…

인터넷 뉴스를 소비하는 많은 이용자들 상당수가 뉴스를 생산한 매체 브랜드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온라인 뉴스 유통 방식의 탓도 있겠지만, 대동소이한 뉴스를 남발하는 매체도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은 독립·대안언론의 저널리즘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저널리즘에 부합하는 기사에 한해 제안 드립니다. 이 기사에 자발적 구독료를 내주신다면, 프레시안의 언론 노동자, 콘텐츠에 기여하는 각계 전문가의 노고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쓰겠습니다. 프레시안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언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1973년에 TBC에 입사, 이후 35년간 다큐멘터리에 매달렸다. 성철스님 일대기, 손기정 다큐멘터리 등 다수의 인물 다큐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진실을 밝힌 <잊혀진 전쟁>을 기획, 연출을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추적한 <종군위안부>로 1993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1983년 정통다큐멘터리 월요기획을 만들었고, 인간극장, 한국탐구 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기획,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