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검은 정치적일 수 있다
2017.11.25 14:13:31
[의료와 사회] 백남기와 박종철을 통해 본 한국의 부검논쟁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에서 제기된 부검논쟁

2015년 11월 14일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는 박근혜 정부의 반(反)민중적 정책에 항의하는 전국 13만 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이 중에는 쌀값 폭락에 대한 정부의 부실한 대책에 항의하는 3만 명의 농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경찰차로 가로막고,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쏘았다. 그리고 이 물대포를 맞고 백남기 농민은 쓰러졌다. 구급차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백남기 농민은 의식을 잃은 지 317일 만인 2016년 9월 25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애도를 할 겨를도 없이 예상치 못한 의학적 문제가 불거졌다. 백선하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작성하고 서울대병원이 발부한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에 사망의 종류가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록된 것이다. 마치 짜인 각본처럼 경찰은 바로 부검영장을 신청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은 즉각 의견서를 발표해 사망원인은 "경찰 살수차의 수압, 수력으로 가해진 외상으로 인한 외상성 뇌출혈과 외상성 두개골절 때문"이며 "이처럼 발병원인이 명백한 환자에게서 부검을 운운하는 것은 발병원인을 환자의 기저질환으로 몰아가려는 저의"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1) 다행히 법원이 "부검 필요성과 상당성이 없다"고 기각했으나, 경찰은 다시 부검영장을 청구했다.

인의협 의사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구체적인 의학적 설명과 함께 “백남기 농민의 사망원인은 애초에 의학적 논쟁대상이 아니”라며 경찰의 부검 필요성을 일축했다.2) 그러나 9월 28일 중앙지법이 '유효기간 10월 25일'에 '부검 장소와 참관인, 촬영 등 절차를 유족과 협의하라'는 단서를 달아 '조건부' 부검영장을 발부함에 따라 논란은 연장됐다. 논쟁 지형은 의학 영역으로 더욱 좁혀졌다. 특히 인의협 소속 신경외과 의사인 김경일의 활약이 컸다. 그는 경찰의 "압력이 가해진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의혹을 제기하며, 9월 30일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은 11월 14일의 CT사진을 공개하며 수술조차 의미 없는 외상성 뇌출혈과 외상성 두개골절 때문에 사망에 이른 것이며 이는 여러 영상으로 확인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정황과 정확히 부합하므로 부검이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3)

이러한 인의협의 단호한 입장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며 각계각층의 "백남기 농민 부검시도 중단" 시국선언이 쏟아졌고, 급기야 서울대의대 학생들과 동문들의 비판성명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0월 3일 서울대병원과 서울대의대 특별조사위원회는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 재검토 결과 지침과는 다르다면서도 결국 수정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해, 결과적으로 '병사'를 인정하고 부검의 필요성을 높여 혼란을 가중시켰다.4) 그나마 조사위원장인 이윤성 교수가 "나라면 외인사라고 썼을 것"이라는 사견을 제시해 비난을 무마시켰지만, 그 역시 "일반적으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돼있는 죽음은 부검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여 부검논쟁을 거들었다. 이러한 입장은 조동찬 의학전문기자(신경외과 전문의)에 의해 보다 세련되게 제시됐다. 이윤성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백선하 교수의 '병사' 기재와 서울대병원의 모호한 태도를 분명히 지적하면서도 "유가족이 우려하는 바가 무언지는 충분히 짐작함에도 불구하고 '부검은 의학'"이라며 부검의 당위성을 언급했다. 덧붙여 "전두환 정권 시절, 물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던 서울대학생 고(故) 박종철 사건에서도, 당시 경찰은 쇼크사로 몰아가려 했었다. 이 시도가 좌절됐던 것은 부검의사의 "물고문으로 질식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부검 소견이 결정적이었다"는 역사적 사례를 언급했다.5)

이러한 논쟁은 국정감사장에서도 이어졌다. 이윤성 교수는 백 씨의 사망원인은 병사가 아닌 '외인사(外因死)'라고 주장하면서도 다시 한번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부검은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반면, 인의협의 김경일은 10월 14일 보건복지위원회 종합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증인으로 참석한 백선하 교수를 눈앞에 두고 "결론적으로 환자 가족들에게 거짓말로 수술을 유도하고 가족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계속한 뒤 최종적으로 사인을 바꾼 사건"이라고 소신을 밝긴 후,6) 부검은 "의도적"이며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과 구실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부검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일축했다. 결국 인의협의 단호한 입장을 바탕으로 유가족과 시민들은 경찰의 영장 집행을 막아내며, 사망 41일 만인 11월 5일 무사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부검논쟁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다. 부검을 주장한 사람들이 던진 몇 가지 질문은 제대로 답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다. 우리는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 제기된 질문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도 한국사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고, 위의 질문들을 통해 의학의 사회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의 정리를 위해서라도 부검은 (다른 의학소견보다) 정말 객관적인 의학영역인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례인 건지, 그리고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에서 정말 부검은 필요했는지에 대해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제기된 부검논쟁

전두환 집권 말기 야당과 재야세력은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 결여와 비민주성 공격하며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1986년 2월 각계각층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중점으로 하는 '민주헌법쟁취투쟁'이 확산되고, 신한민주당이 1000만 개헌 서명운동까지 이어지며 직선제에 대한 요구는 점점 높아졌다. 1986년 7월 30일 여야 만장일치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했으나,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의원내각제를 주장해 직선제 요구를 물타기 했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단속하려 했다. 개강 전인 1987년 1월 당시 학생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주요 인물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1987년 1월 서울대 민민투(민중민주화와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원회) 위원으로 '민추위 사건'7)의 주요 인물이었던 박종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종운을 추적하던 경찰은 그가 후배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확보했다. 1월 13일 경찰은 바로 그 후배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14일 새벽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8)

형사들에게 물고문을 받던 박종철은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했다. 당황한 형사들은 가까운 중앙대병원으로 응급실에 들이닥쳤고, 당시 근무 중이던 오연상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박종철 앞에 세웠다. 속옷만 입은 채 온몸이 물에 젖어 평상 위에 누워있는 박종철을 보며 오연상은 물고문을 직감했다. 5분도 안 돼 병원에 도착했지만, 이미 박종철은 사망한 상태였다. 30분가량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형사들은 박종철을 오연상이 근무하는 중앙대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상황이 묘하고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오연상은 병원에 전화를 걸어 불필요한 처치를 막았다(사망 시각과 장소가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박종철의 시신은 중앙대병원을 들러 경찰병원으로 이송됐다.

오연상은 경찰의 사망진단서 작성 요청에 '미상'이라고 적었다. 사인(死因)은 나중에라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경찰도 달리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진료실 앞에 형사들이 배치됐다. 사건은 그렇게 정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다음날(1월 15일) 오전 <중앙일보> 검찰 출입 기자 신성호가 우연히 박종철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다 알고 있다는 식의 연기를 해가며 조각난 정보를 모은 신성호는 과감히 기사를 전송했고, 특종을 직감한 신문사는 윤전기를 멈춰 급하게 석간신문 사회면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1월 15일 오후 3시 반, '경찰에서 조사받던 大學生 쇼크死'라는 6줄이 채 안 되는 짤막한 기사가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그 짧은 기사는 삽시간에 해외로까지 퍼져나갔고 시민들 역시 그 짧은 기사 하나를 보기 위해 연신 신문을 사 갔다.

사건이 알려진 이상 경찰은 해명해야 했다. 신문이 나간 지 3시간 후인 15일 저녁 6시 강민창 치안본부장(현재의 경찰청장)은 대국민기자회견을 열어 '심문' 과정 중 박종철이 사망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오연상의 우려대로 어떤 가혹행위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처럼 설명했으며, 응급조치를 위해 '중앙대병원으로 옮긴 후 12시경'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3시간 후인 9시부터 한양대병원 영안실에서 박종철에 대한 부검이 시작됐다. 이 부검은 당시 서울지검 형사부 검사이던 안상수의 지휘 아래 국과수의 황적준 부검의(剖檢醫)의 집도로 진행됐으며, 박종철의 삼촌 박월길와 한양대병원 마취과 의사 박동호가 입회했다. 부검결과는 명백히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즉 고문치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부검을 마치고 나온 황적준의 설명을 듣고는 "모든 외상을 삭제토록 요구"했고,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며 황적준을 설득했다. 경찰의 설득이 잘 먹히지 않자 국과수 소장이 일단 "불부터 끄"고, "사태진전을 보아가며 처리하자"며 황적준을 다시 설득했고, 결국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기자회견 발표문 작성을 경찰의 요구대로 작성했다.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고문 흔적을 나타내는 사진을 제외하고 13장의 사진도 선별했다. 황적준으로부터 발표문과 사진을 건네받은 치안본부장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기자회견에 나섰다. 1월 16일 오전 8시 반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자신 있게 부검결과 사체외표검사에서 찰과상과 작은 멍밖에 없었으며, 오른쪽 폐에서 탁구공 크기만 한 출혈반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또한 집도의인 황적준 박사에 따르면 "출혈반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전기 충격요법이나 인공호흡을 했을 때도 생길 수 있으며 특별한 치명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목과 가슴 부위에 피멍이 많이 발견됐다"고 부검소견을 전했다.9) 즉, 연행과정 중에 생긴 찰과상 정도만 있었고, 고문은 없었으며, 오히려 심장마비를 일으킨 박종철을 살리려고 하다가 폐 부위에 상흔이 생겼다고 조작한 것이다.

그러나 치안본부장의 기자회견이 끝나고 몇 시간 후 오연상과 삼촌 박월길은 기자들에게 전혀 다른 말들을 쏟아냈다. 오연상은 "도착 즉시 박 군의 눈동자를 살펴보고 심전도 및 호흡 상태를 살펴본 결과 이미 숨진 상태였었다. (중략) 인공호흡을 시키고 충격오법으로 사용되는 캠플주사를 놓고 심장마사지를 약 30분 동안이나 계속했으나 박 군의 심폐기능은 소생되지 않았다. (중략) 이날 심장마사지 도중 전기충격요법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부검을 지켜본 삼촌 박월길은 "사체는 두피를 벗기자 머리 한쪽에 피멍 자국이 드러나 보였으며 이마 뒤통수,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에 여러 군데의 피멍자국이 있었다"고 폭로했다.10)

조작을 통해 막을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경찰의 예상은 빗나가고 있었다. 1월 16일 오후 오연상과 삼촌 박월길의 폭로가 담긴 기사를 접한 황적준은 진실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기자회견문은 거짓을 말했지만, 최종 "부검 감정서만은 사실대로 기술해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황적준에게 "1월 19일까지 감정서를 '심장쇼크사'로 보고하도록 강요"했고, 국과수 소장을 통해 10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며 "당신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이미 둑의 구멍은 손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1월 17일 신문들은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들로부터 들었다", "폐에서 사망 시 등에 들리는 수포음이 전체적으로 들렸다"11),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있었다", "복부팽창은 물을 많이 마셨거나…" 등 다시 한번 오연상의 인터뷰를 옮기며 경찰의 물고문 자백을 종용했다.12)

비록 오연상은 기자회견 후 경찰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고 집과 연락을 끊은 채 숨어 지내야 했지만, 그의 말대로 "그 이후로는 사건 자체가 추진력이 생겨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경찰은 1월 19일, 사흘 전의 발언을 뒤집고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이라며 번복 발표하며 두 명의 경찰을 범인으로 내세웠다. 이 발표도 축소, 왜곡된 것이었지만 한국 공안사건 역사상 고문에 의한 사망을 인정한 최초의 순간이었다.13) 이 과정에서 황적준의 기여도 적지 않았다. 경찰과 당시 권력다툼으로 마찰을 빚던 검찰에 부검결과를 사실대로 전달함으로써 경찰이 스스로 적절한 선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14) 또한 1월 20일에는 실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최종 부검감정서는 제출함으로써 진상규명에 쐐기를 박았다. 아울러 그의 일기장은 훗날 결정적 증거가 되어 이 모든 조작을 주도한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감옥으로 보냈다.

ⓒ연합뉴스


백남기, 그리고 박종철의 죽음을 통해 알 수 있는 부검에 대한 몇 가지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부검이 결정적인 역할은 했는가? 살펴보았듯이 황적준의 양심적 행동에 나서기 전 이미 사건은 오연상에 의해 경찰이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오연상이 남영동에서 목격한, 그리고 검진한 결과를 기자들에게 폭로한 순간 총알은 이미 총구를 떠났다. 물론 황적준이 정확한 부검소견서를 작성하고 용기를 내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사건의 실체가 명확해졌고 치안본부장이 죗값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건의 진실을 보다 분명히 밝히는 역할을 한 것이지, 묻힐 수 있는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것은 오연상과 박종철의 가족들이었다. 황적준 스스로 일기장에 밝혔듯이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계기 역시 그들의 용기 있는 폭로에 힘입은 것이었다.15)

그렇다면 과연 부검은 객관적인가? 그리고 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그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례인가? 황적준의 용기 있는 행동이 가치 있었던 것은, 정작 물고문을 가리키는 황적준의 부검소견이 당시 경찰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즉 박종철의 사망 당시에는 황적준의 부검소견은 오히려 물고문이 아닐 수 있다는 증거로 쓰였다. 다시 말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거꾸로 부검이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객관적 의학’을 내세운 국과수가 국가기구라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얼마나 취약한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역사적인 사례다. 황적준의 일기를 보면 경찰은 물론 국과수 소장까지 그를 회유했고, 내로라하는 법의학자까지 타협을 권했다. 황적준이 ‘객관적’인 것이지 국과수나 부검 자체가 객관적인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결코 아니란 얘기다.

현대 의학에서 한국사회에서 부검이 기여해온 성과와 그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부검은 사망사고에서 어디까지나 의학적 검증을 위해 고려할 수 있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이지, '최종심급'인 것처럼 여겨서는 곤란하다. 아울러, 박종철 사건의 부검조작 같은 정도의 일이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국과수가 국가기구로서 갖는 근본적 한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령 국과수의 부검이 100% 객관적이라고 해도, 부검의가 황적준과 같은 실력 있고 양심적인 의사들만 있다고 해도,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에서 부검소견이 과연 그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데 도움이 됐을까?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 일어난 지 수백일이 지나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경까지 간 상황에서, 부검이 과연 어떤 진실을 더 분명히 밝혀줄 수 있었을까? 변사 사건의 경우 부검이 필요하다고?16)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과연 ‘변사’인가? 오히려 부검요구 자체가 그 죽음을 변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각주

1) 2016년 9월 25일 자 인의협, '백남기 농민 사인에 대한 인도주의실천의협의회(인의협) 의견서'

2) 2016년 9월 27일 자 <미디어오늘> '백남기 사망원인, 없는 논쟁을 누가 만드나'

3) 김경일, 이현의, 이보라는 2016년 10월 25일 의견서를 제출했고, 30일 김경일이 신경외과전문의로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은 직후 찍은 CT 사진을 공개하며 설명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사인이 명확하기에 부검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4) 서울대병원은 2017년 6월 15일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에 기재된 사망종류를 '병사'에서 '외인사'로 변경했다. 지침상으로도 틀렸고, 서울대병원 이름으로 발부되는 사망진단서인데, 논란이 일었을 때 개입해 바로잡지 않고 사건이 잠잠해진 후에 바꾸는 모습은 기회주의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2017년 6월 19일 자 인의협 성명 '서울대병원은 외인사로 한 번 죽고 병사로 두 번 죽었다')

5) 2016년 9월 27일 자 SBS <8시 뉴스> '[취재파일] 백남기, 서울대병원 사망진단서 그리고 부검'. 이 취재를 한 조동찬 의학전문기자(의사)는 2016년 '올해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6) 2016년 10월 14일 자 '"백남기 사인, 거짓말 투성이" 발언에 여당 의원들 '발끈'"

7) 민추위 사건이란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학내외의 각종 시위 배후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지목하여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하여 구속하고 그중 22명을 기소, 3명을 불구속입건하는 한편 17명을 수배하였다. 이 수배자 중 한명이 바로 민추위 산하 서울대 민민투 조직책 박종운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중)

8) 1998년 11월 11일 자 <대한매일>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민주불씨' 전 서울대생 박종철'(김재영 기자)

9) 1988년 2월호 월간 <말> '황적준 박사 일기장 전문공개' 35~37쪽

10) 1987년 1워 16일 자 <동아일보> 석간 11면 '大學生 경찰調査받다 死亡 民民鬪관련'

11) 오연상은 이에 대해 일부러 물과 관련된 표현을 많이 썼다고 한다.(2013년 5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의 오연상 원장('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중앙의대 용산병원 내과의사) 인터뷰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중

12) 1987년 1월 17일 자 <경향신문> 11면 '경찰4명 철야신문 苛酷行爲(가혹행위)여부 집중 검찰'

13) <역사가 의학을 만났을 때>(황상익 지음, 푸른역사 펴냄) 중 51~52쪽

14) 이러한 조치 덕에 경찰은 검찰의 개입을 차단하고 자체적인 내부 수사권을 따내고 사건을 다시 한번 조작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5) 이러한 조치 덕에 경찰은 검찰의 개입을 차단하고 자체적인 내부 수사권을 따내고 사건을 다시 한번 조작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6)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과 비교해보자면, 만약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처럼 CCTV 영상이 있었다면 아예 부검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참고문헌(중요도 순)

-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은 <광장에 선 의사들>(최규진 지음, 이데아 펴냄) 참고

- 1988년 2월호 월간 <말> '황적준 박사 일기장 전문공개'


- 2013년 5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오연상 원장 인터뷰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 <안검사의 일기>(안상수 지음, 새로운사람들 펴냄)


- 2007년 4월 10일 <뉴스메이커> '[6월항쟁20주년] 박종철 사망사건의 전말 (上)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


- 2016년 9월 25일 자 인의협 '백남기 농민 사인에 대한 인도주의실천의협의회(인의협) 의견서'


- 2017년 6월 19일 자 인의협 성명 '서울대병원은 외인사로 한 번 죽고 병사로 두 번 죽었다'


- <박종철 평전>(최인호·김태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펴냄)


- <역사가 의학을 만났을 때>(황상익 지음, 푸른역사 펴냄)


- 2016년 9월 26일 자 <프레시안> '경찰, 故백남기 씨 부검 영장 재청구 검토...유족 반발' 


- 2016년 9월 27일 자 <미디어오늘> '백남기 사망원인, 없는 논쟁을 누가 만드나'


- 2016년 9월 27일 자 SBS <8시 뉴스> '[취재파일] 백남기, 서울대병원 사망진단서 그리고 부검'


- 2016년 10월 14일 자 <데일리팜> '"백남기 사인, 거짓말 투성이" 발언에 여당 의원들 '발끈''


- 1998년 11월 11일 자 <대한매일>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민주불씨' 전 서울대생 박종철'


- 1987년 1월 16일 자 <동아일보> 석간 11면 '大學生 경찰調査받다 死亡 民民鬪관련'


- 1987년 1월 17일 자 <경향신문> '경찰4명 철야신문 苛酷行爲(가혹행위)여부 집중 검찰'

다른 글 보기
<의료와 사회>는 건강권과 보건의료운동의 쟁점을 정리하고 담아내는 대중 이론 매체입니다. 한국의 건강 문제는 사회와 의료,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볼 때만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료와 사회>는 보건의료·건강권 운동 활동가 및 전문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건강을 위한 사회 변화를 논의하는 장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