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와 '여사'에 관한 근원적 고찰
2017.05.16 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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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여사, 여배우, 여검사, 여가수...
한 인터넷신문이 영부인을 '김정숙 씨'라고 썼다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문 대통령 내외의 이사 소식을 다룬 14일자 <오마이뉴스> 기사였습니다. (☞관련 기사 : [오마이뉴스] "이사 갑니다"... 문재인 부부, 홍은동 주민들과 '작별')

항의의 요지는 '영부인한테 ○○○씨(氏)라니, 무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와대는 "'영부인'이라는 명칭보다는 '여사님'이 독립적 인격으로 보는 의미가 있다"며 가급적 '여사'라고 불러 달라는 취지로 언론에 부탁해 왔습니다. "'영부인'이라는 단어가 약간 권위적인 느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사(女史)'란 국어사전에 따르면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거나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대통령이 됐다면 그 남편 이름 뒤에는 뭐가 붙을까요? '이승배 선생'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결혼한 남성을 높여 이르는 말'은 뭘까요?

사실 '여사'라는 호칭 자체가 여성이 '예외적 존재'였던 문화적 맥락 속에서 나옵니다. 이른바 '여류 명사'라는 표현이나 여교사, 여교수, 여검사, 여기자, 여가수, 여배우 등의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 교수, 검사, 기자, 가수, 배우 등 사회적인 활동을 벌이는 것은 모두 남성이고, 예외적으로 여성이 이런 직업을 가졌을 때 접두사처럼 '여(女)-'를 붙였습니다. 그런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간간이 여성을 대접해 부를 일이 있을 때 소환되던 '호칭'일 뿐, '직함'도 아닌 실체 없는 말이 '여사'였던 겁니다.

예를 들어,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나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의 남편은 심재환 선생, 박성준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원래의 직함에 맞게 '심 변호사', '박 교수'라고 불렸습니다. 심상정 대표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심 대표의 뒷바라지를 한 그의 남편은 아무 직함이 없는데, 그래서 대선 기간 방송 인터뷰에 응했을 때 사회자가 그를 부르는 말은 '이승배 선생'이었습니다. 다만 이는 정말로 '호칭(呼稱)'일 때, 즉 심 대표의 남편이 눈앞에 앉아 있을 때 그를 부르는 말로 썼을 뿐 기사체로 작성된 글에서는 모두 '이승배 씨'였죠.

이렇게 남성에 대해서는 전직일지라도 어떻게든 직함을 찾아 성명 뒤에 붙이고, 정 없으면 차라리 '-씨'라고 씁니다. 반면 여성에 대해서는 '여사'라고 '퉁 치는' 게 언론의, 그리고 사회의 못된 관행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예 습관적으로 '여성=여사' 등식이 적용됩니다. 고(故)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는 '박정기 전 유가협 회장'인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는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이 아니라 '이소선 여사' 또는 (심지어) '이소선 어머니'라고도 불렸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역시 1980년대에 유가협 회장을 지냈음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여사'라는 말이 언론 지면에 등장할 때마다 그에 대한 시비가 있어 왔습니다. 2014년 한 언론사에서는 '여사'라는 말을 지면에 쓰지 않는 것을 아예 편집·교열 원칙으로 삼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이 편집국장 후보자에 대한 공식 청문회 질문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희호 여사' 대신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권양숙(김윤옥) 여사' 대신 '권양숙(김윤옥) 전 영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기사는 이런 언론계 안팎의 고민의 흔적입니다. 사실상 궁여지책이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씨'라는 호칭도 무례한 것은 아닙니다. 국어사전은 '-씨'를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해 부르거나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며 "공식적·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청와대 취재 기자가 청와대 대변인에게 "김정숙 씨는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으면 무례한 게 맞습니다만,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인 기사문에서 '-씨'라고 표현한 것은 부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프레시안>이 '-씨'라는 호칭을 지면에서 쓰지 않은 것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영부인은 법률적으로는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일 뿐이나, 현실적으로 좀 독특한 위치에 있는 게 맞습니다. 특히 대통령과 함께 외교적인 행사나 국가 의례에서 의전상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 정상의 배우자를 따로 접견하기도 하고, 아예 대통령과는 별도로 공식 사회 행사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법률상 공무원도 아닌 영부인이 이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관례가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 것인지 좀더 근본적인 토론도 가능하겠지만, 일단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본다면 그가 그런 역할을 함으로써 외교 의례 또는 사회 통합의 차원에서 한국의 '국익'을 위해 일정한 기여를 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역대 영부인들의 활동이 주목받은 것은 그들 개인이 가진 자연인으로서의 역량과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현직 대통령과 맺은 개인적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영부인의 존재나 활동에서 "독립적 인격"(14일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말)이 고려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즉 기자나 독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인 김정숙'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이기 때문입니다. '-씨'라는 가장 "독립적"인 호칭이 망설여지는 까닭입니다.

다만 이것이 '여사'라는 호칭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개 교수가 "독립적인 인격"의 차원이 아닌 '전 총리의 남편'이라는 맥락에서 언급될 때는 왜 '아무개 교수'라고 써야 하나요? 그가 전직 총리의 남편인 것과 그의 직업이 대학 교수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청와대가 "권위적"이라며 물리친 '영부인'이라는 말을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처럼 쓰는 것도 생각해봄직 합니다. 물론 '영부인'은 현재 사전상으로는 '영애'나 '영식'처럼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일 뿐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뜻은 없습니다. 다만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기에, 그런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최근 십여 년 간 언론 지상에서 '영부인'은 사실상 '대통령의 부인'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말입니다. 아니면 이참에, 아예 성별을 떠나 '대통령의 배우자'를 공식적으로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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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기자
nowhere@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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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팀에서 '아랍의 봄'과 위키리크스 사태를 겪었고, 후쿠시마 사태 당시 동일본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통일부 출입기자 시절 연평도 사태가 터졌고, 김정일이 사망했습니다. 2012년 총선 때부터는 정치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