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의 해외입양은 '혼혈아 청소'였다
2017.09.08 09:19:27
카카오톡 친구추가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2. 입양의 정치경제학 ①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국제입양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서양 양부모에 의한 아시아 아동의 대규모 입양은 1950년대 한국 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먼, "21세기의 아시아의 국제입양", 2014)

국제입양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한국은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낸 나라다(1953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 정부가 제시하는 통계는 16만여 명, 국제사회의 추정은 20만 명 이상을 해외입양 보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한국이 산업화된 국제입양의 '기본틀'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과 미국간 국제입양을 통해 현재 국제입양의 많은 문제점들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국제입양이 어떻게 처음 일어났고, 어떤 제도와 법들로 유지돼 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현재 문제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여성과 결혼한 이승만, '일국일민주의'를 고집하다

한국의 해외입양은 1953년 이승만 정권 때 시작됐다. 본인은 오스트리아 여성과 결혼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일국일민(一國一民)주의'를 정치적 신념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 당시 외국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은 '아버지의 나라'로 보내는 것이 정책 방향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1954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혼혈아동의 국외입양 추진을 위해 보건사회부 산하에 '한국아동양호회'(대한사회복지회 전신)라는 입양기관을 만들었다.

김호수 뉴욕시립대 교수는 "혼혈아를 낳은 여성은 기지촌 여성, 즉 군대 매춘부로 간주됐다. 엄마의 직업이 지닌 낙인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한국 바깥에서 가정을 구해야 하는 아이들로 여겨졌다"고 당시 국제입양의 성격에 대해 설명했다. (김호수, "아이를 키우지 못한 엄마들-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생모들", <한국 해외 입양 : 초국가적 아동 양육 실험과 분투하는 입양 서사 50년>에 수록)

이경은 박사는 "이 당시 해외입양은 입양이 아니라 혼혈 아동의 집단적인 국제 이주였다"면서 "전쟁 이후 발생한 혼혈아동 문제를 사적 기관에 의해 해결한 것이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아버지의 나라'로 보낸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고 말했다. 1975년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되기 전 미군이 벌였던 '베이비 리프트(baby lift)' 작전과 유사한 성격이라는 지적이다. 미군은 당시 참전국 병사들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낳은 혼혈아를 비롯해 '전쟁 고아' 3300명 이상을 미국과 유럽으로 보내 입양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직후 해외입양은 관련된 명확한 법령도 없이 미국인들에 의해 설립된 고아원 등을 통해 '아동 긴급구호'라는 명분으로 진행됐다. 특히 혼혈아동은 어머니가 키우고 있는 경우에도 이를 지원하는 대신 모자가정을 해체시키고 해외입양을 보냈다.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입양은 모자가정에 대한 지원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전쟁 고아'를 해외로 입양 보냈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이다. 어머니가 있어도 혼혈아동들은 가부장적이며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강제 이주' 당한 것이다. 


제인 정 트렌카 대표는 한국전쟁 이후 혼혈아동의 국제입양에 대해 "당시 많은 나라가 전쟁을 겪었다. 또 전쟁 과정에서 혼혈아동을 포함해 보호를 필요로 하는 많은 아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나라도 '아버지의 나라'로 보낸다며 이렇게 대거 입양을 보낸 사례가 없다"며 "심지어 혼혈아동이 전쟁을 벌인 적군의 아이들도 아니었는데 왜 이들을 내보내야 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고 말했다. 


중앙입양원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61년까지 4185명의 혼혈아동이 해외입양 됐으며, 이들 중 4155명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 이승만 정부는 대대적으로 혼혈아동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해외입양 보냈다. (표 출처 : 보건사회부, 『건국10주년 보건사회행정개관』 (1958) p.317. (중앙입양원 보관본 참조), 이경은 논문에서 재인용)


▲ 홀트양자회에서 해외입양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동들 ⓒ중앙입양원(홀트아동복지회 제공)


이승만과 홀트, 대리 입양을 탄생시키다

한국전쟁 직후 아동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해리 홀트와 버다 홀트 부부다. 미국 오리건주에 사는 평범한 농부였던 홀트 부부는 사회복지기관인 월드 비전을 설립한 밥 피어스 목사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한국 혼혈 아동을 돕는 일을 할 것을 결심했다. 홀트 부부에게 한국 아동의 입양은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한 일이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 이후 한국 아동을 입양하는 근거가 된 법은 '난민구호법'이다. 1953년 '난민구호법' 제5항을 통해 '10세 미만의 자격을 갖춘 고아에게 4000건의 특별 비할당 비자가 책정'됨에 따라 한국 아동의 입양 이민이 가능해졌다. 당시 '난민구호법'은 한 가정 당 2명의 아동만 입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해리 홀트는 월드비전을 통해 8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섰다. 월드비전은 당시 오리건주 상원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의회가 홀트 부부를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 상원의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앞에서 한 연설에서 "한국이라는 황폐하고 고통 받는 나라의 작은 여덟 아이들에게 미국에서의 안전과 위로를 베푸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위가 어디 있겠냐"고 주장했다. 미 의회는 홀트 부부를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홀트는 1955년 10월 14일 자신이 입양한 아동 8명을 포함한 12명의 한국 아동을 데리고 미국 포틀랜드 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홀트는 1956년 '홀트양자회'를 설립해 미국으로의 입양 절차와 관련된 실무 지원을 맡았다. 그는 한국에서 대규모의 고아원과 영아원을 운영하고, 1956년 12월부터는 입양아동을 수송하기 위해 3~4개월마다 한번씩 전세기로 입양 아동을 이주시켰다. 현재도 홀트아동복지회는 한국에서 해외입양 업무를 하고 있고, 이사장인 마리 홀트는 해리 홀트의 딸이다.

이승만 정부와 홀트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해외입양 방식이 '대리 입양'이다. 양부모가 입양아동의 출생 국가에 오지 않고 대리인(입양기관)이 아동의 출생국가에서 모든 과정을 대리해 아동을 양부모에게 인수인계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전 해외입양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형태다.

월드비전의 설립자인 밥 피어스와 해리 홀트의 부인인 버다 홀트는 이승만 정부의 사회부 장관을 만나 1956년 대리 입양 방식에 대해 합의했다. 이에 보조를 맞춰 해리 홀트는 입양 사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만료를 앞둔 미국의 난민구제법이 연장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입법 청원을 벌였고, 1956년 12월 만료 예정이던 난민구제법은 1961년 6월까지 연장됐다.

'대리 입양' 방식은 당시 미국 사회복지계에서 논란을 낳았다. 기존 사회복지기관에서는 입양부모와 아동이 서로 얼굴 한번 보지 않고 가족이 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문제제기 했다. 이에 맞서 홀트는 전쟁 후 긴급 구호 차원에서 대규모의 한국 아동 입양이 불가피하며, 입양 부모가 되기를 원하는 대다수의 부부들이 한국을 방문해 입양 절차를 밟을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에게 "만일 대리 입양이 중단된다면 여러분은 아이를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오늘 당장 여러분의 국회의원들에게 편지를 쓰자"고 정치적으로 동원하기도 했다.

당시 홀트를 통한 입양은 6개월 정도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양부모 가정에 대한 입양 적합도 조사도 없이 목사의 '추천서' 정도만 있으면 원하는 이들은 입양이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주 법원에서는 '고아호적'과 입양기관장의 입양동의서만 있는 한국 아동의 입양 재판을 거부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전쟁 이후 한국과 미국간 해외입양은 이전(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아동에 대한 미국인의 입양)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입양 아동의 나이가 영아(0-2세로) 입양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수준으로 낮아졌으며, 입양 절차를 대리하는 전문 입양기관이 출연하면서 대규모 입양이 가능해졌다. 또 입양 부모와 아동간 인종적 차이가 발생했으며, 입양 부모와 아동 출신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커졌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인종적 차이와 문화적 차이는 이후 입양 가정 내에서의 상호 적응과 정체성 형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과제를 낳았다. 


▲1955년 해리 홀트 씨가 입양한 한국 아동 8명을 포함한 12명의 최초의 한국 출신 입양아동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 제일 선두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이 해리 홀트(오른쪽)와 버다 홀트 부부다. ⓒ중앙입양원(홀트아동복지회 제공)


▲ 샌프란시스코로 입양된 아동 97명이 특별기를 통해 이송되는 장면. 비행기 좌석을 치운 자리에 종이로 만든 박스를 배치하고 아이들을 눕히고 중간 중간 아이들을 돌보는 위탁모들이 앉았다. ⓒ중앙입양원(홀트아동복지회 제공)



한국 아동 입양은 미국 외교정책의 일부였다


해외입양된 한국 아동의 2/3 이상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미국이 국제입양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처럼 많은 아동들이 미국으로 갔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1950년대 당시에만 해도 미국의 이민제도는 철저하게 '인종적'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한국 출신 아동이 대거 입양을 통해 이민 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캐서린 시니저 초이 UC버클리대 교수는 "20세기 전반기 대부분 동안 배제(exclusion)는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 역사에서 지배적인 주제였다. 이는 미국 이민법에서 성문화되어 1924년까지 사실상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은 금지됐다"고 지적했다. 이후 노동시장의 필요에 의해 중국 등 일부 아시아 국가 노동자들의 이민을 받아들였지만, 가족들의 동반 이민은 상당 기간 동안 허락되지 않았다. 해외입양을 통한 이민은 이런 '배제'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또 백인 가정에서 흑인과 인디언 아동을 입양하는 것에 대해 흑인과 인디언 커뮤니티 내에선 '인종적·문화적 말살'로 보고 반대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한국 아동의 '인종간 입양'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예외적인 흐름이다. 실제 1970년대에 인디언 아동의 백인 가정 입양을 금지하는 '인디언 아동복지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김호수 뉴욕시립대 교수는 "이 시기의 해외입양은 입양인과 혼혈아동에 대한 민간 차원의 인도적인 구제 활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냉전 체제 안에서 대아시아 정책-화합과 봉쇄-의 외교 정책의 일부"라고 한국과 미국간 입양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 분석했다. 김 교수는 "전쟁의 폐허와 가난으로부터 서양의 기독교 가정으로의 입양이야말로 당시 팽배했던 냉전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미국을 자유 진영의 지도자, 한국과 그 아이들을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평화의 수호자로 그려내는데 탁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소련과 체제 경쟁을 하는 미국 입장에서 '세계를 구원하는 국가'라는 상징을 만들기에 입양은 딱 들어맞는 일이었다.  이처럼 한국과 미국간 국제입양이 일종의 아동 복지 '시스템'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양국 국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2007년, 2008년, 2014년, 한국 입양아동들은 양부모 손에 살해됐다

 

이경은 박사는 한국에서 촉발된 국제입양의 제2의 물결에 대해 "시장원리에 의한 사적기관이 주도하면서 아동 송출국이나 수령국이 아동보호를 강화하는 법제가 아니라 국제입양의 절차와 기준을 대폭 간소화하여 사적기관의 입양 중개과정을 수월하게 하는 법제로 대응했다"고 지적했다.

대리 입양은 이후 60여년간 전세계적으로 아동의 국제입양을 확대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대 아동 송출국 중 하나인 한국은 입양특례법 개정으로 2013년부터 가정법원에서 양부모가 참석한 가운데 입양재판이 진행되면서 대리 입양이 사라졌다.

이 박사는 대리 입양에 대해 "입양 아동의 인권에 여러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양부모의 입양자격에 대한 심사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송출국에서는 아동의 양부모의 자격을 심사할 수 있는 수단이 없고, 전적으로 수령국의 입양중개기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이를 담당하는 입양중개기관들은 수령국에서는 공적인 아동복지와 사회복지체계에 속하지 않는 사적 기관들이었다. 이 기관들은 수령국 국내의 아동복지와 입양에 부합한 기준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양부모의 국제입양을 중개하고 지원하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입양아 살해, 시민권 미취득, 추방 등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은 이런 대리 입양 관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4년 양아버지 브라이언 오컬러한의 구타로 죽은 현수 사건은 국내에 그나마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도 입양 아동이 양부모에게 살해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지난 2008년 미국 입양부 스티븐 세플은 한국 입양아 4명을 야구방망이로 때려 죽였다. 그는 이후 아내도 살해하고 자살했다. 또 지난 2007년 미국 입양아 정희민은 양어머니 레베카 캐리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캐리는 살인죄 판결을 받았지만 플리바게닝을 통해 중범죄 혐의를 벗어나, 그는 결국 13개월 된 아동을 살해하고도 3년 수감생활을 하고 석방됐다.

한국으로 추방돼 힘겨운 삶을 살다가 지난 5월 자살한 필립 클레이 씨의 문제도 처음 입양하기로 한 양부모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출신 입양인들이 유독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이 많은 이유가 대리 입양 후 마음이 변해 '리홈'을 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입양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입양 서류 등에 대한 전달이 제대로 안 되고 양부모의 책임 의식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돈과 시간이 드는 시민권 획득 절차를 양부모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대리 입양은 박정희 정권에서 1961년 제정된 고아입양특례법을 통해 법제화 된다. 고아입양특례법 제 6조는 '외국인은 각령에 정하는 기관으로 하여금 입양절차의 일부를 대리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경은 박사는 이 법에 대해 "한국법의 전통과는 괴리된 생소한 법규였으며 비교법적으로 보아도 당시 어느 나라에서도 입법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시작돼 그 당시 이미 관행이 입양기관을 통한 한미간 국제입양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제화가 아니었냐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미국은 1961년 이후 대리 입양을 금지했으나, 한국의 고아입양특례법을 근거로 한미 간의 입양 형태는 크게 변동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1961년 미국의 이민법상 '고아' 규정이 생겼다. 그전까지는 난민법상 쿼터 제한으로 입양되는 아동의 숫자를 제한하던 방식에서 미국 양부모가 입양을 원하는 '고아' 규정을 충족하는 아동들은 숫자의 제한 없이 미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됐다.

이민법상 '고아' 규정은 1980년대 한해 수천명씩 미국으로 입양되는 법적 근거가 됐다.


표2. 1953-1970년까지 연도별 해외입양된 아동 수

▲출처 : 보건복지부, 중앙입양원




▲ 본문에 인용된 사진들은 중앙입양원이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의 입양 역사'(The History of Adoption in Korea in Photographs)에 실린 것을 재인용했다. 맨 위의 사진은 홀트 부부가 입양한 8명의 한국 아동. 오른쪽은 중앙입양원이 발간한 책자. 왼쪽은 혼혈아동과 함께 있는 펄 벅 씨. 소설가이기도 그녀는 한국전쟁 직후 고아들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었다. 펄벅 재단을 통해서도 미국과 호주에 2만4000여 명이 입양된 것으로 기록됐으나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는 이 숫자가 누락돼 있다. ⓒ중앙입양원


(이 기사는 ▲이경은(법학 박사)의 “국제입양에 있어서 아동 권리의 국제법적 보호”(서울대 2017년 박사학위 논문)과 ▲캐서린 시니저 초이(UC버클리 대학 교수)의 “국제 입양의 기관화 : 미국 내 한국인 입양의 역사적 기원”(<한국 해외 입양 : 초국가적 아동 양육 실험과 분투하는 입양 서사 50년>에 수록), ▲중앙입양원의 '사진으로 본 한국 입양의 역사(The History of Adoption in Korea in Photographs)', 세 글을 참고했습니다.)

전홍기혜 기자
onscar@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1년 프레시안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13년부터 4년 동안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프레시안 기자들과 함께 취재한 내용을 묶어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등을 책으로 냈습니다. 원래도 계획에 맞춰 사는 삶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 아이 덕분에 무계획적인 삶을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